(어떤 책을 볼 때 기억하기 위하여 간단하게 메모하여 둡니다.

예수와 십자가 처형이라는 플레밍 러틀리지의 책을 보다가

믿음이 주어(主語)이다라는 메모를 하였습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 어떤 대상을 믿는다고 말함이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주어가 되고 주체가 된다는 표현은 어색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믿음이 주어가 된다고 합니다.

오늘 정리하려고 그 내용을 다시 보니 나의 정리보다

책 그대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올립니다.

아래의 글이 그렇게 길지 않으니 믿음을 정리해 보면 좋겠습니다.)

 


믿음은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의로움이 하나님께서 만들어내는 공동체의 삶에서 유일한 행위 주체라면, 믿음 자체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우리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믿음이 행위가 아니고 반응도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믿음에 대한 율법의 관계를 묘사하는 구절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3:23~26).

 

바울은 믿음을 동사 오다의 주어로 사용한다. 확실히 여기서 믿음이 온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오심과 동의어이다. 위의 구절에서 믿음이라는 단어 대신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대체할 수 있으며, 그래도 이 구절은 완전한 의미가 통한다. 이는 바울에게는 믿음이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키는 그리스도 자신의 능력임을 드러낸다. “믿음은 복음을 선포할 때 복음의 토대이신 주님이 그곳에 임하셔서 우리에게 지배권을 행하신다는 사실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믿음을 유발하고, 믿음을 낳고, 믿음을 생기게 하고, 믿음을 끌어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이 우리가 공적을 인정받을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 자신의 사역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이 점이 마가복음 9장의 귀신 들린 아이 이야기에서 잊을 수 없게끔 예시되어 있다. 그 소년이 땅바닥에서 몸부림치고 있을 때,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하더라”(9:21~24).

 

이 이례적인 이야기에서 우리는 예수의 능력이 작동해서 믿음을 낳게 하는 것을 본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믿음의 발언이라고 불리는 그 아버지의 부르짖음은 분명한 언어로 온전한 실상을 진술한다. 첫째,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 예수의 능력을 부여하는 말에 의해 믿음이 유발된다. 이는 순식간의 굴복이라는 굉장한 대담성”-“내가 믿나이다!”라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갑작스러운 외침-을 낳는다. 둘째, 이렇게 유발된 믿음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영원히 선물로 남는다. 이생에서는 결코 우리가 주님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때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갖기로 선택할수 없고 단지 기쁨과 감사로 그것을 받을 뿐이다. 우리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바르게 함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믿음이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서,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옹호자(파라클레이토스)인 경우에만 심판대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동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