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거잖아요.

어떤 자들은,
예수는 아예 제껴두고 그저 아버지께 가는 요식행위 정도로 그렇게 여기면서 기도할 땐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고 예수 까닭에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니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 아닌가? 하는데 이런 자들이 정말 예수 믿는자 맞아요? 마치 빚을 청산해 준 은인 정도로 생각해 주는 것을 예수 잘 믿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의외로 이런 분들이 꽤 많지요.

그러면서
그 예수가 아니라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야 진짜 성도의 도리를 하는 것처럼 예수를 은연중에 홀대하면서 예수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하나의 방법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언제나 예수를 나의 구원과 문제 해결의 도구로 사용하는 어처구니 없는 종교행위에 빠져들 수가 있고요. 이쯤되면 내가 예수를 믿어 주는 양, 선심쓰듯 주의 일을 한다지만, 결국엔 내 의도대로 일이 전개되지 않게되면
내가 얼마나 주를 위해 충성했는데 주를 위해 봉사했는데라며 시험에 들게 되는 경우를 많이 목격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하나요?
내가 하는 일들이 주님께 뭔가 보탬이 되는 것이 있던가요?
모든 것은 다 자기 좋아서 해 놓고서는 주님을 위해서 했다는 것이 성도들이 가장 많이 범하기 쉬운 실수이지만 이는 자기기만 입니다.

물론 우리의 믿음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 나아가야 하며 우리의 결론은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기는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가 시키는데로 모든 일을 수행하셨다고 하셨죠.
전혀 틀린 이야기를 하는것 아니겠지만, 이 역사 안에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넘어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 맞기나 하는 걸까요?

어떤 이들은 이렇게 비유합니다.
옆집에서 아주 중요한 선물을 우리 집에 그 종을 시켜 선물을 가져 왔는데 우린 그 선물을 보내주신 그 옆집 어르신께 감사해야지 그 종을 붙잡고 감사하다고 절을 하는 것과 같지 않냐고하며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어떤 대단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프로젝트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를 보게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일리가 있잖아요?
너무 그럴듯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리는 백프로 맞아야 그것이 구원이요 생명이 될 수 있지 엇비슷하거나 일리가 있는 것 가지고는 가당치도 않은 것입니다.
왜 진리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에 의해 계시되는 것이요 허락된 자들에게만 그 진리가 이해 되기에 말씀은 결국 하나여야 합니다. 사람들에 따라 이해하는 척도와 그 측면은 다르게 들릴지라도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성경은 예수가 참하나님이요 영생이라 합니다.(요1서 5:20)
요한복음에서는 영생은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 보내신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것이라 합니다.
아버지의 일은 아들을 믿는 것이라 했잖아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요 예수를 바로 아는 것이 아버지를 아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린 마치 구원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끊어 놓은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믿고 구원 받을 때는 예수가 필요한데 구원 후는 그 예수는 필요없게 되는거처럼 생각되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천국가는 구원의 티켓, 그것이 무엇이든 그런 것이 있다면 그건 가짜입니다.
천국 문에 들어가는 순간에 여러분에게 그 예수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여러분이 성숙해졌다거나 초월적이 되었다면 그건 자아도취나 자기기만이지 결코 진짜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 마지막 순간 더 절실하게 내 육신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그 십자가를 지실 수 밖에 없는 예수의 피흘리심이 믿어지게 될것이요. 왜 나는 안 되는 존재였는지가 이 역사와 묵시 사이에서 백일하에 드러나며 나를 그 불심판으로부터 가리워 줄 구세주 예수가 얼마나 내게 절실했던지가 그분의 끈질긴 자비 때문에 입증되고야마는 것입니다.

지금 나를 구원해 주시지 않는다면 난 너무나 무력한 존재임이 실감난 나머지 실로 그 예수의 생명에 거침없이 빨려 들게 될 것입니다.

그때 나를 홀로 두지 않으신 아버지께 무한 감사드리며 아버지의 하신 일을 진실로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믿는다 했던 그 믿음은 몽땅 다 아니였구나?
믿게해 주셔야만 믿을 수 있는 것이구나?
다시한번 그 생명안에 있음을 감사하게 될 것이며 나같이 아무 공로 없는 자를 믿는자로 여겨주심에 은혜를 다시한번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사는 것이 광야교회의 삶이요. 이 육적인 생애 전체가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를 지나가는 형국이라 것을 한 순간도 잊고 살면 안됩니다.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처럼 다 이루었다고 하며 하늘로 올라갈 자가 아무도 없잖아요?
생이 다하는날까지 현재진행형의 십자가의 행렬은 세상에게 맞아 죽을때까지 계속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를 지나 아버지께로~
은혜를 넘어 완성으로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향점은 될수 있어도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목표 지점은 될 수 없는거예요.

"내가 다 이루었다."는 완성의 선언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외칠 수 있는 그런 외침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지니라..." 아멘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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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_level_40.gif 강구만 15.08.17. 23:24 new
우리의 구원 역시 주를 위한 구원이지 나를 위한 구원은 없지요.
창조의 큰 틀에서 성경을 보지 못하면 왜 예수가 '주'이신지 알지 못합니다.
우린 나만 사랑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1:15-17)"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롬 8:29)

감사합니다 목사님.
 
a_level_30.gif 노요한 07:09 new
장로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역사적 예수에 국한시켜 인간의 측면만을 강조하는 누를 범하는가하면
예수의 신성만을 강조하여 그분의 인성을
부정하는 학파들도 교회사에 많이 있었죠~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그 성육신 사건에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가
그 십자가 사건에서 그아들에게 모든 심판을 남김없이 쏟아 부으신 그 하나님 열심이 우리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셨는지를 보게되면
예수를 믿는다는 그 믿음의 본질이 조금은 달라지겠죠.
그러나 그사랑마저도 내 유익으로 챙기려는 사악한 본심을 들킬때마다 그래 나의 의지로는 이마저도 안되는구나? 이리 되네요~
주안에 평안을 빕니다.
 
 
a_level_40.gif 강구만 08:20 new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 마귀가 지금까지 어떤 신학을 교회에 제공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복음의 광채를 가리기 위한 그들의 작업은 세상 끝날까지 이어지겠지만
그럼에도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살려내실 주님의 신실하심만 의지하자구요.
그래서 우린 아니요 의 팔자를 타고 났나봅니다
맞아 죽으라고 ㅠㅜ
 
a_level_30.gif 노요한 09:43 new
~아니요?의 팔자를 타고난 자들!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다들 옳다고 가는데 어떤 무리들만 아니라고
부정하며 세상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던 그들이잖아요?
어찌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마귀러부터 미움을 안 받겠어요
마치 맞아 죽기위해 태어난 아벨이란 말이 떠오르면서 그 라인에 우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복된 특권인데...
우리의 육은 이런 운명을 저항하며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해!"라며 행복과 번영의 신학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성화적인 삶에 더 매력이 끌리는 것을 어쩌나요~
하지만 이런 교제와 나눔만으로도 위로와 소망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