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상담란에 돈에 대한 말씀을 하신 분이 계셔서 이 글을 올려놓습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원 저자는 세 번에 나눈 글을 한번에 옮겼으며 문장이 길어서 임의대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돈은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돈은 생활이고 돈은 힘이고 돈은 권력이다.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은 거의 없다. 돈으로 신체의 단점을 고칠 수도 있고,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고, 좋은 집과 좋은 차를 얻을 수도 있다. 좋은 음식을 사먹고 건강에 유익한 식품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값비싼 명품들과 보석들로 자신을 빛나 보이게 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너도 나도 돈을 얻으려 한다. 가장 궁극적인 목적인 생활을 위한 이유에서 부터 그것은 이미 정당성을 가졌다.


일을 하면 돈을 벌고 돈을 벌어 처자식을 먹인다. 그러나 일에도 종류가 있다. 돈을 적게 받는 일 그리고 돈을 많이 받는 일,적은 노동으로 돈을 많이 벌 수있는 일,  많은 노동으로 기본 급여를 받는 일 등. 그러나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단지 성적에 따른 제도나 인간관계 또한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차등 지급되어 왔다. 사회는 그것을 균형있게 시스템화 할 장치가 없었고 젊은이들은 이에 대하여 분노를 느꼈다. 내 또래 즉 30대 중 후분의 사람들을 보면 참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다. 지식이 국민들에게 더욱 보편화되고 세계화가 이루어져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한민국은 많은 선진국들과의 비교대상이 되었고 그로써 정치,경제, 사회 등 모든 면에서 국민들의 수준과 신뢰도는 하락했다. 나또한 독일에서의 삶의 경험에 빗대어 대한민국을 평가하자면 이 나라는 아직도 교육 정치 경제의 모든 면에서 선진국에 비해 5,60년은 뒤쳐져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덴마크의 경우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기준에서 사회적으로 비약한 직업을 가진 그들의 형편에서도 돈에 대한 만족도는 매우 높다. 이는 돈에 대한 만족이 결코 그것의 많고 적음이나 사회적 입지의 높고 낮음에 있지 않음을 시사해 준다. 


비록 서론을 이렇듯 시사적으로 끌고 갔지만 나는 고작 이런 대한민국의 사회적 열등감을 지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삶을 위한 더욱 올바른 돈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바로 인간의 본성과 돈이 어떻게 연결 되어 있는 지를 이해하면서 말이다. 돈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 돈은 왜 벌어야 하는가? 돈은 도대체 어느정도 벌면 만족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로 시작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과 돈의 연관성을 이해하고 그러한 본성에서 어떻게 탈출하고 해방할 수 있는지 그 구원의 길을 모색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겐 의무가 있다. 내가 내 몸을 책임져야 할 의무 말이다. 그것은 생래적인 것이다. 누구도 '내가 나를 먹여야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 배고프니까 먹고 피곤하니까 잔다. 자기 위해서 좀 더 편안한 공간을 구하고 이러한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돈이라는 것을 필요로 한다. 사회는 돈으로 자급자족 할 수 있고, 돈으로 거래할 수 있다. 돈으로 유지되고 돈으로 성공한다. 결국 우리의 의무는 암묵적으로 돈이라는 매우 필수적인 권리를 요청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의 생래적 의무가 돈이라는 권리를 요청받게 될 때 그러한 권리는 모든 사람에게 균형있게 혹은 평등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모의 재산과 관련있고 개인의 소득 즉, 그의 노동력과 관련있다. 그러나 노동력 또한 지난세기 우리가 거론했던 일에 투자한 힘과 시간의 가치에 비례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력은 누가 더 지혜롭게 돈을 벌 수 있냐하는 것과 더욱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을 벌 수 있는 법을 알면 소액의 자금으로 돈을 더욱 잘 벌 수 있다. 요리조리 관련 법을 이용하여 혹은 그것을 피하여, 투자를 하고, 투기를 하여 돈을 잘 벌 수도 잃을 수도 있다. 그래서 타짜들은 세상이 일종의 노름판과 같다고들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기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본주의라는 허구의 노름판에서 타짜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돈은 내가 노력한 댓가의 권리로써 나에게 주어진다. 노력에 대한 가치 판단 역시 엇갈리겠지만 그런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과연 돈이라는 것이 왜 나에게 권리로 작용해야 하는지가 우리에게 중요할 뿐이다. 저마다 돈을 번다. 아니 우리모두 돈을 번다. 삶의 의무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살아야만 하는 이 정당성을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돈에 대한 이익성 앞에서 자신의 도덕성이나 윤리적인 측면을 쉽게 내어준다. 


빵 장수가 손에 밀가루 묻히지 않겠냐는 말이 있듯이 모든 사람은 정직하게 돈을 벌 수 없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가 될 것이다. 나는 사회적 구조를 탓하기 전에 바로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이익이라는 당연한 권리 앞에서 모든 거짓과 교만이 발생하는 이 현실을 고발하고 싶다.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자유하니까 막 돈을 벌어서 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호흡이 하나님께 있다고 매우 관념적으로 고백하면서 자기의 권리를 철저하게 하나님으로 부터 외면시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권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이제 전체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포커스가 옮겨왔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권리가 없다. 그는 자신이 운명지어야 할 의무나 생래적 욕망도 없다. 그는 그것을 잃어버린 자이다. 잃어 버려져야 한다(수동태) 그리고 그의 모든 욕망과 의지가 순수하게도 그의 신앙안으로 흡수되어야 한다. 그의 모든 권리가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내려놓아져야 한다. 그러면 돈은 더이상 그의 의무가 흡수해야만 하는 특별한 권리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해야만 하는 가치수단으로만 반복된다. 좋은 차를 사도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운송수단 그 이상의 어떤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다. 멋진 인테리어를 한 호화스러운 집을 사도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이 누울 공간 이상의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추구해야 할 어떤 가치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그에게 필요이상의 것이며 의미없는 것이된다.

그러나 욕망의 권리가 활개를 칠 때면 돈은 내 안에 가치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욕심을 낳게 되고 끝없이 욕심을 채우기 위한 더 큰 가치로 변모하게 된다. 그러므로 돈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부자청년은 그러지 못했다)  돈을 모두 잃는 사람은 자신을 모두 잃는 사람이다. 예전에 나의 어머니가 가난했을 적에 힘겹게 모은 돈 2천 만원을 사기를 당해 단번에 마이너스 통장이 된 적이 있다. 그녀는 안그래도 없는 살림에 몇년을 힘겹게 모은 돈을 탕진하고는 먹지도 않던 술을 먹고, 담배를 피워댔다. 사십몇년간 그녀가 쌓아온 신앙은 돈이라는 가치 앞에서 즉, 더 나은 삶이라는 가치 앞에서는 조금도 견딜 능력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모태신앙이라는 그녀의 신앙은 무엇이였던가? 예수만 좋다는 그녀의 신앙은 무엇이였던가?


사람은 누구도 자기 중심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 그의 중심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 돈을 사랑하지 않고 예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난 쉽게 그런 말을 믿지 않는다. 우리중 누구도 예수를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다. 또한 누구도 돈을 쉽게 놓아줄 수 없다.


누구도 돈을 놓아줄 수 없다면, 누구도 자신의 생명에 대한 생래적 의무를 포기할 자가 없다는 말이되며, 누구도 그러한 의무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권리를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이된다. 그것은 결국 하나의 자기 인생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며 그것을 행사하는 데에 있어 어떤 방해물도 원치 않는다는 말이된다.


관념적인 사랑이란 어조로 진리 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운운하지만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포기하려 들지 않고 벗어나려 발버둥 치지 않는다면 그가 그런 시도 조차 헛된 것 혹은 자기 의를 쌓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는 헛된 자유속에서 끊임없이 돈의 욕망에 사로잡혀 그것에서 헤어나올 길을 잃어 버릴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의 자유를 이야기 하며 돈을 사랑하는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헛된 논리를 붙잡고 돈을 붙들며 사는가? 그들은 돈이 일만가지 악의 뿌리이며 욕심의 근원지라는 성경의 진술을 헛되게 여긴다.

돈을 사랑한다는 말은 돈으로 움직여지는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이고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은 돈으로 할 수 있는 보이는 것, 정욕적인 것, 더 나은 삶을 위한 것, 자신의 남편과 아내와 자식들을 위한 것에 온 힘을 쏟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돈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통찰하지 않으며 고민하지 않으면서도 쉽게 돈에서 돌아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돈이 얼마나 우리의 골수 안에까지 깊숙히 박혀서 빠져나오고 있지 않은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이고 어떻게 그것에서 해방될 수 있는지 통찰해봐야 한다. 그러면 그런 처절한 고민 끝에서 그는 아마도 진정한 구속을 원하게 될지 모른다. 


내 자식을 위한 행동이 바로 돈을 위한 행동이며, 내 가족을 먹여살리는 행동이 바로 돈을 바라는 행동이며, 내 미래를 준비하는 해동이 바로 돈에 묶인 행동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있음을 믿지 않느다. 돈으로써 자기가 자신을 이끌어 가고 돈으로써 자기가 자신을 준비해간다. 돈이 쓰여지는 곳곳마다 자기의 뜻이 철저하게 관철되어 있다. 헌금을 조금 내면서도 그 돈이 목사의 호주머니에 들어가진 않을까 노심초사해 한다. 돈의 목적이 끝까지 자기의 뜻에 메달려 있다. 지하철 소경에게 천원 한장을 주면서도 저 소경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끝까지 지켜보면서 내 돈이 옳은 데에 쓰이는 건지 지켜본다. 우리의 뜻은 철저하게 돈의 끝에 묶여 있다. 누구도 그것을 피하려 들지 않는다. 고민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너무나도 돈을 사랑해서 그것에서 벗어나기 싫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에 대한 올바른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교훈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다. 이것은 삶의 변화다. (이러한 변화 없이 관념적인 신앙을 운운하는 이성주의 자들은 이제 더이상  십자가를 운운하며 그들의 신앙을 합리화 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참으로 좋을 것이다)


우리는 돈에 대한 어떤 주관적 목적도 가질 수 없다. 돈은 버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동적인 삶은 주관적 이끄심에 대하 반응으로써의 삶이며 이것이 성도의 삶이다. 성도는 돈을 벌게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앞선 계획을 가지지 않으며 더 큰 욕망과 욕심을 키우지 않는다. 비전도 목표도 성과도 세우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성과를 세우고 목표를 세워 더 큰 이익을 추구한다. 


그러나 성도는 돈에 대한 가치를 잃은 사람이다. 그는 주신 일에 성실히 일하며 정직하게 행하고 성령의 행하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여 죄책감을 받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주께서 주신 일에(그것이 무엇이든) 감사하며 이때에 이런 일을 하고 저때에 저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노마드 인생이다. 정해진 것이 없다. 세상에서의 이방인이요 나그네이다. 언제든 돈을 놓아줄 혹은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며 그러한 고백을 위해 자신의 것을(그것이 어떻게 쓰이든) 버리는 연습(그것이 자선이든 헌금이든 연보든)을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을 시험하고 자신이 돈에 대한 가치에 버려진 자인지 자문해 보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이 참된 성도이다. 


돈을 사랑하지 않고 즉, 돈과 결부된 세상의 모든 행사를 거부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온전히 그분에게 자신의 주권을 양도한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고 성령님의 뜻을 쫓는 사람이다. 성령이 그 안에서 행하기에 언제나 바른 돈의 쓰임을 간구하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다. 성령이 신자의 안에서 돈을 벌게하고 성령이 신자의 안에서 돈을 그 쓰임에 맞게 사용한다. 모든 집중과 뜻이 성령님께 모인 자이다. 이런 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다. 말로만 진리는 자유니 하며 삶의 한조각 변하지 않는 자들을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다 말할 수 있는지 나는 성경안에서 도무지 이해할 자신이 없다.


이제 나의 모든 말이 들려졌으니 우리 모두 돈을 버리자.
돈을 버리고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자.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하지 않으신다. 

다만 세상을 사랑하는 자신에게 절망하며 애통하는 자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