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모든 말씀은 '자녀'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성도', 곧 '산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온 세상이 다 죽었는데,

이렇게 저렇게 잘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주시는 것은

너희들은 '산자'라는 뜻입니다.


서신서에서 사도들의 '하라' 하지 말라'등의 권면과 명령들 역시

성도들, 그 '산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이미 너희들은 그 말씀을 다 이루신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이기에

너희들의 말씀대로 행함이나, 실패에 관계없이 주시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말씀대로 행하면 구원하고 못 지키면 지옥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너희는 이미 그렇게 살수밖에 없는 하늘백성들이기에

그렇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선언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소원을 두고 행하기를 원하는 새 사람이

사망의 몸과의 치열한 싸움으로 인해 절망하는 그 곤고함을 통해

십자가 은혜 뒤로 숨고, 그 은혜 아래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기 위한 간구를 하게 됨이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 없인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 은혜 안으로

한발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실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주를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할 인생이 있습니다.


법 아래 있지 않은 자녀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열을 넷으로 주신 그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며,

그 내용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요 속성이 이러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권면과 명령들을 이미 주님께서 육체로 사신 그 순종의 삶을 사심으로

우리에게 다 전가해 주셨기에 우리의 순종도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 안에 와 계신 그분의 능력으로 반드시 이끌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할퀴오' 이끄신다는 말은 안 따라가려고 발버둥치는 아이를 끝까지 붙들고 데리고 가고야 마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대로, 그분의 뜻대로 사는 일에 성공해도 감사요,

실패해도 찬송인 것입니다.

순종할 땐 불가능한 이 죄인을 이끄시는 그분의 열심과 신실하심에 감사요,

실패할 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로 승리하신 하나님의 의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배우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죄인 위에 덮어주신 그 은혜의 깊이를 알게 하시기 위해

징계와 채찍으로 아들 만들기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분의 열심 앞에 마침내 무릅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화목제물로 세우신 우리 주님의 용서를 진짜 아는 자입니다.


성도는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찾아오신 하나님나라, 이 세상에서 살면서 성령의 보증으로 미리 맛보는 하나님 나라,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는 자이며 그 하늘로 부터 오는 진짜 평강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 이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성도는 이미 묵시 속에서, 창세전에 흠이 없고 거룩한 교회를 그리스도의 피로 만드시고 그 형제들을 순서대로 잠시 이 역사 속에 보내셔서 그 아버지의 기쁘신 뜻과 영광과 긍휼과 거룩과 사랑을 배우고 오라 하신 창세전 언약의 완성을 위해 인생을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는 피조물이요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의 항복을 받아내시는 능력이요, 새 피조물인 것입니다. 


이런 피로 사신 교회를 주께서 고아와 과부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령으로 주님과 한몸으로 묶어서 진리라는 띠를 띄우고 데려가시는 여정이 광야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엇을 해도 '죄만 나오는 자'가 아닙니다. 그 죄만 나오는 '육'은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배우고 살기 위한 육이며 무엇을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 여겨주시는 '피'의 능력을 확인시켜주는 육인 것입니다. 그 용도가 끝난 육을 헌 옷 벗듯 버리고 가는 것이 완성으로의 죽음이요. 진짜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죽음아, 문열어라' 하고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그렇게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는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담안에서 태어난 것은 죄와 사망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사 함께 하늘에 앉히신 은혜의 풍성함을, 세세토록 그 은혜의 영광을 전하기 위한 '죄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무트, 타 무트' 죽고 또 죽으리라(창2:17)의 말씀이 삶에서 감사가 되고 자랑이 되고 찬송이 된 사람들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할 게 있는데 나는 날마다 죽어간다'는 바로 그 감사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도의 삶에서 반드시 나와야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 사랑으로 인해 실체로 다가온 소망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받은 믿음 곧 그리스도의 신부에게 주어진 빙폐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죄만 나오는 죄인이기에 막 사는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성도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자입니다.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와 하나님의 피를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팔기 위해 예수께 입맞추는 자들인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흔적이 없고 주님과 함께 부활에 참여된 적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죽은 자'라는 말입니다. 마지막 날에 신랑이신 주님 앞에 내놓을 빙폐물이 없는 벌거벗은 자들이기에 그러합니다. 


한편으로 우리가 십자가로 구원받았으니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열심으로 봉사하고 사랑하고 섬기자는 사람 역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와 능력에 보태거나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자격이나 능력이 없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은혜'라는 말 자체가 받을 자격도 갚을 능력도 없는 자에게 거저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둘다 어떤 그럴듯한 지식이나 열심으로 포장해도 다 '나'를 위한 예수, 십자가이지 하나님과 연합된 아들들이 아닌 것입니다. '씨'가 없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하늘 아래의 것으로, 보이는 것으로, 진리를 배우고, 표적이신 예수로 그리스도의 넘치는 사랑을 알아 열매를 맺고, 씨를 전하는 하늘들입니다.  그 하늘이 되어 돌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껍데기, 거짓으로 진리를 가리고, 어둠을 어둠으로만 보기에 그 어둠에 갇혀버린 자들, 그리스도에게 중매하는 목자가 아니라 예수를 보기 원하는 자들을 사람에게 묶어놓은 선생들, 언약의 기둥으로 똑 바로 세워지지 못하고 땅에 갇혀버린 자들이 바로 적 그리스도 입니다. 오늘 그들이 충성된 증인의 죽음 앞에서 서로 예물을 보내며 즐거워하는 것을 봅니다. 그 증인이 그들을 괴롭게 한 까닭입니다. 삼일 반 동안 성도들을 핍박하고, 호시탐탐 이리떼 처럼 노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통일되게 하려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예정이요, 경륜이요 그 안에서 영원한 기업을 상속받은 성도를 위한 세상의 배치물이요 교재요, 훈련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배려이신 것을 알기에 우리는 그 아버지를 찬송하며 영원토록 즐거워합니다.


그런 세상에서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해 내가 지은 자들을 오게 하라' 하신 그 거룩한 아버지 집으로 성도는 함께 지금 가고 있습니다. '창조'의 뜻을 번역해내기 위한 인생, 지으신 자의 손에 다 털리고, 다시 그분 만으로 채워져, 점령되어 돌아가는 완성, '주'를 위해 지음 받은 자의 삶과 죽음입니다. 그 사랑의, 그 미쁘심의 동행하심이 있기에  우리 앞서 이 땅, 바벨론에서 목 베인 증인들처럼 험한 바다, 거친 광야에 몸이 상해도 멸시받는 나그네로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에 떠돌지라도 내 이름 부르시는 날까지 우리 주님의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리가 되어 아버지의 품에 안길 것입니다.


오늘 또 하나의 그리움이 늘었습니다.


(먼저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형제 김 성수 목사님을 그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