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그러진 길을 가는 발람에게 질책하는 나귀의 음성으로 듣겠습니다. 

 

 

 

(본 글은 "베드로의 착각" 이라는 정낙원 목사의 설교를 보시고 강구만 장로님께서 댓글로 남기신 글입니다. 주께서 저를 향한 질책으로 듣겠지만 이는 비단 나 뿐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질책하는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싶은 내용이 아닌가 싶어서 별도의 글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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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일부 복음을 안다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화려하기도 하고,

새로울 것 같기도 한 지식의 나열로 되려 복음을 어렵게 만들고,

이는 자신의 노력의 결과이기에 어렵다는 말만 나오고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은 나오지 않지요.

듣는 사람의 수준을 차별화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신 분이 아닌, 복음 아는 나를 자랑하는 모습까지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성령으로만 이해되는 은사이기에 새로운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지요.

들을 귀를 주시지 않으면 수년간을 열심으로 받아 적어도 나중엔 딴소리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만일 그 사람 말대로라면 복음은 사람의 자질이나 열심에 따라 내용이 달리 주어진다는 말이 됩니다.

결국 사람의 머리와 노력에 따라 새로운 계급과 세력을 형성하는 것밖엔 안 됩니다.

‘사단의 회’지요.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일하심을 모르는지, 인정하기 싫은 것인지 모르지만 이 사람들의 열매를 보면 육신의 열매가 나오지 성령의 열매나 사랑의 능력이 나오지 않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식의 유희,

그 재료로서 그리스도일 뿐 그 비밀에는 차단된 거듭나지 못 한자들입니다.

 

이미 완료 안에 있고,

주님의 다 이루심안에 있지 못하기에 늘 불안하고,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가에 신경 쓰이고,

그래서 정치에 골몰하고,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공부하는 것으로,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으로 때우려고 하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환각의 세계에서 돌아서면 세상 힘으로, 세상방식으로 악착같이 ‘산수’로 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사람 보다 더 자신밖에 모르는 부끄러움만 노출하게 되지요.

세월의 힘일까요.

어쩌면 그런 것까지 합리화하기 위한 십자가로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정말 십자가 앞에서 한번이라도 죄인으로 발가벗겨진 적이 있는지 조차 의심이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고백에 편승해서 자기 것 인양 여기고 어떤 사람을 추종하거나,

어떤 집단의 신학에 동조한다고 해서 마치 복음 안에 있는 것처럼,

예수 믿는 것처럼 착각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반드시 각자의 감추인 노림수를 드러나게 하십니다.

이는 본인 스스로 하나님의 능력을 내가 선호하는 사람의 신학에 가두어 두고,

성경에 계시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애써 부인하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맨 날 입으로는 죄인의 무가치와 무능력을 이야기 하지만 실상은 은근히 자신의 머리와 노력과 지식을 과시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믿음을 복음처럼 스스로 착각에 빠져 독선과 나르시즘에 빠지게 됩니다.

이 모두가 복음과 상관없는 나를 위한 ‘내 것’입니다.

우상이지요.

 

성경에는 성도가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죽었으면 그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가 사시고 그리스도의 삶이 나타나게 되어있어서 이 것(열매)으로 가짜를 분별하라고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성도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를 말함입니다.

여기는 죄와 싸우지만 피 흘리기 까지 싸우지 못하는 무능력도 포함해서입니다.

 

곧 십자가 앞에서의 삶입니다.

그래서 이를 자신의 성화라고 주장할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까지 성화주의로 매도하고, 거룩함과 영광의 힘을 좇아 교회를 섬기고 주님을 기쁘시게(나를 기쁘게 함이 아닌)하길 원하는 성도를 공격한다면 이는 참으로 마귀가 감격할 일입니다.

 

자신에게 없다고 해서, 혹은 본인의 장애에 갇혀서 주께서 새로 ‘입혀’주시는 새 사람을 부정한다면 당연히 이를 고집하기 위해 말씀까지도 변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을 권면하고 책망하는 일은 누구나 하기 싫고 모든 사람들이 꺼리는 일이지만 성경은 이런 사람을 꾸짖고 모든 사람들로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정보다 말씀이, 잠시의 핍박보다 그리스도의 몸이 더 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한편 그 사람 자신도 모르는 포장지를 벗겨주는 일이고, 또 수치를 가리고 입혀주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려요.

사랑입니다.

 

물론 듣지 않는다고 무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께서 하실 작업이니까요.

어쩌면 모든 것이 자기 성도를 위해 사용하시는 일시적 도구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 그러나 만약에, 놀랍게도, 누군가 성령 안에서 주님과 사귐이 있다면,

인생 자체가 베드로와 같이 주님의 손길에 다루어지고,

본의 아니게 생명 길로 이끌려 감을 알게 된 죄인이 있다면,

이 용서의 기쁨이 사랑으로, 섬김으로 터져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도요 자녀입니다.

 

바라기는 마지막 때에 교회가 영을 분별할 능력 주시기를 함께 기도할 때입니다.

다 같은 죄인끼리 무슨 망발이냐고 하실 분들에게 종용히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정말 십자가를 아십니까?”

  

 

 

장로님의 말씀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겠습니다.
내 자신이 어쩌면 영적 나르시즘에 빠져서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나 생각해 보게 하시는군요.
소유할 수 없는 복음을 마치 내 소유인 척 하면서 선생 노릇을 하면서 가르치고자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내 자신이 발람처럼 마음에도 없는 이스라엘을 축복하였듯이 나 또한 입술로만 십자가 피를 외치는 말쟁이가 아닌가 돌이보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좋은 경책에 감사드립니다.
장로님 고맙습니다.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는 물음을 접하고부터
주를 위한다는 나의 그 어떤 행함조차도 독선이 아닌지 자문하게 되더군요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는 물음 앞에선
여전히 "예수님 믿기 정말정말 어렵습니다!" 라고밖엔 답할 수 없는 나는
영원히 멸망 받아야 했을 마땅한 죄인입니다

우린 늘 말씀 앞에서서 자기 자신을 발가 벗김 당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긍하게 되고 자만하게 되고 자고하게 되고 자아도취에 빠져 교만이라는 낙진이 쌓이게 되지요.
이런 낙진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가장 잘 본답니다.
남은 다 아는데 정작 본인만 모른답니다.
이렇게 되면 스스로가 만든 도그마(교리)에 빠져 칼빈처럼 자기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자를 마녀사낭식으로 처단하는 악을 범하게 된답니다.
그것도 복음을 빙자하여서 말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선 믿음에 선진들이 좋은 거울로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악을 범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사랑하는 자 곁에는 바른소리하는 친구들을 두셨답니다.
베드로도 그릇된 행동을 하다가 바울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지요.
하지만 한 성령 안에 잇기 때문에 그 말을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감사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때론 먼 발치에서 자기 자신을 내려다 볼 필요가 많이 있답니다.
특히 가르치는 자들은 더 더욱 그리하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글은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귀한 거울과 같은 글이라 생각이 되어 올려 놓은 것입니다.

"정말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는 이 말은 성도라고 한다면 늘 귀담아 두어야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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