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곧 나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봅니다. 그때 하나님의 답변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십니다(출3:14).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기에 창조주가 되시며 모든 피조물을 있도록 만드시는 분이시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그러나 더 간단하고 분명한 답변은 “나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나는 곧 나다(NIV. I am who I am.)”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다”라고 하시는 그분이 보냈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궁금해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 이름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을 시도합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식으로 친절하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우리의 소원을 아뢰면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등으로 아주 좋으신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답변하신 내용은 그야말로 간단한 한 말씀입니다. “나다” 이것이 답변의 전부입니다. 이 말씀은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들으라는 것입니다. 결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답변을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나다”라고 하셔도 알아들을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께서 외출하셨다가 집으로 돌아오실 때에 대문을 두드립니다. 그러면 안에서 “누구십니까?”라고 물을 때에 아버지는 자기 이름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나다”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다”라고 찾아오신 분이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기로는 갈릴리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요14:6). “나는 ~이다.”라고 하십니다. 모세에게 “나다”라고 하신 말씀이나 예수님께서 “나는 ~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같은 뜻으로 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부활이며 생명이기에 자신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11:25,26).

그런데 이 말씀을 누가 믿었느냐는 것입니다. 이사야 53:1-3절입니다.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나서서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찾아 나서서 믿게 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자기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하나님 즉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다”라고 자신을 알리시며 오시는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사마리아 우물가에 한 목마른 나그네의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남자를 다섯이나 갈아치우고 지금 함께 있는 남자도 자기 남편이 아닌 그런 여인에게 예수님은 찾아가셔서 생수에 대하여 동문서답하는 그런 여인에게 자신을 알리십니다. “예수께서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하고 말씀하셨다.” (표준 새 번역 요 4:26) 

오늘도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찾아오실 때에 내가 그라고 하시면서 찾아오시는데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모습이며 이방인들에게 미련한 모습인 십자가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된 이름 전능하신 이름으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저주받아 죽은 것이라고 돌아서 버리는 그 십자가의 모습으로 찾아오시면서 “나다” “내가 바로 그다”라고 하시면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을 맞이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기 백성은 그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부르고 양은 그 목자의 음성을 알기에 목자를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요10:3). 목자가 누더기를 입고 오든지 변장을 하고 오든지 십자가를 지고 오든지 간에 자기 양은 그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어떻게 소개 되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아니라 도깨비 방망이를 들고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금 나와라 뚝딱 하면 금메달이 되고, 은 나와라 하면 뚝딱 하면 은메달이 되는, 무엇이든 생각대로 하면 된다는 그런 이름입니다. 무엇이든 간절히 정성만 바쳐서 기도하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진다는 그런 이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바로 그다”라고 찾아오신 주님은 지금도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절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문 밖에 손잡이가 없기에 안에서만 열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내가 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전도할 때에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손에 못 자국이 난 그 손으로 두드리고 계시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18-24절입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오늘도 예수님은 십자가로 자기 백성에게 “내다”라고 하시면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