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학생들은 역사적 비평 방법을 배운다.

그것은 석의적 방법들 중 하나인데, 고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사본자료들을 분석하여 최대한 원문에 가까운 자료를 재편하는 일이다.

19세기 독일에서부터 시작한 이 비평방법은 오늘날 신학교수들에게(자신들의 스승으로부터) 전수되었고 총신대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신학대학원은 이러한 비평방법을 통해 원문에 가까운 성경을 재건(?)하고 있다.

나는 이런 입장에 서있는 교수와 논쟁을 하며 겨우 c학점을 맞았지만 인간의 보편적 학문으로 설명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내게는 있기에 많은 학생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견딜 수 있었다.

역사학자들 다시말해 역사적 식견을 가진 성서학자들은 성서에 대한 이해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성경이 역사에 의해 증명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고백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것이 역사를 형성하고 있음을 나아가 그것이 원천적으로 시공간에 귀착되지 않은 초월적 권위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오로지 역사가 먼저 필요하다.

거기에는 그들이 자신들의 이성으로 인식 가능한 시,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난 자들의 인식은 역사적인 그것을 넘어 초월적 인식에 이른다. 그들에게 역사적 인식은 단지 초월적 인식의 파편들이다.

역사는 이 초월성이 계시된 장소이며 그 내용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역사를 통해 계시에 이르는 것이 아닌 계시를 통해서 역사에 펼쳐진 계시의 능력과 힘과 그 의미들을 분석해 낸다.

이것이 오늘날 성령안에서 신학을 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차이이다.

어딜가나 말로는 열심히 떠들어도 결코 성령의 초월성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 선생노릇을 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참 괴롭고 힘든 일이되는 형편이다.

[출처] 역사적 비평|작성자 박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