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바울의 일생이

정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삶을 살았을까요?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과 샅바싸움을 한 야곱이 환도뼈가 위골 된 후에는 이스라엘의 삶을 온전히 살았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언약의 대상으로서 믿음의 조상다운 삶을 살아냈다고 보십니까?

아닙니다. 절름발이 야곱은 평생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를 의지한 험악한 세월을 살았을 뿐이고,

바울은 말년에도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하리요' 라는 죄인의 괴수된 고백을 합니다.

아브라함의 삶 역시 자신이 주인이 된 삶을 사는 동안 왜 믿음으로 만 의롭다 함을 받는지를

몸으로 증거 해 낸 믿음의 조상일 뿐인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붙잡히고,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사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평생 동안 내가 주인 된 삶의 결핍을, ‘내가 되고 싶은 나’라는 우상의 깨어짐을 통해

탐심의 의미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삶의 종말을 처절하게 체험하고

'하나님 은혜 없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나는 죽은 자이구나'를 고백하는 자리로 끌려 다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러한 폭로됨과 부딪힘을 통해 하나님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성도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성도의 현실을 고난이라고 하고 그 고난 속에서도 찬송이 터져나오게 하는 능력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몸으로 살아낸 사람들만이 진짜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의 저주에 동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에 의해,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해 창조되었고 존재하는 자들이지 '나'를 위해 예수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 성화’를 고집하는 것마저도 ‘탐심’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