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묵상하면서 총 8편의 글들을 올렸는데, 한곳에 모아 다시 올립니다..

 

 

1.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언제인가?

 

조금 있으면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이 다가옵니다. 그 동안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언제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절은 언제인가?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으세요? 함 알아볼까요?

 

마가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는데, 그때가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12절)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유월절 다음날로부터 1주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무교절에 포함시켜서 연속적으로 절기를 지켰습니다.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니산월 14일 저녁부터 그다음날 저녁까지인데, 음력이기 때문에 이때는 둥근 달이 뜨는 보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금요일이었습니다. 유월절이면서 금요일!

 

예수님은 빌라도의 사형 선고로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빌라도는 A.D 26년에서 36년까지 10년 동안 유대 총독으로 재직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을 계산해보면, 당시 A.D 26년에서 36년 사이에 니산월 14일(유월절)이면서 금요일에 해당하는 날을 찾으면 되는데, 그날은 양력으로 A.D 33년 4월 3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은 33년 4월 3일이고, 부활하신 날은 4월 5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역사의 분기점입니다.(그 의미를 다음에 살펴보겠습니다)

 

보충해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시기는 B.C 4년 이전이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죽이려한 헤롯대왕이 B.C 4년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신 연수는 최소한 37년인 셈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임하였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였는지 아십니까?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마가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였는지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막13:25)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마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제는 하나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로 마시기 전까지는 다시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25절의 ‘포도나무에서 난 것’은 현재 예수님이 포도주잔을 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연히 포도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결국 예수님이 포도주를 다시 마신 날이 곧 하나님 나라가 임한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언제 다시 포도주를 마시게 될까요?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막15:22-23)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 도착하신 후 다시 포도주를 마실 기회가 있었으나 예수님은 그 포도주를 거절하십니다. 이때까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막15:36)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는 신 포도주를 마십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신 포도주를 거절하신다는 말씀이 없고, ‘마시게 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공관복음서에도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포도주를 마신 것으로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상에서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실 때 임하였습니다. 이제 십자가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한 것입니다. 이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임한 역사의 분기점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4-15)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였는데, 이 선포대로 하나님 나라는 결국 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신 말씀은 결국 십자가에서 성취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참 예언자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다윗의 왕국보다 더 위대하고, 로마 제국보다 더 위대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한 십자가를 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은 동일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예수 안에서 현재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 나라는 찬란한 완성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3. 언약의 피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13:23-24)

 

예수님은 유월절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잔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 잔은 포도주잔입니다. 그러면서 이 잔을 가지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포도주의 붉음과 피의 붉음이 오버랩됩니다. ‘피를 흘리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데, 그것도 잔인한 죽음, 폭력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창4:9-11)

 

아벨은 가인에게 피를 흘려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님도 죽임을 당하시는데 피를 흘리는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이것은 이사야 53장 12절을 배경으로 하며, 예수님이 이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의 죽음을 대속적 죽음으로 규정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53:12)

 

예수님의 죽음은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담당하신 죽음입니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예수님의 죽음은 또한 언약을 위한 죽음입니다. ‘언약의 피’는 출애굽기 24장의 시내산 언약 체결을 연상시킵니다.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24:6-8)

 

모세가 짐승의 피를 가지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에게 뿌리면서 하나님과 시내산 언약을 체결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을 세웁니다. 물론, 백성들은 언약서를 준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 피로 맺은 언약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언약을 준행하지 못하였고, 언약의 저주대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상황이 됩니다. 이때 예레미야는 ‘새 언약’을 예언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1-34)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사해지고,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새겨지는 새 언약이 체결되는 ‘날’이 이르기를 고대하면서 예언하였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새 언약을 세웁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과 맺는 새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새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한 죽음입니다. 옛 언약은 짐승의 피로 체결되었지만 새 언약은 메시아의 피로 체결됩니다. 이 새 언약은 이방인도 참여하는 더 크고 위대한 언약입니다. 이 새 언약을 통해 죄사함이 옵니다. 이 새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법이 이제 돌판이 아닌 마음 속에 기록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새 언약을 체결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새 언약을 체결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새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떡을 떼며 포도주를 마심으로 예수님의 새 언약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성찬 때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는 예수님의 죽음을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우신 새 언약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우리가 하나님의 새 백성이 되었습니다.

 

 

4. 대제사장의 속셈 1

 

최근 주일오후 성경공부 시간에 사사기를 공부하면서 ‘기드온의 속셈’에 대해 배웠습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대제사장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시는 장면을 통하여 대제사장 및 그 무리들의 속셈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53 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56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59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 그 신성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막14:53-65)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잡히시어 대제사장의 집에 가서 공회원들 앞에서 심문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죽일 증거를 찾고자 하지만 예수님을 정죄할 증언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찬송 받을 이’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메시아 칭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뜻입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메시아인지 물은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왜 이런 질문을 하였을까요? 1세기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가 오면 성전을 다시 지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성전을 다시 짓는다고 말씀하셨다는 증언이 나왔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긍정적으로 대답하십니다. ‘내가 그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아임을 부인하지 않으시고 시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선포는 초대교회가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장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주장을 예수님의 부활로 확인한 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역 초기에는 메시아 기적을 행하시면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셨습니다. 이것을 “메시아 은닉”, “메시아 비밀”이라고 해서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하는데,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왜 숨겼을까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 메시아 기적으로 알고 예수님을 ‘군사적인’ 메시아로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메시아관은 군사적인 메시아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군사적 메시아로 오해할 것을 염려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고난 받는 메시아 사상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왕으로 오셔서 이방인들과 악인들을 멸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그 위대한 다윗의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고대하였습니다.

 

이런 오해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하지만 예수님이 자신의 죽으심을 이야기하니, 베드로가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공적으로 주장하십니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신성 모독을 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사실 당대에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일어났지만 그들을 신성 모독했다고 정죄하지는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단지 사람들 중에 하나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은 왜 예수님의 메시아 주장을 신성 모독이라고 여긴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7:13-14)

여기에 나오는 인자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하늘 구름을 타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신적인 존재입니다. 인자가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나아갑니다.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높이는 것을 하나님을 낮추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신성 모독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또한,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은 시편 110편 1절을 연상시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110:1)

 

마가복음 12장 35-37절에 보면, 예수님은 시편 110편 1절의 ‘주’를 메시아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권능자의 우편에 앉는다고 말씀하실 때 자신이 바로 메시아로서 다윗의 주이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자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스스로 권능자의 우편에까지 높였다고 생각하고 이것도 신성 모독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제사장을 열 받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편 110편 1절의 ‘주’를 자신에게 적용하였다면, 예수님의 원수들은 시편 110편 1절에 따라 예수님의 발판이 됩니다. 지금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원수로서 예수님을 심문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예수님의 발판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발판이 되려면 몸을 구부려야 되고, ‘주’ 되시는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등 위에 발을 올려놓으면서 권능자의 우편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그런 암시를 알고 옷을 찢습니다. 물론, 옷을 찢는 것은 당시 신성 모독에 대한 반응입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대제사장을 더 열 받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셨지만 사실 이 시편 전체의 내용을 인용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지금 대제사장은 로마 당국이 임명한 제사장입니다. 언제 대제사장이 교체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임명한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십니다. 앞서 예수님은 인자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고 하셨는데, 대제사장의 권세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이 열을 안 받을 수 없습니다.

 

결국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은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죄합니다. 영원한 권세를 가지신 인자이고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에게 정죄를 당한 것입니다. 레위기 24장 16절에 의하면 신성모독에 대한 형벌은 사형이므로 공회원들은 예수를 사형에 처할 자로 정죄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레24:16)

 

그리하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자신을 죽이기로 결의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됩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8:31)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막10:33)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라고 시인하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신성모독으로 정죄될 위험을 감수하시며 자신을 다니엘서에 언급된 인자로 신적인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우편에 앉을 신적인 존재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이렇게 주장하시지 않았다면 공의회가 예수님을 정죄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공의회의 정죄가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로마인들에 의해 처형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져 처형당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신적인 메시아라고 고백했기 때문에 발생한 실제 사건입니다.

 

 

5. 대제사장의 속셈 2

 

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4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막15:1-5)

 

이제,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이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소합니다. 고소한 죄목은 ‘유대인의 왕’ 왜냐하면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는데, 이 물음은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이 그 죄목으로 고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고소하였을까요? 여기서, 이들의 속셈이 드러납니다.

 

사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7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33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행5:27-33)

 

사도들이 복음(‘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을 전하니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이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4-60)

 

여기에 나오는 ‘그들’은 1절에 의하면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그들은 마음에 찔려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스데반을 돌로 쳐 죽입니다.

 

이렇게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있는 그들이 왜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죽이지 않고, 빌라도에게 넘겼을까요?

 

‘유대인의 왕’은 유대인들의 반로마 독립전쟁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요세푸스는 반로마 폭도의 지도자를 대개 ‘왕’으로 불렀음을 언급합니다. 이러한 인물은 반로마 역도로서 정치범에 해당하므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제사장과 예루살렘 공의회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소한 이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로마 무장투쟁을 이끈 적이 없습니다. 그렀다면 대제사장은 어떤 근거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소했을까요? 심문 과정에서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에서 메시아임을 시인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란 군사적 메시아이고, 군사적 메시아는 군사력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군사적 메시아는 로마에 대항하여 군사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메시아를 로마인인 빌라도가 이해할 수 있게끔 한 호칭이 ‘유대인의 왕’입니다.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을 범한 종교범으로 직접 죽이지 않은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두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나면 그 반발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은 예수님을 참 선지자로 여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박해를 받아 순교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총독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나무에 달아 죽이는 형벌이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선언하기 위해서입니다.

 

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2-23)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선언함으로써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좌절시키고 예수운동을 소멸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의 속셈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죽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입니다.

 

 

6. 빌라도의 속셈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의 속셈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빌라도의 속셈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4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6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막15:1-15)

 

이 구절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장면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으니 예수님은 ‘쉬 레게이스’ 즉 ‘네가 말하고 있다’라고 대답합니다. 개역개정판에서는 ‘네 말이 옳도다’라고 번역하여 예수님이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원문은 그냥 ‘네가 말하고 있다’입니다.

 

이 말은 문맥상 긍정으로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후에 대제사장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가 생각하는 대로 군사적인 ‘유대인의 왕’이라고 시인하셨다면 대제사장이 추가로 고발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을 부정하시니 대제사장이 추가로 고발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 죄목을 시인하였으면 빌라도도 더 이상 심문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쉬 레게이스’는 ‘너는 그렇게 말하고 있으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정도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용어에 군사적인 의미를 담아 물어보지만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유대인의 왕이지만 군사적인 의미에서의 유대인의 왕은 아니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의 고소를 사실 그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의 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고소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10절)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님이 반로마 무장투쟁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13-14절) 사실이 이렇다면 빌라도는 당연히 예수님을 무죄 석방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빌라도는 예수님을 무죄 석방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과연, 빌라도의 속셈은 무엇일까요?

 

빌라도는 명절이 되면 전례에 따라 백성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명을 석방하여야 합니다.(6절) 당시 반로마 무장투쟁을 하다가 잡힌 바라바가 있었는데, 빌라도는 이 바라바를 풀어주기 싫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반로마 무장투쟁을 한 사실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무죄 석방하게 되면 다시 바라바를 전례에 따라 풀어주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꼼수를 부려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즉, 반로마 무장투쟁의 우두머리라는 예수님과 그냥 반로마 무장투쟁을 한 바라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면, 백성들은 인기가 더 높고 우두머리 되는 예수님을 풀어달라고 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 모인 ‘무리’들은 바라바를 지지하는 자들이었고,(7-8절) 더구나 대제사장이 바라바를 택하도록 무리들을 충동질하여(11절) 결국 무리들은 바라바를 택하였습니다.(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예수님이 밤새 체포된 사실 및 재판을 받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바라바를 죽이려는 정치적 꼼수를 부리다가 실패하자 무리들의 요구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빌라도가 고려한 것은 예수님을 죽여 흥분한 무리들의 폭동의 위험을 없애려한 것이었거나 무리들을 만족시켜서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아! 빌라도여.

 

 

7.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 (없음)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15:21-39)

 

예수님은 빌라도로부터 재판을 받은 후 골고다에서 제삼시(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리고 제육시(낮 12시)가 되어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렇게 온 땅이 어두워진 현상은 일식현상이 아닙니다. 보름달이 뜨는 유월절에는 일식현상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현상은 아모스 8장 9절을 연상시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암8:9)

 

해가 대낮에 지고, 백주에 땅이 캄캄해지는 현상은 ‘그 날’에 발생하는데 ‘그 날’은 아모스 8장 2절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날입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암8:2)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종말적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은 옛 시대의 끝입니다. 사탄이 왕노릇하던 옛 시대, 죄와 사망이 왕노릇하던 옛 세상의 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새 시대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옛 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신 포도주를 마셨는데,(36절) 이것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막13:25)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시기까지는 다시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다시 마신 날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진통제 역할을 하는)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기를 거절하십니다. 이때까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상에서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새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숨지시자 성소의 휘장이 찢어집니다.(38절) 성전의 휘장은 2개가 있었는데, 지성소와 성소 사이의 휘장(안쪽 휘장)과 성소와 이스라엘의 뜰 사이의 휘장(바깥 휘장)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찢어진 휘장은 성소와 이스라엘의 뜰 사이의 휘장(바깥 휘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히브리서에는 지성소와 성소 사이의 휘장이 찢어집니다.) 이 바깥 휘장은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찢어졌다는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막1:9-10)

 

하늘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늘이 열리는 계시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이 헐리는 사건입니다.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성전을 하늘로 묘사하였는데, 성전이 찢어진 것은 하늘이 찢어진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또한,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성전의 파괴를 암시합니다.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은 심판을 받아 파괴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3장에서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였습니다. 이 예언도 한 세대 내에 성취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결국 A.D 70년에 성전이 파괴됨으로써 예수님의 이 예언도 성취가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만이 죄를 사하시는 참 성전이십니다. 이제 참 성전인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기도를 드렸지만 이제 새 언약의 백성들인 우리들은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기도를 드립니다.

 

이제 참 성전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성전은 하늘 성전의 그림자이고 모형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바울은 교회가 예수님 안에서 성전이라고 합니다. 이제 교회가 지상의 하늘입니다.

 

 

8. 부활하신 예수님

 

42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막15:42-47)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16:7)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합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한 이유는 신명기 21:22-23에 따라 시체를 밤새 매달아 두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유대인들은 요셉처럼 이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었고, 이 말씀에 따라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36)

 

어떻게 그들에게 이런 신앙이 생기게 된 것일까요? 자신들이 따르던 메시아가 죽었는데, 어떻게 그 운동이 소멸되지 않고 살아남았을까요? 예수님의 저주 받은 죽음을 무효화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저주 받은 죽음을 무효화하는 사건은 다름 아닌 부활입니다.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교회가 생긴 것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

 

예수님의 다시 사심이 없었으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고, 구약성경에 따라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믿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믿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이 부활하신 주를 목격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15:4-8)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으면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이 생겨나지 않았고, 기독교 교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전혀 예견하지 않았던 부활이 예수님에게 일어남으로써 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 학자들은 성경의 말씀을 믿을 수 없다고 하고, 예수님의 부활도 초대교회가 조작하였다고 합니다만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빈무덤이야말로 역사적으로 가장 믿을 만한 증거입니다.

 

불신자들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적과 치유 행위 등을 믿을 수 없다, 초대교회가 조작하였다고 주장하면, 우리는 그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이 예수님의 부활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 그 강력한 증거가 기독 교회가 생겨난 것이고, 예수 믿는 우리가 그 증거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였습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