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2장에는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추수하는 사람들을 따라 이삭을 줍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보아스는 룻이 이삭을 주을 때 편의를 봐줍니다. 보아스의 자비로운 행위는 각기 자기 옳은 대로 행하는 사사 시대에 보아스가 하나님의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이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19:9-10)

 

레위기 19장에는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이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배려하는 규정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삭을 줍게 하는 사건을 신약과 연결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방 지역인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계신데,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녀의 청을 거절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녀’는 유대인을 가리키고 ‘개들’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신명기 14:1과 이사야 1:2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로 묘사하고, 시편 59:6과 사무엘상 17:43은 이방인을 개로 묘사합니다.

 

이 비유적인 말씀은 예수님의 새 출애굽 사역에 우선적으로 유대인이 참여해야 하므로 이방인들은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떡’이라는 말씀은 메시아적 잔치를 암시합니다.

 

‘먼저’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먹고 난 다음에 이방인들도 먹게 될 것임을 암시하지만 이방인들이 새 출애굽 사역에 배제될 것이라는 암시는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자녀에, 이방인들은 개에 비유하는 말씀은 부유한 헬라 여인(수로보니게 여인이 부유하였다는 것은 그녀의 어린 딸이 누운 침상의 헬라어 단어 ‘끌리네’가 부유한 자들이 사용하는 침상임을 나타냄)이 들었을 때 모욕적인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이 말씀에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주여 옳소이다” 여인은 자기 딸을 포함한 이방인을 ‘개’라고 부르는 모욕을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유대인의 우선권을 인정합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이 우선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며 이방인들은 때가 되기까지 기다려야함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겸손한 수긍에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 한 가지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8절)

 

이러한 비유적 대답은 이방인들이 그들의 차례가 되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유대인들과 동시에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적한 것입니다. 개들이 아이들과 동시에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상 아래에서 음식 부스러기를 먹는 것입니다. 개들이 감히 자녀의 떡을 빼앗아 먹을 수는 없지만 상 아래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아이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동시에 먹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말이 옮음을 인정하시고 축귀를 베푸십니다.(29-30절) 마태복음 1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여인의 대답에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이방인이 개와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자녀에 해당하는 유대인과 식탁 아래에서 부스러기를 먹으며 동시에 식사할 수 있습니다. 개들에게도 부스러기를 취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이러한 여인의 요청은 구약 성경에서 보장하는 이방인의 권리와 일치합니다. 구약 성경은 추수하고 남은 밭모퉁이의 곡식과 이삭, 포도원의 남은 열매, 추수하고 떨어진 열매에 관한 이방인의 권리를 보장합니다.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거류민’은 ‘체류하는 타국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게르’를 번역한 단어입니다.

 

이러한 구약 성경의 정신을 적용한다면 이방인들은 부스러기에 관한 권리를 가지며, 유대인들과 동시에 추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구약 성경의 정신에 일치하는 여인의 요청을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룻과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각각 보아스와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구원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이방 지역에서 이방인에게 축귀 사역이 베풀어진 것은 이방인이 새 출애굽에 참여하고 이방 지역이 새 출애굽의 땅이 되는 의미를 가집니다. 축귀는 새 출애굽 때에 하나님의 백성의 땅에서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스가랴13:2)

 

그런데 그러한 새 출애굽 사건이 이방 땅에서 이방인에게 발생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져오시는 새 출애굽 사건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새 출애굽에는 이방 땅과 이방인이 포함됩니다. 이방인들은 새 출애굽 때에 군사적으로 정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으로 해방됩니다. 그들은 귀신들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유대인들이 새 출애굽을 통하여 회복될 때 이방인들은 군사적으로 정복당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함께 새 출애굽에 참여합니다.

 

이방 지역에서 부유한 이방 여인에게 치유를 베푸신 예수님의 사역은 민족적 경제적 차별을 초월하는 새 출애굽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통해 오는 구원은 민족적인 경계를 가진 것이 아니며 경제적인 경계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것이며, 가난한 자와 부자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