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 트라우마
- 기쁨의 공유 제한 -

"...그 아이들의 비명이 들리는 듯합니다...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짓이 아닙니다...너무 괴로웠습니다...자다가도 그 눈동자들이 어른거려 깨곤 합니다...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대인기피 현상에 심지어 자살 충동까지 느끼곤 합니다...주사기를 꽂으면서 내가 직업을 잘못 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른바 '구제역 트라우마'를 토로하는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갖가지 현상들이다.

삽시간에 이 나라 전국곳곳이 100만 두를 넘어선 가축들을 살처분 내지는 생매장시키는 피의 카니발(謝肉祭)을 방불케 하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라는 매개체를 타고서 죽음의 기운이 전국을 휘감고 있다. 마치 처음난 것들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의 엄명을 이행하는 죽음의 사자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처럼 죽음의 바이러스 또한 닫힌 시공간 속에서 그분의 허락 하에 제 역할을 톡톡히 시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주받은 아담들은 이렇게 기도해야 함이 마땅하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욘 3:5, 개정)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어떤 행태로든 심판은 달갑지 않은 것이고, 저주는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지만 늘 그것들이 시행됨으로써 우리에게 실체가 무엇인지 드러내고 진실이 무엇인지 들려주고자 함에 그 의미가 있음을 인생들은 새삼 깨닫는다.
구제역 방제 현장에 동원된 그들이 시달리는 트라우마를 두고서 우리는 훨씬 더 오랜 세월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렸을 어느 부족의 사연을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천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늘 이끌려온 수많은 죄없는 존재들, 그들을 이끌어온 아담들의 생명과도 같은 그 무죄한 피조물들의 숨통을 끊어내고, 내장을 파헤치고, 각을 뜨고, 피를 담아 뿌리고, 희생된 주검을 온전히 태워 그 향취를 하늘에 상달시켜야만 했다. 그들의 트라우마는 어떤 것이었으며 어느 정도였을까.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얼마 전에 지나간 소위 '예수님 생일'을 아울러 연관지어볼 필요가 있다. '환호하는 트라우마'라는 것이 과연 성립 가능한가 말이다. '환호'라는 개념과 '트라우마'라는 개념은 서로 대치 관계에 놓여 있다. 말 그대로 성탄절을 두고서 환호하는 정신 상태는 정상에서 이탈해도 한참 이탈한 것이다. 그것도 교회당 지붕 아래에서 자행되는 것이라면. 상호간에 조화가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시점에도 각 교회 홈페이지들마다 성탄절의 풍성함과 아늑함과 따스함이 넘치는 행사들 사진들이 버젓이 넘쳐나고 있다. 저장 공간이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의 환호와 훤화함이 담긴 사진들과 동영상들, 그속의 공연들, 뮤지컬, 댄스, 심지어 '노가바' 유행에 편승하여 댄스, 힙합, 발라드, 알앤비, 트로트 등등 장르를 넘나 들며 최신 유행의 대중가요에 가사만 바꾸어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 노래들...매년 돌아오는 예수님 생일잔치 이벤트 결과물들의 포트폴리오는 말그대로 포화상태일 지경이다. 마치 예방 차원에서 생매장시킨 가축들의 피가 지하 땅속이 다 수용하지 못하여 지하수를 타고 흐르다 넘쳐나오듯. 이는 내 말이 아니고 언론에서 목도하여 전언한 바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눅 2:13-14, 개정)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수님의 나심을 두고서 성경은 '하나님의 기쁨'이라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 소식을 전한 존재들은 다름아닌 천사들이다. 천사들은 이 세상 소속이 아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 소식의 내막에 담긴 진실을 속속들이 아는 자들이 바로 그 '세상에 속하지 않은' 천사들이라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전한 바로 그 하나님의 기쁨이 담긴 소식, 곧 아기의 나심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에게만 공유의 범위가 국한된다. 그러기에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자들은 더이상, 애당초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들만이 '성도'이다. 그럼에도 아기의 나신 날은 만인들에게 기쁨의 날이요 즐거운(merry) 날이라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음과 더불어 찬송가(?)에조차 버젓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허나 그 구주께서 오셔서 정작 하신 말씀은 이것이었다.

(마 3:2, 개정)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인생들의 보편적인 착각이 맞는가, 아니면 한 조각 진실(성경 말씀)이 맞는가. 전자가 옳다면 성경을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할 것이다.

"기뻐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럼에도 하나님은, 성경은, 아기 나심의 취지는 꿈쩍도 하지 않으신다. 성경 말씀이 일점일획도 남김 없이 다 성취될 때까지.
우리는 아기의 나심이 기뻐할 일이 전혀 못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 아기의 나심은 어디까지나 '죽으러 오심'이었기 때문이다. 죽으러 오심을 두고서 환영할 일이라 간주한다면, 앞서 지적한 바 '환호하는 트라우마'라는 자기모순적 개념의 조합이 성립가능하다는 말인데, 그것은 어림도 없는 착각이다.
이미 그 아기를 죽일 자들은 천년 전부터 늘 예비되어 있었다. 그들의 솜씨는 천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조상들로부터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너무나 능숙했다. 살육의 전문가들...재판답지 않은 재판 직후 그의 몸은 짖이겨지고 찢겨지고 죄인의 자리에서 죽임당하도록 여지 없이 내어준 바 되었다. 그를 죽음으로 내몬 자들, 그를 죽임에 가담한 자들, 그의 찢겨진 과정을 목도한 자들...수없이 희생되어 나간 무죄한 피조물들을 대하면서 그들의 처참한 주검 앞에 늘 시달려온 트라우마와 연민에도 불구하고 그 무죄한 가축들이 오직 한 분 희생 제물을 가리킨다는 진실을 눈치 챈 이들은 그다지 몇 안 되었다.
앞서 성경이 말씀하신 것처럼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철칙은 시공간을 타고 흐르면서 늘, 여전히 철칙으로 남아 있다. 아담들의 사정에 의해 변동가능한 원칙이 아니다.
그러기에, 구제역 파동을 겪으면서 국가 비상 사태가 선포될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아담들은 무릎꿇음(회개) 대신 다른 대안을 찾는다. 아담들의 자본주의적 선택은 신의 저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또는 그 모든 저주가 신의 노여움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여부를 생각할 겨를조차 주지 않은 채, 온갖 재난들을 맞이하는 아담들로 하여금 여전히 그 재난에 굴하지 않고 다른 연속적 대안을 찾도록 다독여 주기에 충분한 동인이 된다.
'진실'이 저장되어 있는 폴더에는 늘 공유 속성에 제한이 걸려 있기 때문에 아무나 열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담들은 다양한 선택 가능한 쓸모있는 대안들로 가득찬 폴더들을 가지고 있다.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할 때까지 생명과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찾지도 않았던 아담의 의식은 원래부터 진실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들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차 있을 뿐이었다. 그러기에 정작 아기의 나심에 대한 소식도 오직 공유가 허락된 이들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이고.
그 진실의 폴더를 열어볼 수 있는 비밀번호는 이것이다. '피'.
그들이 말하는 소위 '추수감사절'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그 시조는 동생의 무죄한 피를 흘렸던 가인이었다. 가인의 정갈하고 풍성하고 성대한 감사제. 이에 상반되는, 언뜻 야만적이고도 잔혹해 보이면서도 이렇다 할 번듯한 면모가 결여된 피의 제사를 드린 아벨. 그는 하나님께 그 제사가 거부된 자에 의해 죽임 당함으로써 본인 스스로가 드렸던 피의 희생 제물의 운명에 본의 아니게 동참되었었다.
앞서 심판과 저주는 아담들에게 거부되고 환영받지 못하고 기피 대상이라 언급했다. 그 모든 것들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이것이다. '피'. 아담이 두려워하는 최종(종말, 끝)의 것이 바로 '피'이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선택하신 소수의 그들(성도)에게 전하신 소식 - 아기의 나심 - 은 다름 아닌 '피'- 그 아기의 죽으심 - 라는 소식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서로 대치되는 세계에 속한 이들에게 동일한 소식 - 아기의 나심, 곧 죽으심을 위한 아기의 나심, 한마디로 '피' 소식 - 또한 상반된 메시지로 다가서는 것이다.
무죄한 존재들의 피가 전국을 가득 채우고 넘쳐 흐르는 피의 카니발(謝肉祭)이 벌어지고 있는 이 순간에도 자본주의의 거리는 또 다른 사육제로 혹한의 추위마저 녹일 정도로 늘 북새통을 이루고  있음을 존경하는 한 시인은 다음과 같이 고발하고 있다.


제목  : 명동 거리 3

                      한하운

수캐 같은 계집들이
꼬리를 치고 간다.

돼지 같은 사내들이
계집을 귀속재산(歸屬財産)처럼

네것 내것같이 공것같이
영호 부인(零號婦人)으로 스페어로 달고 간다.

유행이라면
벌거벗는 것도 사양치 않는 계집들이
밀가루 자루 같은 것
마다리 자루 같은 것
허리끈도 없이 뒤집어 입고

말하자면
잠옷으로 걸어가는
이 거리 명동 거리는
벽 없는 공동 침실의 입구.

말초 신경에다 불을 켜 놓고
원숭이 광대줄 타는 허기찬 요술이

하나 밖에 없는
국산 민주주의를 낳고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개나팔을 불기만 한다.

언제나 명절 같은 이 거리
언제나 명절 같은 이 거리에

수캐 같은 계집과
돼지 같은 사내가

어디라 할 것 없이
거리라 할 것 없이
꽉 꽉 차 있다.

놀고 먹는 거리는
대폿집 당구장 다방
극장 댄스홀 바아

화식(華食) 양식(洋食) 왜식(倭食)
한식(韓食) 집집 또 또……

세상이 삶이
혼나간 미친년 웃음 같애서

베이비 당구장
슬로트 머신에 진종일 달라붙은 사람들이
털컥 털커덕
털컥 털커덕
시끄럽기만 하다.

나이롱 양말같이 질긴 계집이
나이롱 양말같이 질기지 못한 계집이

포동거리는 사육(謝肉)은
실속이 없는 숟가락 같은
의이(擬餌)의 낚시밥이 되어
하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한 떨기 꽃도 피어날 수 없고
한 마리 새도 울 수 없는
이 거리 명동 거리에

수캐 같은 계집과
돼지 같은 사내가

사람이 망가진 인조 인간들이
네온 불 원색을 밟는 부나비가

벌레 먹은 서울 어두운 골짜기를 헤맨다.

출처 : 김광복의 똥침 국어교실 > 한국 현대시 > 한하운 > 명동거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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