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8:32)

 

 

복음을 안다는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성경말씀은 무아나 몰아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불교 같은 자력종교에서 ‘수행’하는 것이고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 죄인을 품고 십자가에서 함께 죽으심으로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옮겨진 구조 곧 (철학적 구조론이나 기계적 예정론이 아닌) 그리스도의 할례로 인해(골2:11)내가 산 것이 아닌 그리스도와 연합된 ‘예수님의 인생’으로 그 흔적으로 살게 된 나를 말한다.(롬5장~6장) 예수님과 연합된 몸으로 내 소유를 주장할 수 없고 내가 나를 해석할 수 없는 인생이다. 내가 구축한 세계가 무너지고 털려져서 무장해제 된 채 예수님의 인생에 겹쳐진 삶을 살아내야 하고,(갈5:24)(눅9:3) 내 성공이 아닌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되는 삶이다. 삶으로 실제화 된 십자가, 한마디로 고난이다.

 

예수의 죽음에 부어진 허비되어지는 인생으로 나타나고(눅7:38) 아무 힘없이 허무하게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에게 나의 구원을 부탁하는 강도의 믿음으로 살기도 하는 삶이다. (눅23:42) 예수님의 용서, 예수님의 긍휼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창녀의 삶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는 내 죄의 깊이가 살아가면서 낱낱이 까발려지는 과정으로서의 세월이고, 죽음의 전제 없이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험악한 세월이다.(시51)(창47:9) 죄 가운데 태어난 내 인생에 뚫고 들어와서 모든 하나님의 요구를 다 지켜내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 이루신 예수님의 인생을 내 인생으로 바꾸어주신 분을 만났기에 마침내 내가 아니고 당신이 내 주요 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항복이고 소경됨이다.(창2:17)(행9:5) 보이는 현실보다 더 확실한 현실을 삶이며 헛되고 헛됨을 통한 영원하신 한분에 대한 영광과 존귀의 고백이다. 때로는 도망가는 다윗에게 돌 던지며 따라오는 시므이 뒤에 계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는 낮아짐이다(삼하16:11~13)

 

그래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없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끌려가는 궤적이고 오직 죄인을 부르러 오신 어린양의 은혜로만 채워진 날마다 새로운 찬송이다.(계15:3~4)(시139) 이 모두를 성경은 예수님이 당하신 진짜 고난과 십자가의 승리를 확인하고 맛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요 사랑이라고 한다. 은혜의 왕노릇이다. 세상으로부터 분리, 거룩이다. 이것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기에 그렇다. 성도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아들 만들기’인 것이다.(히12:5~10) 성경은 이러한 자들을 하나님에 의해 ‘산자’라고 한다.(엡2:5,10)(롬6:11) 그래서 예수 안에서만 존재하는 아들들이다. 처음 창조의 파괴이자 십자가 피로 만든 새 창조, 새 피조물이다.(시51:10)(고후4:10~12)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과 심판을 보여주기 위해 창세전부터 성부와 성자께서 계획하시고 완성하신 교회요 하나님나라의 나타남이요 또 지금 완성을 향해 지어져 가는 하나님 나라다.(계1:9) 이들만이 내 죄가 되어서 죽으신 십자가위의 예수님의 아픔과 기도와 용서에 참여된 자들이고, 이미 완성된 성도가 역사 속에서 살아야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복음 안다는 어떤 사람들의 가르침 같이 죽은 자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냐고, 그냥 도랑 파 놓은 대로 물 흘러가듯 어떤 구조 속에서 맘대로 살면서 인생 남은 노후를 위해 돈이나 축적하고 살다가 죄를 인식하는 만큼 십자가 피만 믿어주면 된다는 식의 기쁜 소식은 성경에 없다. 죄에 대한 아픔이나 싸움도 없이 막살아도 되는 그런 복음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한 자들은 여전히 주인의 자리, 있음의 자리를 고수 하면서 세상 힘의 원리대로 살기에 주님의 낮아지심과 순종은 애써 외면하고 십자가를 자기 의와 존재를 표현하는 수단과 목적으로 이용할 뿐이다. 고정화, 형식화, 사유화된 십자가다. 다른 이름의 ‘행함’이다.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차이가 되고 욕망이 되고 심판이 된 자들이다.(갈6:7~8) 그렇게 십자가마저 소유한 ‘나’라는 존재의 증명과 확장을 붙들고 있다가 인생으로 끝날 인생들이요, 이미 부요해서 예수님의 부요가 필요 없는 자들이다.(계3:17) 결코 예수님께 빼앗긴 적이 없는 인생이다. 저주의 세상에서 분리되지 않은 인생들, 바로 지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천국백성들은 그 신분에 합당한 천국의 삶의 원리 곧 십자가에서 깨어진 주님의 ‘상한심령’이 내게 부어져서 희생과 섬김과 낮아짐과 용서로, 또 그 십자가로 주신 자유와 평안과 기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알려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에서 죽은 성도의 삶이고 영생이다. 이 세상에 침노한 천국의 삶이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 같이 반드시 성령께서 그러한 삶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뜻이다. 예수님과 한배에 탄 성도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기 위한 풍랑이다.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예수님이 빼앗아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마11:12) 세상과 분리될 수밖에 없는 십자가의 삶, 곧 의가 없음의 애통으로 믿음이 주체가 되어 세상에서 떼어내서 끌고 가시는 성령 하나님의 유일한 방식이고 (시40:11~12)이미 완성품으로 출생된 신분에 맞춘 끝까지 돌보심이다.(빌1:6)우리의 범죄까지도 은혜를 아는 방편으로 만드시는 미쁘심이다.(시51;4)(시23:3) 이미 율법의 정죄에서 건짐 받은 성도들의 율법의 선함에 대한 고백이고 순종이다. 그래서 성도 안과 밖의 치열한 싸움이다. 이로 인해 성도의 인생 전체가 고난의 장이다. 슬픔과 수고뿐인 인생이요, 그 든든히 선 때에도 진실로 허사뿐이요, 그림자 같은 인생이다. (시39:4~6)

 

끝까지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자기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 자녀들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의 자라남이다. 영원토록 찬송가운데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해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자기 성도에게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그 구원을 ‘이루어가고’ 계신 하나님의 열심 으로만 이루어지는 창세전 언약이다.(엡1:3~12)(요1:1~14)(계19:11~13)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인해 내 꿈, 내 자리, 내 인생이 포기되어지는 것을 성경은 형통함이라고 한다.(창39:2) 이미 예수님의 피로 거룩한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신령한 복이다. 창세전부터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고(엡1:3~4) 산상수훈의 “복 있는 자여!”(마5:1~12)로 시작되는 복이다. 우리의 선진들이 살고 간 믿음이요 또 우리로 이루게 하신 약속이다. (히11:40) 이로 인해 음녀의 포도주에 취한 바벨론과 섞일 수 없는 교회의 피 흘리는 싸움이 발생되고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는 성도의 죽음이 있다.(계11:7~10) 최종 목적지를 향한 여정으로서 애굽의 옛사람이 묻히는 광야인생인 것이다.

 

그래서 참된 교회는 “나, 주님 찔러 피 흘리게 한 착한 죄인이잖아! 그러니까 십자가복음 아는 잘난 인간 맞지요?” 라고 고개 쳐드는 오늘날의 유다복음이 (가룟 유다의 배신이 아니면 하나님의 일이 완성되지 못했다는)설쳐대는 난장판이 될 수가 없다. 참된 교회는 십자가안다는 지식으로 막 살도록 멍석 깔아주는 영지주의자들의 놀이터가 아니고, 잘난 철학으로 복음을 해석하는 아고라광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죄인은 뭘 해도 죄가 되니까 복음 안다는 핑계로 죄인의 평안을 즐긴다는 패역함을 주님은 허용하신 적이 없다. 내가 복음 알아서 따내는 구원이 아니고 내가 예수를 죽여서 얻는 구원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내어 주신 아들이요 언약을 위해 스스로 자신을 버리신 은혜인 것을 공교한 말로 변개하는 자들의 악함일 뿐이다.(롬5:8,10)(롬8:32)(요10:17~18) 사망의 몸에 대한 절망과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감사를 모르는 자, 주님의 애통과 슬픔을 모르는 자, 주님 자신이 스스로 우리의 눈물과 용서가 되신 진짜 십자가를 모르는 자들은 성도가 아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 안, 그 의의 영역 안에 있지 않은 자들, 피로사신 하나님의 아들들의 의미와 신분을 결코 알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절대 죄를 지을 수 없는 성도들의 죄와의 싸움과 몸의 구속의 기다림을 알 수가 없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탄생되고 피로사신 ‘관계’속에 있는 자들이지 하나님을 대상으로 연구하고 지식으로 소유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1:13)“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일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3: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9~20)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8:23)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마귀도 바울을 알고 예수를 안다. 마귀만큼 신학에 통달한 인간은 없다는 말이다. 평생을 십자가를 연구할 수는 있지만 그 것은 귀신의 믿음이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요 사랑이 아닌 것이다. (약2:17~19) 그래서 주님도 그 열매를 보아 알라고 하신 것이다.

 

십자가가 지식이 되고, 힘이 되고, 권력이 되어버린 그러한 자들을 유혹이 역사하는 가운데 버려두시고 주님은 몸 된 교회에게 티끌의 자리 처음의 자리로 띠 띠우고 데려가시면서 모든 앎과 실적과 역사를 부정하고 네가 나의 은혜를 아는지를, 네가 나를 ‘사랑’하는지를 매순간 물으시는 것이다. (요21:17~18)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요구하심이고 받은 것이 있는 성도는 내어놓을 수밖에 없는 믿음이 주체가 된 사랑(행함)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워져서 은혜의 자리로 돌아서도록 끊임없이 회개하는 실존인 것이다. 마치 두 앗사리온에 다섯마리씩 팔리는 참새의 가치 없는 죽음에 유비 되어지는 삶으로 인생이다. 그렇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갚을 것이 없는 죄인에게 거저주시는 주님의 사랑의 크기와 높이와 깊이를 세상 끝 날까지 확인케 하시는 것이다. 받기만 하는 거지 나사로의 자리이고 참 불편한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고난이란 이름으로 위장한 천국이요 하나님의 선물로 주신 성도의 삶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것을 다 합쳐서 은혜로 주신 ‘구원’이라고 한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복 된 상태, 은혜로만 채워진 처음의 자리로(창1:31) 만들고야 마시는,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이 ‘구원’이다. 은혜의 왕노릇이다. 그 구원사역에 우리가 보탤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하심이고 이미 완성된 구원(묵시)을 자기 성도들의 삶에(역사) 펼쳐 보이심이다.(엡1:4~6) 이렇듯 하나님은 한 번도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신 적이 없다는 선포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다.

 

이렇듯 나를 위한 선택밖에는 하지 못하는 죄인들을 예수님과 연합된 십자가의 고난과, 그 위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에 동참시키는 삶으로 끝까지 이끌고 가시는 은혜를 입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고 한다. 보이는 것에 절망함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게 하시는 사랑의 손길에 엎드려 경배하는 교회다. 실패와 약함마저 감사하고 자랑하는 교회, 종말로 십자가의 은혜만 오롯이 남는 교회다. (고후12:9~10)하나님으로 영원한 처소를 삼고 우리로 하나님의 처소를 삼으시는(요14:20~24)(출15:13,17) 빛과 사랑의 나라에서 울려 퍼지는 영원한 찬송이다. 창녀 고멜들의 혼인잔치에서 울려 퍼지는 찬송이다.

 

그래서 성령의 조명과 책망이 없고, 이끌어 가심이 없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연구한 사람들에겐 주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굳이 그들의 오락까지 간섭할 필요는 없다. “노세요”하고 돌아서면 된다. 사람이 인정하고 분석하고 수용한 십자가는 언제라도 내가 버릴 수도 있는 십자가이지 찾아온 십자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입에만 달고 배에서 쓰지 않는 가짜 복음에 열광하도록 미혹하는 세력도 악한 날에 성도를 위해 주님이 허락하신 배치이고 배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피만 남기고 가신 분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기 성도의 삶속에 지금도 성령님으로 함께 하시면서 예수님의 죽음과 생명을 살게 하시고, 거룩과 의와 심판과 구원을 살게 하신다. 이러한 이끄심이 없는, 삶이 없는 구원은 없다. 예수님이 시작하신 선한 일을 각자의 삶에서 발견하고 그 선함만 의뢰하는 삶이 없이 인간의 ‘사변’속에 갇힌 십자가는 가짜다.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맛보지도 못하고 천국을 바라고 구하는 것은 ‘나’를 위한 무한대의 욕심일 뿐이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말씀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아야 성도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37:23~24)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사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