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평화

 

(볼프의 '배제와 포용'  2부인 폭력과 평화에 대하여 강영안 교수의 해설 부분을  올립니다.)

 

볼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1)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2) 희생양 기제를 폭로하고, (3)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위한 예수님의 싸움의 일부이며, (4) 기만과 불의의 사람들을 끌어안는 하나님의 포용이라고 이해한다. 폭력에 대한 예수님의 유일한 대안은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이었다. 그런데 볼프는 예수님의 다른 면, 곧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백마를 타고 와서 진멸하는 모습에서 폭력과 예수님의 관계의 다른 면을 보게 된다. 말 탄 자의 폭력에 괴로움을 당할 자들은 무고한 이들의 피에 취해(17:6) 어린 양과 의로운 행실로 자신을 꾸민 이들(19:8)과 맞서 전쟁을 벌이는 이들이다. 이들에게 말 탄 이는 공의로운 심판을 실행한다(19:11). 그런데 물음은, ‘왜 이런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 그렇게 폭력적으로 나타날까?’ 하는 것이다. 볼프는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서 답을 찾는다. 하나님은 불의에 대해 분노하신다. 만일 하나님이 불의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불의, 기만, 폭력의 공범이 되고 만다.

 

그런데 불의에 대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이유를 볼프는 이렇게 표현한다. “[심판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그들의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이들은 그 누구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받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만약 악을 행하는 이들 하나님의 테러를 경험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악을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두 팔을 벌리신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의 강력한 끌어당김을 끝까지 거부했기 때문이다.” 볼프에 따르면 십자가는 결국 순수하고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불의와 기만의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방법이다. 이를 바탕으로 볼프는 백마 탄 자의 폭력은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구속되기를 거부하는 모든 것에 대한 최종적인 배제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라 본다.

 

세상 종말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기만과 불의, 폭력을 종식시키고 정의와 진리와 평화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 폭력에 대해서 볼프는 한마디 덧붙인다. 그것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폭력이라고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은 오직 폭력을 하나님만이 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이점에서 하나님을 모방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 되려고 하지 않을 의무, 곧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는 하고 인간을 인간이 되게 할 의무, 이것이 하나님을 닮아 가려는 의무보다 앞서는 의무임을 볼프는 상기시킨다. 하나님만이 폭력을 독점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폭력을 행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볼프는 이렇게 표현한다.

 

그리스도인은 칼을 들고 백마 탄 자의 깃발 아래 모여서는 안 되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따라 가야 한다.” 이 말에 이어 볼프는 논의를 이어가지만, 아마도 이 한 문장 속에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볼프의 배제와 포용을 다 읽으면서 이 내용을 나누려고 올립니다. 불가항력적 은혜를 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심판임을 말하려고 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의 말을 볼프가 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본인이 그의 고향 크로아티아에서 전체주의의 폭력을 당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