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person의 어원은 라틴어 persona에서 왔다. 즉, 우리가 인격이라 불리는 이 단어의 어원은 가면, 역할, 등장인물 등을 뜻하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흔히 우리 나라에서는 인격이란 것을 인간안에 고정된 '무엇'이라고 정의 한다. 그 '무엇'이란 인간이라는 존재안에 함축되어 있는 자질과 기질 혹은 보편적인 공통성에 속하는 것으로 공자는 그것을 '고정' 또는 '고정된 중심'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인격은 시간의 변화에도 유지될 수 있고, 특별한 사건들의 영향에도 일관되게 행동할 수 있는 경향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러한 인간의 인격성에 대한 정의가 과연 옳은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인간을 관찰해도 일관 되거나 어떤 변화에도 유지되는 그러한 고정성을 나는 도무지 인간 안에서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인격은 관찰이 가능하고 지속적인 자아이다. 자아에 대한 특성은 학자들 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근대에 들어서 자아를 탈고정적으로 보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예를들어 프로이트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는 자아를 세가지로 구분했는데(이드,자아,초자아)이는 인간이라는 인격의 구조가 얼마나 입체적인고 다양하고 변화가능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person이라는 용어와 charater라는 용어를 상호보완적으로 쓰는 것은 좀 더 합리적이 아닐까 싶다. 캐럭터는 소설이나 연극 등에 등장하는 인물을 나타내거나 어떤 작품속에서 나타나는 인물의 개성성을 이미지화 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성격이나 기질을 나타낸다. 앞서 라틴어 페르조나에서 그 뜻을 가면, 역할 등장인물로 가지는 것으로 볼 때 이 두 용어가 갖는 의미는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많은 심리학자들의 견해와 같이 성격이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변화 될 수 있다고 본다면 두 용어의 유사성은 더욱 짙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격을 과연 '고정된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칸트는 이러한 인간의 중심으로부터 도덕률을 상정하고자 했다. 하지만 괴테의 지적과 같이 그는 바른 기독교를 정립하지 못한채 인간으로부터 인간 안에서 추구되는 도덕을 주장함으로써 철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그가 경험론과 관념론 사이를 균형있게 걸은 것을 훌륭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결국 나의 주장은 이와 같다. 인간이라는 것 즉, 그 인격은 분명 탈고정적이고 입체적이며 다양하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편집증이라 정의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특별한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다는 것을 전제로 모든 인간에게 이러한 양태적 증상이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23아이덴티 영화를 잼있게 본 기억이 있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어릴적 트라우마로 인해 생겨난 환상에 사로잡혀 23개의 자아를 입는다. 23개의 인격은 각기 서로 다른 옷을 입으며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낸다. 그는 낮에는 훌륭한 내담자로 역할을 하지만 밤이 되면 혹은 자기만의 공간안에서는 다양한 자아를 챙겨입는다. 우리가 옷을 입을 때에도 우리는 그러한 이미지에 맞춰질 때가 있다. 젊은 세대가 입는 캐릭터 옷과 청바지를 입으면 그의 음성과 행동 역시 그러한 이미지에 맞춰진다. 또한 치마를 잘 입지 않는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게 되면 굉장히 조신해 지고, 남성이 슈트를 입으면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며 굉장히 남성적으로 변하게 된다. 아버지가 되면 근엄해지고, 어머니가 되면 여성은 변한다. 교회를 오면 믿음이 있는듯 거룩한 신앙인양 행세를 한다. 이러한 자아의 변화는 결국 하나의 자아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자아의 양태적 모습들이다. 그러나 그 옷속에서 그 자아는 분명 새로운 자아를 향한 의지를 갖는다. 흔히 우리는 어떤 특별한 옷을 입게 되는 경우 '내가 아닌 것 같아'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자신이 상정한 고정된 이미지에서 탈출해서 새로운 이미지가 자신에게 들어올 때 그곳에서 오는 낯설음은 분명 자아의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자아는 고정적이지 않다. 자아는 환경에 따라서, 영향받는 사람에 따라서, 시간에 따라서 분명한 변화를 경험한다. 나는 예전 '사람은 다 거짓되데'라는 설교에서 이러한 자아의 형태를 은술자아라고 말한적이 있다. 즉, '말하는 나'와 '진짜 나'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문제는 우리의 인격이라는 것이 수많은 은유와 표현과 이미지로 조작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어떤 선의 지향성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인격은 애초부터 거짓되다. 우리의 인격은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반응되어 이미지화 되어있고, 조작되어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나로서의 가장 정직한 형태가 아닌 오히려 보이는 나로서의 가장 비참한 형태이다.

인격이 변화되지 않고 고정적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사용되는 것이 참으로 옳겠다. 그는 변하지 않으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격은 하나님을 못알아 본다. 그를 아는 지식이 없으며 자신의 가면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려 애쓰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기에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 역시 오류와 오해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인간에게 하나님은 역시 가면을 쓰신 하나님이다. 인간의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그런 오해가 벗겨지면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한분 하나님이심을 알게된다. 그리고 그러한 가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벗겨지게 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빛에 의해 새로운 눈을 뜬 것 처럼, 맹인 바디메오가 오랫동안 감겨있던 눈을 뜬 것처럼, 인간이 새로운 눈을 뜰 때야 비로서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새롭게 맞이하는 고정된 인격성이란 결국 예수 안에서 발견되는 '자기'여야 함을 알게 된다. 예수라는 분모위에 세워진 분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고정된 자아이다. 그러나 그 분자가 분모를 잃어버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흔들리고 넘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격의 고정성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은 사람의 아들로 오신 하나님 안에서만 변하지 않는 자신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흔히 삼위일체를 말할 때 '위'자는 한문으로 '자리 위'자를 쓴다. 세개의 위치를 우리는 인격으로 변역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성을 말할 때에도 그러한 인격을 자신에게서 먼저 찾고 동일하게 하나님께 대입하려는 실수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격성을 인간자신에게서 먼저 찾아서는 결코 안된다. 애초부터 하나님은 선이시고, 우리는 거짓이기에 거짓된 해석으로 선을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의 인격성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말씀으로 오신 예수에게서 발견된다. 오히려 우리의 인격은 예수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이 더욱 합리적일 수 밖에 없다. '나는 어떤 인격인가?'는 결국 '예수는 어떤 분인가?'로 귀결된다. 그러기에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은 결코 인간을, 인격을 정의할 수 없다. 우리의 인격은 그분으로부터 출발하고 주어지고 고정된다. 우리가 예수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거짓과 오해와 분열과 공허의 바다 유에서 계속 표류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 한분만으로 온 우주에 충만하시다. 그리고 그분의 본질이 예수를 통하여 어떻게 인간에게 전가되는지 우리는 인생을 통하여 배우고 깨달아간다. 그러기에 예수안에서의 인생은 너무나도 고귀하고 천사도 흠모할 만한 가장 가치있는 삶이 맞다. 어떻게서든지 우리 인간들은 예수 안에서 자신의 진실함을 찾아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