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장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인류역사 이래 최고의 명제가 된 것은, 인간이 정말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 입니다.
이와같은 물음이 수많은 종교를 만들어 낸 것이죠.
이것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채로 행해지는 종교적인 행태는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지 못했으며 도리어

많은 이단 종파를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겁니다.

~그러면 과연 죄인이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
이 원초적인 질문 앞에 다시 설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우리의 이성과 지성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진리를 분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인간 안에 있다면

그 하나님은 인간의 지식 안에 포착되는 그런 하나님이잖아요.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계속해서 원하고 있다는 건데요.

무한의 하나님이 인간의 유한 속에 갇히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이 알 수도 없고
포착될 수도 없을뿐더러 인간이 전혀 눈치도 챌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이란 인식이 우리에겐 부족해요.
인간 세상에 끌어들여 나를 구원하는 그런 능력자이길 바랄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합니다.
"스스로 숨어계신 하나님"(사45:15)
이것은 당신이 자기를 계시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는 거죠.

그런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40일씩 금식하고 작정하면서 선전포고 합니다.
내가 기도하여 결단코 하나님을 만나고 말리라.
거의 대부분 귀신이 들려 내려오고 몸이 망가지고 정신 이상이 오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미안하지만 인간에겐 보여 줘도, 그리고
알려 줘도 모를 수밖에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너희가 힘써 여호와를 알라 하죠?
(호6:3)"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
(요17:3)"영생은 유일하신 참하나니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것이니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를 알아야 영생인데 인간이 알 길이 없어요.
그럼에도 성경의 어떤 말씀은 인간이 애쓰고 힘쓰고 노력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의미 입니까?

우리 죄인에게 도저히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면 그 영생은 그림의 떡이잖아요.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 하나님은 알 수 있고 하나님을 뵐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없느니라"
예수로 말미암으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만날 수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가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는 누구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요?
하나님 아버지를~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절대로 인간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린 예수를 날 구원해 줄 구원자로만 생각하게 되는데,
주님이 오신 제일 목적은 아버지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요.
그걸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우리의 구원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린 무조건 예수 믿으면 구원이다.
우리 죄를 속하시기 위한 대속 제물로 오셨다에서 한발짝도 더 나가지 못하고 있지만

성경은 분명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믿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 아버지의 도우심이 없이 예수를 믿는다는 자체가 어불성설 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성경을 보면 되잖아요.
이미 우리에게 성경말씀을 선물로 주셨는데 이거 읽으면 됐지 구태여 예수가 필요한가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이런 발상이 바로 수많은 이단이 태동하는 계기가 된 거예요.
이단은 나름대로 성경에 진리가 있다고 그걸 주구장천 파는 습성이 있잖아요.
바로 이런 믿음 때문인거죠.

그러나 성경을 아무리 연구하고 공부해도 그 안에 있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자는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아는 말씀은 그저 지식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성경의 문자 자체에 어떤 영감이 붙어 있는거 아니잖아요.

성경은 뭐라합니까?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
예수로 수렴되지 않는 말씀의 이해나 해석은 그것이 아무리 깊이 있고 신령하고 차원이 높다해도 하나의 학문이요.

인간의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모르면 언제나 종교에 매이게 되어 있다니까요.

인간의 지식과 그 어떤 탐구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전제가 되지 않은
모든 출발은 종교는 될 수 있어도 믿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 지식과 지혜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 수 있었다면,굳이 예수가 오실 필요가 있었겠어요.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는!
그렇게 하여 우리가 죄사함 받는 구세주로서 예수님이시죠.
물론 우리의 신앙은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나 날 구원하는 예수 여기에서 우리의 신앙이 정체되어 버리게 되면,
그건 아마도 인간의 이론과 논리의 산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지라도 하나의 동동 떠 있는 관념적 신앙일 수 있다니까요?
그런 원리와 사상이 아무리 고상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하나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 그렇게 시작된 고백만이 진실한 주님의 역사요 우리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고백적인 행동이 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는 거잖아요.
여러분! 인간은 가르쳐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가 못 되기에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이 되어 오셔서

당신이 죽으신 것이 성육신입니다.
그것 밖에 길이 없었다니까요~

우리가 예수 통하지 않고 하나님 만날 수 있어요.(여증도 그렇게 믿고 있다니까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건 성경을 갖고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 달달 외워도 안 된다니까요.
성경 너무 잘 알아서 망한 사람이 한 두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자연 만물을 통하여 알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요?
그러면 세상의 자연 이치 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범신론이잖아요.
나무가지 하나에도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어떤 세상의 섭리 속에서도 예수의 십자가를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그런 사상이 우주 만물이 하나님이라는 범신론 입니다.

이거 그럴듯하죠.
그러나 이거 미혹입니다
여기에서 영감을 받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 불교예요.
그렇다면 성경이 필요없고 예수가 굳이 오실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범신론일 뿐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자연 만물을 통하여. 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걸로는 도저히 못 깨닫고 오직 예수가 와야 그리고 성령의 영이 임해야 모든 만물이 탄식하는

그 이유를 알게 된다는 것이 로마서의 말씀 입니다.

인간은 어김 없이 예수가 오시지 않으면
죄와 사망과 어둠의 세력에 묶여 탄식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불쌍하기 짝이 없는 그런 서글픈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어떻게 해서든 인간 자력으로 자연 속에 담겨 있는 이치를 깨닫고 거기서 진리를 터득하여

득도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려는 것이 모든 종교에 숨어 있는 마귀의 의도라는 것을 우린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들이 깨달았다는 진리는
인간의 이성과 논리와 철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창세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알 수 없어요.

예수가 왜 십자가를 지셔야 했으며...
어둠에서 빛이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새창조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세상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는 거 이거 이해 안 됩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죽어야만 하는 역설을 이해 못하며,
예수의 의가 전가되는 방법으로 하늘 생명이 덧 입혀져야 하는 은혜가 설명되지
않으며 그렇게 인간의 생명은 예수 안으로 함몰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성경으로도 안 되고 자연과 만물의 이치와 섭리로도 안 되고
그러면 이천년 전에 세상에 오신 그 예수로만 됩니까?

그 예수로도 안 된다는 거 아닙니까? (오해될 수 있는 표현이지만?)
그 예수가 세상에 왔지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아 보고 믿은 사람 한 사람도 없다는거잖아요.
그러면 누구로만 가능해요.
여기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2~13)


주님은 제자들게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지금은 나와 함께 할 수 없지만 조금 있으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 오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를 알 수 없고. 만날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아무도 자의로 예수 믿을 수 없다는 거예요.
아무도 자의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는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나의 믿음은 그분의 일방적 오심이잖아요.
당신 임의로 내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초월적인 역사를 우리는 믿음이 왔다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깐 믿음은 확실한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요14장17~19)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내가 연구하고 노력하여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그 신념이 깨지지 않는한 우린 예수 믿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 주시고 역사 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니 그분의 손에 맡길 수밖에요.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하나님은 이 정지 작업을 먼저 하십니다.

신비의 하나님 초월적인 하나님이 인간의 의지로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는 분이기에 내 안에 오셔서 우리의 믿음이
되어 주시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이요. 복음이잖아요.
그렇게 역사할 때 너희로 믿게 하시기 위하여 그리 하신다고 합니다.

왜 그분은 내 안에 들어 오셔야 할까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 방법이 아니고는 누구도 하나님을 알 길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인간으로

죽으셨고 영으로 부활 하셔야만 우리 인간 안에 거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내 안에 들어 오시기 위하여 내 죄 까닭에 죽고 날 의롭다 여겨주시고 위하여 영으로 부활하셔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도 안에 임하시는 것이 성령의 임함이요. 거듭남의 은총입니다.
이것을 그리스의 임재라고도 합니다.

그저 예수는 내 죄를 속하기 위한 대속물로 죄값을 치룬 것으로만 생각하면 하나님과 이 깊음 영적 관계가 맺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죠.
그것 만이 신과 인간이 하나로 연합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방법이라는 겁니다. 세상에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가 기꺼이 인간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고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결핍의 존재 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어서 결핍이 아니라 그거 따 먹고 예수 생명나무의 은혜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잖아요.
그러나 다만 내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한 구세주로서의 예수는 고마운 주님 능력의 주님으로 내 밖의 예수란 말입니다.
내가 뭔가 바라보고 구하고 은혜를 보답하는 차원의 신앙은 가질 수 있어도 그 자체가 생명은 아니거든요.
내 안에 오신 예수 생명은 그런 관념에서 벗어나 나와 하나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게 할 거라 확신 합니다.

참 생명은 내 안에 생명이 들어와야 합니다.

그분이 내 안에 생명으로 오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생명이 없구나?
그 생명이 되기 위하여 죽으시고 내 안에서 새 생명으로 잉태하시는구나?

그래서 예수 안에 날마다 죽음을 경험케 하심으로 내가 살았음을 확인시켜 주시는 겁니다.
이걸 연합이라 합니다.

~이 연합을 바로 이해하려면 오해된 예수의 잘못된 기독론을 걷어 내야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인데, 왜 한사람도 구원 못했는지 아세요.
하나님은 우리 안에 들어 오시지 않고는 아무것도 안 하시기로 작정하신 겁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안에서 그리고 예수 안에서만 우리를 만나기로 작정하신 거예요.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이시지만 지식으로 우리를 설득하지 않으시고 진리를 가르쳐서 우리를 변화시켜

새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겁니다.
왜요, 가르침에 의해 내가 설득당하고 깨닫게되면 우리가 깨달은 자가 되잖아요.
그냥 피와 살을 주어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만이 오직 거저 주시는 그 생명의 은혜 가 임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 간다는 것의 정확한 이해는 그분이 내 안에서 자기를 조금씩 나타내시는 겁니다.
한꺼번에 다 알려주시면 우리가 감당이 안 되잖아요.(요16:12)
그럼에도 내가 열심히 연구하고 묵상해서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하면 그러면 정말 마음속으로 진실로
하나님만 자랑하고 하나님만 찬양하게 되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지식이 하나님의 존재를 포착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결국 그 하나님의 의도까지 꿰뚫어보려 할 겁니다.
그런 하나님 얼마든지 내가 조종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거래가 나오는 겁니다.
'내가 열심히 섬기고 높여 줄테니 그 댓가를 달라고, 말입니다.
이거 얼마나 주제넘는 행동인줄 아세요

난 아니라고요?

날마다 교묘하게 하나님 속일 궁리만 하는 것이 인간의  탐심이에요.

내 안에 있는 이 가짜,거짓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담이 있는 겁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인간이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는거죠~
당신이 오셔서 인간과 하나 되기로 작정하신 것이 아버지의 영원한 뜻이에요
이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도 이 경륜안에서 봐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런 예수께로 인도 받기 위해서는 여러분 안에 오해된 예수
잘못된 기독론이 바로 잡혀야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렇게 관념적인 신앙에 머물러 예수를 믿고 바라보는 한, 그 영으로 오신 예수는

보이지 않을 겁니다.


"간절히 찾는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잠8:17)
인간의 사모함 간절함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요소처럼 기록되어 있잖아요.
하나님을 만나기로 약속된 자들에겐,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간절함과 사모하는 심령을

넣어 주신다는 거죠.
언제나 원인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걸 하나님을 보았다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주님을 온전히 아시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 합니다.

우리 안에 오해된 기독론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마태5장 누가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거예요.
"마음이 청결한 자"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불신의 더러움을 먼저 씻어내 주시는 법입니다.


예수에 대한 세가지 오해가 있는데요,


1).관념적 예수
내가 얼마든지 예수를 알고 배우고 닮아갈 수 있다는 착각을 갖게 만든다는 거예요.
(예수 닮아서 아니라 믿어서 구원 받잖아요)
작은 예수란 표현은 그 시대에 어떤 열풍을 가져왔지만, 이런 것도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겁니다.
누가 더 예수 잘 흉내내느냐?
이런 걸로는 예수 비슷한 크리스챤은 만들 수 있어도 예수 믿는자 못 만듭니다.

어떤 지식과 원리에 사로잡힌 신앙은 관념적인 예수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죠.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는 그 방법 말고는 하늘 생명으로 살릴 길이 없어요.
그것이 십자가 입니다.
그래서 창세전에 이미 십자가 죽음이 예정 되었다는 거잖아요.
이 생명을 그 안에 받은자만 예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 생명이 초월적인 역사로 인하여 내안에 유입되어 들어오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수 밖에서 아무리 그 보혈이 내 죄를 사했다는 어떤 논리와 이론으로 빠삭해도 그 관념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안에서 그와 함께 죽어야 사는 길이 있습니다.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자 있을까요?)

예수 밖에서 우리가 구원 받을 길은 없어요.
우리의 구원은 어떤 지적 동의나 사실을 인정하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깊이 연구하여 논리와 이론으로 원리를 알고 깨닫는 것이 믿음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내 밖에 어떤 사건으로만, 존재하면 절대로 구원과 상관 없게 됩니다.
말씀 안에서 언약이 작동하고 그것을 알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만 우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겁니다.

우리를 성령으로 예수 안에서 거듭나게 하시려고 하늘 생명이 역사 안으로 들어 오는 것이 성육신이잖아요.

우리 안에서 그와같은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나의 믿음이라 생각하는 것은 내가 주님을 믿을 수 있다는 객기에서 비롯된 것일뿐,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다시 그 안에서 살리시는 것이 아니고서는 죄인이 살아날 길은 없습니다.
내가 믿고 고백하고 시인하는 수동적 단계에서 주님에 의해 죄인임이 확인 당하고 부인당하는 피동의 자리까지

내가 성도라면 주님은 거기까지 반드시 이끌고 가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은 어설픈 지식이나 기막힌 논리나 이론으로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걸 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종교 아닙니까?

이제 종교와 믿음은 확실히 구분이 되실 겁니다. 

2).기복주의에 찌든 예수
나를 도와 주시고,나를 세워 주시고
나에게 능력 주시고 내 삶을 풍요하게 하는 그런 예수를 믿는거잖아요.
여러분! 이런 신앙은 언제나 예수는 내 밖에서 날 도와주는 능력자로는 믿을 수 있어도

날 십자가로 끌고가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죽기까지 날 부인케 하시는 그 예수로는

믿을 수 없는거잖아요.


언제나 그 신앙은 조건부입니다.
무엇 무엇 해 주면 내가 믿고 안 그러면 안 믿겠다는 거죠.
이건 기복주의 번영신학에 지나지 않는 조건부 신앙에 불과한 겁니다.
이는 나의 유익이란 바탕위에서만 그 신념은 존재합니다.
출발은 언제나 나입니다.
여기에 영생이 있나요?
구약의 야훼 신앙은 결단코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우린 잘 압니다.

언제나 주인이 나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나의 유익과 탐심입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 있을까요?
생명은 하나님이 거저 선물로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3).대속 신앙
죄의 값을  대신 치루신 하나님, 고마우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예수에 대한 생각이 여기에서 머물러 한치도 발전하지 못하고 머물러 있게 되면 우린 그 예수를

그저 평생 고마우신 분으로 그리고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게되면

우린 자유할 수 없게 되겠죠.

예수는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요. 나를 위해 죽어주신 분이다.
결론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이 또한 내가 주체라는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를 감사와 사랑에서 받지 못하고 나도 갚아야 하는 짐을 잔뜩 갖고 있는 종처럼

주인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밖에 없는 거죠.

여러분!
내가 타락했기 때문에 갑자기 오시지 않아도 될 예수가 구원투수로 등판하여 인간을 구원해 줘야 되겠다고
구원자로 자처하고 나선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죽으심이 먼저 예정되어 있었다니까요?
거기에 우리가 은혜 입은 자로 나타나기 위하여 죄인으로 역할을 한 겁니다.

이렇게 오해된 예수는 대속케 주는 것에만 집착하게 만듭니다.
내 죄를 위하여 죄사함 받기 위하여 예수는 다만 날 구원하는 도구로 전락케 되는 거예요.
예수의 오심의 목적을 날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에만 집중되어 있게 됩니다.
이런 근저에 구원은 내가 처한 이 형편과 처지 환경을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믿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버린바 되고 치욕을 당하고 멸시 천대를 받는것은 분명 저주 아닌가요.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린 어떤 찬송을 하죠?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주님이 거기 계시면 그 곳이 하늘나라라고 그렇게 찬송 하잖아요.

우리는 내게 어떤 도움을 주지 않는 하나님은 상상을 못합니다.
언제나 나의 이득과 유익이란 측면에서 그분을 내 밖에 두고 나를 도와주는 신으로 모시려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상숭배예요.

우리의 믿음은 대속이란 개념만 차용한 채로 나와 예수가 따로 존재하는 객체가 되면
그건 나는 나로 그리고 예수는 나를 구원해주는 대속주의 개념으로 밖에 인식이 안 됩니다.
이건 인간이 이성으로 인지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이지만 믿음은 아닙니다.
대속하신 예수를 말한다고 그거 예수 믿는거 아닐 수 있어요.(여증이 증명??)
이런 고백이 마음에서부터 나온 성령의 고백이 되어야 하고 그 믿음은 우리에게 예수께로

인도하여 십자가에서 나란 자아를 죽여 새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처럼 예수는 인간의 능력으로 믿어지는 그 단계를 뛰어넘는 신비라 했어요.
예수가 아니면 그 아버지를 알 수가 없고 믿을 수가 없다고 했잖아요.
예수가 하늘 생명으로 내 안에 들어와 나는 죽고 예수가 되어 사는 겁니다.

이걸 연합이라 하는 건데요.
예수 배우는 수준이 아니라, 지식을 초월하는 믿음이라야 하고요.

예수를 아는 수준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이 내 안으로 유입되어야 하고요,

예수를 의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내가 예수 안에서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살아야 합니다.

이런 외부의 초월적인 힘에 의해 믿어지는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도 은혜예요.

주님이 믿게해 주셔야 하는 겁니다.
나와 세상은 간데 없고 오직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그랬죠.
내 믿음이 걱정 되고 내 믿음이 의식이 되고 내가 믿으려 한다면, 그건 나의 조작된 믿음일 수 있어요.
내 신념이 만들어낸 허상일 수 있다니까요?

(갈라디아서 2장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그 깊은 은혜를 체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