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권여선 ‘은반지’

 

권여선(46) 만큼 캐릭터를 생생하게 구축하는 작가도 흔치 않다. 이번 황순원 후보작 '은반지'의 등장인물 대여섯 정도 되는데, 사소한 인물의 캐릭터도 어찌나 생생한지.

 

주인공 '오여사'. 본명 오현숙. 만 59세.

여러 해 전 남편이 교통사고로 훌쩍 떠난 뒤 교회에서 알고 지내던 심여사를 집에 들여 5년을 살았다. 보증금도 받지 않고 생활비만 반을 부담하도록 아량을 베풀었다. 그런데 심여사는 무슨 이유에선지 밀린 생활비 15만원도 내지 않은 채 6개월 전 집을 나갔다.

 

소설은 오여사에게 작은딸이 가게라도 차리게 돈을 빌려달라고 전화를 걸어오면서 시작된다. 오여사는 단호히 거절하고 딸은 그런 엄마에게 악담을 퍼붓는다, 심여사가 있었더라면 그녀가 차려준 밥상을 느긋하게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오여사는 큰맘 먹고 심여사가 머무는 요양소를 찾아간다. 심여사가 제 발로 돌아오겠다고 나서길 내심 바라면서.

 

반년 만에 만난 두 여인. 오여사는 심여사를 '심여사'라 부르고, 심여사는 꼬박꼬박 '오여사님'이라 높여 부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둘의 관계는 역전돼간다. 처음엔 "오여사님 은혜는 잊지 않고 있어요"라던 심여사가 오여사 집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듣자 "말씀은 너무 고마우신데, 기껏 빠져 나온 개골창에 도로 처박힐 순 없지요"라 대꾸하니 말이다. 분위기는 점점 묘해져, 심여사는 통성기도를 하도 열심히 해 쉬어버린 목소리로 "모든 걸 버리고 요양소에 들어오라"고 한다. 해는 저물어 가고, 막차 끊길 시간은 되어가는데 심여사는 오여사를 놓아주지 않는다. 오여사의 입장에서 호러. 공포물로 달려가는 셈인데, 독자 입장에서는 웃음이 나온다.

 

권씨의 작품엔 '섬뜩, 오싹, 불쾌'란 수식어가 따라다닌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은반지'와 지난해 황순원문학상 후보작으로 오른 '팔도 기획'에는 유머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작가는 "이 나이에, 신인처럼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등장인문들은 제각각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린다. 자신만의 방정식으로 견적을 뽑아낸다. 그러니 오여사는 심여사가 왜 자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지를 알 까닭이 없다. 권 작가는 “누구의 머릿속에서나 계산기는 자동으로 돌아간다. 문제는 계산기가 의식적으로 통제되는 수준에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자기가 살아온 딱 그만큼 저절로 알아서 돌아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축적된 경험이 시키는 대로, 딴엔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해괴한 결과를 빚어내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리라.

 

“뒤늦게나마 멈추려 해도 계산기는 여전히 돌아가죠. 자신이 살아온 만큼 어김없이 재깍재깍. 오래된 친밀한 관계일수록 그런 계산기의 이면을 잘 보여줄 수 있어요. 과거를 공유해왔으니까요.”

 

백지연 예심위원은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도 소통이란 굉장히 어렵고, 여러 가지 겹을 가지고 있다. 권여선은 그 바닥까지 내려가 그 낯선 것을 끄집어내며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이경희 기자

 

 

 

[위의 글을 카센터에서 차 수리하는 중에 보았습니다. 이런 소설 이야기를 왜 복음칼럼 란에 옮겼겠습니까? 소설 속에서도 인간의 심층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직 심층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더 깊은 인간 존재의 심층은 가장 하나님을 사랑한다던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에서 머릿속 계산이 돌아간 것입니다. 그들이 평생에 쌓아둔 의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전혀 이익이 되지 않기에 예수님을 살해하였는데 그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중고생이 보기 좋도록 만든 책을 보다가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인격체(person)라는 단어가  라틴어 persona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 persona가 연극에서는 ‘가면’이라는 단어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이 글을 보다가 인격이란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인격은 없고 순간순간 나타나는 가면만 봅니다. 상황 따라 얼굴의 가면을 바꾸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얼굴이 아닌 주의 얼굴을 구하며 사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주의 얼굴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 허락된 주의 얼굴입니다. 묵시 속의 얼굴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며 몇몇 사도들만 보았습니다. 이제 그 얼굴이 나타날 날이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머리를 들 때입니다(눅2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