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서머나 카페에 강장로님이  출애굽기 설교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설교는 제가 늘푸른교회 교인들 처음 만났을 때에 16년 전에 설교한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설교를 하다가 중간에 오랫동안 쉬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면서 마무리를 했는데 출애굽기 15장의 설교를 할 때에 처음 청빙받을 때 설교한 원고 그대로 하였습니다)


(이 설교는 제가 처음 늘푸른 교회에 와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이 설교를 들으시고 여러분이 저를 청빙하여 왔습니다. 그때와 지금이 달라졌는지 아닌지를 설교를 보면 아는데, 저 자신도 점검하기 위하여 그때 설교를 그대로 하고자 합니다.)


출애굽하면 누가 가장 먼저 생각나십니까?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머리 속에 떠 오를 것입니다. 요즘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모세는 거의 다 알 것입니다. ‘십계’라는 영화를 통하거나, 최근에는 ‘이집트 왕자’라는 만화영화로도 알려진 모세, 그리고 우리나라 진도의 바닷길이 열리는 것을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라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관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애굽, 하면 모세, 모세, 하면 위대한 지도자란 것이 거의 공식처럼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과연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활약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출애굽기가 있는 것일까요? 결코 아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교회를 염려한다는 많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말들이 한국교회에 정말 존경받을만한 뛰어난 지도자가 없다는 말들을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계시는 늘푸른 교회 성도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우리에게도 모세 같은 지도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모세 같은 지도자는 나오기가 어려우니 우리 형편에 알맞은 목사 한사람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계시지요. 지금 설교를 들으면서도 저 목사가 우리교회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없을까, 속으로 채점하고 계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는 그런 저런 염려들은 다 내려놓으시고 주님의 말씀에만 관심을 기울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은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어떠한 특정인물의 영웅적인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약속을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신실하게,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내시는지를 증거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건너고 나서 모세가 노래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이 왜 일어났습니까? 애굽의 종살이가 싫어서 모세를 지도자로 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습니까? 결코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에게 보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싫어하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왕에게 자기백성을 내어 놓으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전하자 바로는 오히려 여호와가 누구관대,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고역을 가합니다.


그것은 흙벽돌을 만드는데 짚을 주지 말고 스스로 구하여 만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곡초 그루터기를 구하여 벽돌을 전에와 같은 수량으로 만들어 내려니 괴로운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뭐라고 합니까?


출애굽기 5:20-21절.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 것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너희를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스라엘 백성의 관심사는 자기들의 고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고통을 주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를 판단해 달라는 수준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관심은 애굽에 있든지 어디에 있든지 내 몸 하나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기에 광야에서 조금만 어려우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데모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백성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출애굽 시키시는 것입니까? 그들의 원하는 바대로 애굽에 그냥 두어 버리지, 10가지 재앙을 애굽에 퍼부으시면서까지 이들을 출애굽 시키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것을 이루어 내시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15:13-14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을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약속의 말씀을 주님께서 이루어내시기 위하여 때가 차매, 출애굽 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약속을 이루어 내시기 위하여 용사가 되셔서 그 약속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어 나가시는 길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셔서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바로의 반대가 통하지 아니합니다. 열 가지 재앙을 퍼부어서라도 이루어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홍해 바다가 가로막히면 바다를 갈라버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약속을 이루어 나가시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모세는 여호와를 용사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모세 자신이 용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 자신이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15:3절에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역할이란 증인의 역할입니다. 보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 바다 앞에서 뭐라고 하는지 출애굽기 14:13절을 함께 봅시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모세가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고 말하기까지 8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모세가 40세 때에 어떻게 하였습니까? 자기 민족의 학대받는 것을 보고서는 애굽의 관원을 쳐 죽였습니다. 그 다음날 자기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말리니까 뭐라고 합니까? 네가 우리의 재판관이냐? 어제는 애굽 관원을 죽이더니 오늘은 우리를 죽이려느냐? 하면서 배척하지요. 그래서 모세는 도망을 갔지요. 광야에서 무려 40년, 이제 옛날의 그 열정도 다 식어버렸고 양치기로 40년을 보낸 80세의 늙은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몇 번이나 재촉하시고 심지어 화를 내셔서 하는 수 없이 애굽으로 향하지요.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40세의 힘과 능력이 있을 때에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80세에 그를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이 말씀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구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자기 약속을 이루어내시는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앞에는 홍해 바다, 뒤에는 애굽 군대, 좌우는 험준한 광야, 여기서 할 일이 무엇일까요? 만약 모세가 40세에 이곳에 왔다면 어떻게 하였을까요? 한 편은 애굽 군대를 막고 한 편은 배를 만들라고 하든가 다리를 만들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80세의 모세가 하는 말은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홍해 바다가 갈라져서 마른 땅처럼 건너갔습니다. 추격하던 애굽 군대는 바닷물에 수장되었습니다. 이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을 누가 이루어 내셨습니까? 모세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성기도 하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한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이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얼마나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늘푸른 교회 성도님들, 지도자가 없어서 두렵습니까? 염려가 되십니까?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택하신 백성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시지 아니하십니다. 친히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도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 힘으로 되지 않고 주의 은혜로 된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이후는 어떻게 합니까? 여기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이제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 나가자는 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가나안 땅까지는 우리 힘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나서 가장 심각한 질병이 바로 자존심입니다. 사람 앞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좀 갚아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얼마나 비복음 적인지 알아야 합니다. 아직도 자신의 죄와 비참함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모른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서 주의 일이라고 하는 사업들을 보면, 주의 일이기 보다는 사람의 일들입니다. 사람들 앞에 자기 자랑하기가 속에 들어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온 천하 만물 우주가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데도 그것을 자신들이 드려서, 자신들이 희생하여 이루어낸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구원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목숨까지 드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 앞에 빚을 갚는다든가, 자기 공로를 주장한다든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출애굽기 15:13절을 함께 봉독합시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누가 주의 백성을 어린양의 피로 구속하여 내셨습니까? 주님

*그 구속하신 백성을 무엇으로 인도하십니까? 은혜

*그 구속하신 백성을 누구 힘으로 인도하십니까? 주의 힘

*그 구속하신 백성을 어디까지 인도하십니까? 주의 성결한 처소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아무 염려 마시기 바랍니다. 이 약속의 말씀이 담겨져 있는 백성들은 자신의 실력이나,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아니합니다. 또한 특정인물을 의지하지 아니합니다. 이사야 2:22절에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인생을 의지하게 될 때 그 사람의 숨이 끊어지면 그 모든 계획하는 바가 그날에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인도보다는 자꾸만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게 됩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 사람들이 자신의 결정을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 중에도 지도자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주일날 예배에 와서 무엇부터 살피십니까? 오늘 어느 집사 왔느냐 안 왔느냐? 살펴보지는 않습니까? 저 집사도 안 오는데 나도 다음부터 다른 데 가야지, 뭐 하나님이 다 같은 하나님인데, 하고서 미련 없이 떠난다면 그 사람은 주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아니라 수에 칠 가치조차 없는 인생을 의지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무엇입니까? 건물입니까? 사람들의 조직입니까? 목사 있고 장로 있고 제직회, 공동의회, 찬양대 있으면 교회입니까? 교회란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주의 백성이 교회입니다. 두세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모였으면 그것은 음부의 권세도 흔들 수 없는 완전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 출애굽기 15:13절의 말씀이 담겨져 있는 주의 백성이라면 틀림없이 주의 거룩한 처소에까지 인도하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 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이 말씀을 용사이신 여호와께서 이루어내시기 때문에 온 세계가 벌벌 떨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 때문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께서 친히 용사로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4절에서 18절까지 함께 봉독합시다. 열방이 듣고 떱니다. 싸움 잘하는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에돔 장관들이 놀랍니다. 모압의 영웅이 떨림에 사로잡힙니다.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합니다.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덥히는 것은 주의 팔이 큼을 인합니다. 모세의 팔이 아닙니다. 아론과 훌의 팔도 아닙니다. 여호수아의 팔도 아닙니다.


오직 주의 팔의 힘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까지 들어가고야 만 것입니다. 그들은 불평 원망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약속은 이루어 내시고야 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광야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것보다 더 확실하게 영원토록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인도를 받으시고 평안히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