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모욕적인 노예 처형 도구였던 십자가, 혐오와 배제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 열다

[탐독의 시간] 마르틴 헹엘 <십자가 처형>(감은사)


1. 들어가며:
빌어먹을, 망할 놈의 십자가!

빌어먹을, 망할 놈의 십자가. 교회깨나 다녔던 신앙심 깊은 독자들이라면 첫 문장에서 이미 눈살을 찌푸리고 기분이 퍽 언짢아졌을지 모른다. 상스러운 욕설과 거룩한 십자가의 조합이라니 이 무슨 듣도 보도 못한 언사란 말인가. 지면에 실릴 수 있을 정도로 정제된 표현을 고심하던 필자로서도 이 생경한 조합이 무슨 금기를 어긴 것처럼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의 소중한 십자가가 고대인들에게는 '빌어먹을', '망할 놈' 따위의 욕설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모욕적이고 상스러운 것이었음을 알고 나면 사실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다.

물론 십자가를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우리는 모두 십자가가 처형의 도구였음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23)이라는 말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여기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고전 1:24)라는 말까지 더하면 완벽하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공기처럼 당연하다고 여겨 왔던 어떤 것의 이면을 발견하여 새삼 피부에 와닿도록 느끼는 순간만큼 우리의 생각이 혁신적으로 전환되는 순간도 드물다. 십자가에 관한 한, 바로 그러한 혁신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는 책이 나왔다.

세계 유수의 신학자 마르틴 헹엘의 <십자가 처형>(감은사)은 제목에서부터 십자가가 다름 아닌 끔찍한 처형의 도구였다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실상 잘 모르거나 자주 도외시되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헹엘은 이 책을 바울의 '십자가 신학'을 제시하기 위한 "역사적 예비 단계"(173쪽)로 소개하고 있으며, 수많은 고대 문헌과 증거자료들을 토대로 십자가가 당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생생하게 보여 준다. 현대를 살아가며 십자가에 이미 나름의 신앙적인 전제를 부여한 신자들로서는 쉽게 포착할 수 없었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역사적 요약본이 이제 우리 손에 들려진 셈이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적인 상징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 교회와 세상을 위한 신자들의 고난, 각종 주술적인 의미에 이르기까지 신앙으로 채색된 십자가 이미지는 신자들에게 매우 친숙하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들은 순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이 때문에 정작 십자가의 본래 용도, 즉 그것이 극도로 잔혹한 처형 도구였다는 사실은 쉽사리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 십자가의 죽음은 낭만화되어 교리 체계 안에 간단히 녹아들며, 재빠르게 은혜로 도약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자 '개념'으로서 신앙 안으로 자연스레 통합되곤 한다.

그러나 고대의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던 것 같다. 헹엘에 따르면 십자가는 유대인과 헬라인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복음을 받아들인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에게조차 친숙하기는커녕 견딜 수 없이 거리끼는 것이었다. 헹엘이 제시하는 다양하면서도 일관된 증언들은 십자가에 대한 우리들의 납작하고 단편적인 이해를 보다 입체적으로 재형성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십자가 처형의 현실적인 거리낌을 지나쳐 성급하게 신앙적인 차원으로 도피하는 습성에 좋은 처방이 될 것이다.

2-1. 자료를 통해 보는
가장 보통의 십자가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자료 중, 십자가에 대해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당장 눈에 띄는 단어들만 추려 보아도 수치, 모욕, 재앙, 처참, 넌더리, 혐오와 같은 부정적인 수식어뿐이다. '최고의 형벌'로서 십자가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인간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십자가는 단지 나무 기둥에 못 박힘을 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형 집행 전후의 온갖 야만적인 고문과 모욕들로 점철된 형벌이었다. 전권을 가진 집행자의 취향에 따라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의 기괴한 고문들이 동원되었으며, 벌거벗겨진 채로 대중에게 전시된 처형 대상자는 죽은 이후에도 매장이 불허되고 짐승들 먹잇감이 되곤 했다. 이와 같은 극도의 잔혹성 때문에 고대인들은 십자가에 대한 발화와 청취, 기술 자체를 매우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십자가를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이 사라졌다"는 찬송가 가사는 고대인들에겐 어떠한 동의도 이끌어 낼 수 없는 헛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헹엘은 당대 현실에서 십자가 처형이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십자가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훨씬 광범위한 지역에서 매우 빈번하게 벌어졌다. 이는 특히 로마제국의 정치적-사회적 상황과 연관 지어 설명할 수 있다. 십자가 처형이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는 범죄 억제책으로서 매우 강력한 기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군사적 폭압으로 이룩한 제국의 평화는 이 강요된 보편 질서에 통합되지 않는 이들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배제하지 않고는 유지될 수가 없었다. 십자가 처형은 그 잔혹성을 공개 전시하여 제국의 질서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공포를 주고, 대중들에겐 현 체제에 대한 안정감과 더불어 원초적 복수심과 사디즘적 잔인성을 만족(175쪽)시키는 방식으로 제국에 의해 애용되었다.

중요한 점은 질서유지를 명목으로 한 이러한 영구적 배제와 격리가 대부분 하층민과 노예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대상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십자가는 제국에 의해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된 대상에게만 허용되는 국가 폭력으로, 로마 시민권자는 이 잔혹한 형벌에서 제외되었다. 제국은 주인과 노예, 시민과 피지배 하층민으로 양분된 사회 속에서 폭발하는 갈등을 극단적인 폭력의 전시를 통해 효과적으로 해소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하층민과 노예들이 십자가에 달렸다. 매우 혐오스러운 경멸의 대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질서유지에 수반되는 필요악으로서 심지어 환영받기까지 했던 십자가는 모순적이고 폭압적인 거짓 평화의 민낯을 보여 준다.


2-2. 그리스도를 통해 보는
가장 특별한 십자가

헹엘의 말처럼 고대인에게 십자가 처형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려 처형된 자가 노예나 하층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자 세상의 구원자라는 선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유일무이하게 특별한 것으로 만들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화에 고난당하는 신적 존재라는 개념이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난은 매우 명예롭고 위엄 있으며, 이야기의 흥미를 더하기 위해 종국엔 극복될 위기로서 고안되었을 뿐 이들이 실제로 죽는 일은 결코 없다. 신이 십자가에 달려 실제적인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비참한 노예의 죽음을 죽었다는 말은 고대인들에겐 파격을 넘어 참람한 망상 그 자체였다. 굳이 신명기 말씀(신 21:23)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미 전방위적으로 헬라화된 세계를 살며 십자가 처형의 참상을 숱하게 목격해 왔을 유대인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오랜 기간의 선교 경험을 통해 십자가 복음의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거리끼는 것인지를 몸소 체험했다. 그러나 이 거리낌을 해소하고 믿을 만한 것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거부했다. 오히려 그는 이 비참한 죽음을 자신이 선포한 복음의 전면에 내세우며 핵심 주제로 삼았다. 그가 전한 복음의 메시지는 단지 교훈과 상징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처형, 그로 인해 폭로된 기존 질서의 폐기와 새로운 시대의 도래라는 단단한 현실성의 토대 위에서만 바로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질서유지를 명목으로 노예들을 처형했던 십자가 위에서 온 세상의 질서를 창조한 하나님의 아들이 잔혹하게 처형당했다. 신분과 지위 등에 의해 엄격히 구별된 질서와 거짓 평화를 자랑하던 제국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이라는 가장 준엄한 질서를 침해함으로 자멸을 예고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기존 질서의 폭력성과 부조리가 극적으로 폭로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구별을 스스로 허물어 인간과 동일시되고, 인간의 자유와 구원을 위하여 비참한 노예의 죽음을 죽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이해된다. 수치와 모욕을 주기 위해 공개 전시된 십자 형틀이 하나님의 사랑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높은 무대가 되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큰 배제와 복수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가장 큰 환대와 용서가 선언되었다.

이 위대한 역설 속에서 모든 질서를 재편하는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선포된다. 폭력과 배제를 통해 유지되었던 거짓 평화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화목을 이룬 새로운 세계에서 보편과 특별, 중심과 주변은 반목하며 나뉘지 않는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갈 3:28). 이처럼 새로운 현실성의 토대를 만들어 내는 철저히 역사적이고 유일무이한 사건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은 모든 인류를 위한 종말론적 구원 사건(49쪽)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일컬어 상상할 수 없던 역설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힌 "하나님의 능력이자 지혜", 즉 '복음'이라고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다.


3. 나오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요구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이 예수의 죽으심을 본받는다며 자신을 본받으라 했을 때도, 그것은 가장 모욕적인 노예 처형의 도구와 단단히 결속되어 있는 실존적인 요구였다. 이 요구가 내포하는 실제적인 거리낌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삶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낳을 것이다. 바울이 십자가 처형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로마 시민권자였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부르심을 받은 누구라도, 나는 십자가 제자도와 상관이 없노라고 말할 수 없다.

헹엘은 십자가 처형의 내포된 폭력과 혐오의 메커니즘을 요약하며 그것이 오늘날에도 만연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수치와 모욕의 십자가로 내몰리는 자들이 여전히 많다. 그들이 언제나 사회가 정한 보편에 의해 불편으로, 정상에 의해 비정상으로 규정된 자들이며, 법적인 지위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이라는 데는 어김이 없다. 교회는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같은 자리에서 조롱을 당하고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도는 이 모욕의 자리로 나아가 그들과 함께하며, 자신을 선물로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자신을 버려 허무신 혐오와 배제의 장벽을 교회가 앞장서서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세우는 비극은 없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실천에는 고난이 따를 것이고 수치와 모욕이 동반될 것이다. 그러나 불의한 질서를 변혁하는 교회의 싸움,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섬김은 결코 좌절될 수 없다.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이미 현실로 주장된 새로운 세상의 질서가 교회 공동체의 흔들리지 않는 토대이자 끊임없는 용기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약함이 강함이 되고 미련함이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십자가 복음의 역설을 믿는다. 따라서 교회는 어떠한 고난에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비추어 기쁜 맘으로 십자가 지기를 멈추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비추어 종국에 완성될 새로운 시대의 승리를 소망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여운송(고넬료) / 신학교를 졸업했다. "온 산 뒤덮은 푸름은 큰 나무만 아니라, 무심히 밟고 가는 수많은 그냥 풀"이라는 한 토막 노랫말을 마음에 품고 산다.

<십자가 처형> / 마르틴 헹엘 지음 / 이영욱 옮김 / 감은사 펴냄 / 192쪽 / 1만 4500원
[출처: 뉴스앤조이] 가장 모욕적인 노예 처형 도구였던 십자가, 혐오와 배제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 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