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전 이장우목사님 창세기 설교중에서>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길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실 땅을 바라보고 떠난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떠나라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첫 번째 내용입니다. 바벨론땅에 그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셔도 되실텐데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생존의 조건이 가장 좋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로 올라 갈수록 씨족사회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은 이미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출애굽에서도 하나님은 애굽에서 떠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출애굽이란 애굽에서 떠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말씀하실 때는 어디에서의 구원이신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영어로 하면 from 이지요 어디로부터 구원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를 향한 구원인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에서 가나안으로의 부름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디서 어디로의 부르심입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영벌에서 영생으로의 부름입니다. 이러한 방향성이 분명하지 않으면 구원을 단지 현재의 상태보다 더 나은 상태를 말하게 되는 것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부자 되는 것, 병든 자가 건강해지는 것, 이런 식의 구원을 말하게 되면 하나님이 아브람을 바벨론에서 불러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시는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벨론이 살기 좋습니까? 가나안이 살기 좋습니까? 애굽이 살기 좋습니까? 가나안이 살기 좋습니까? 세계 4대 문명 발상지라는 곳이 어디 입니까? 다들 강을 끼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인도와 중국이 다 강을 끼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을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문명발생지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나오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아브람을 따라 함께 떠난 자들이 누구인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다음주에 계속하여 보겠습니다만 아브람에게 붙어 있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고생길입니다. 비옥한 바벨론을 두고서 알지도 못하는 낯선 곳으로의 떠남이 얼마나 망설여지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기에 이들을 인도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비록 그 과정은 힘들고 어려움이 중첩되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나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인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동일하게 세상이 좋고 세상에서 좀더 행복한 삶을 추구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게 하시고 그 아들의 나라를 찾아 나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는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름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라 나선 자는 직접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람과 함께 떠난 자들의 모습을 봅시다.


우선 데라입니다. 다른 아들도 있었지만 아브람과 함께 바벨론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31절에 보시면 데라가 아브람과 롯과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하란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출발을 하였는데 도중에 머무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갈 길은 험해 보이고 현재의 삶은 좋아 보이니 머무는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일하였던 데마라는 사람은 디모데후서 4:10절에서 이렇게 말씀 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세상이 좋아서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데라는 하란에 머문 것입니다. 우르에서 우상을 섬겼는데 하란에서도 우상을 섬기는 것이 많았기에 그곳에 적응하기가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안전하다 안전하다 하는 곳이 위험의 지경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떠날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