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몸의 부활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영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만져 보라고 하시면서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예수님은 있다고 하시면서 심지어 음식까지 드셨습니다(24:36~43).

 

음식을 드신 후에 이미 십자가 지시기 전에 말씀하신 내용을 다시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내용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예수님을 가리켜 기록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고한 말이 이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란 곧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 까지 이 성에 머물라고 하십니다(24:44~49).

 

약속하신 것이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주십니다(2:33).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합니다(1:22, 2:31,32, 4:2, 4:33, 10:41, 17:18, 17:32, 24:21, 1:4, 고전15).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만의 부활이 아닙니다. 주의 영이 임한 자들의 몸의 부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영이 임한 자들이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서 살아납니다. 이것을 거듭남(3:3, 벧전 1:3,23) 또는 중생(3:5)이라고 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날 수가 없기에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의 언약을 따라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성도의 이러한 거듭남은 죽은 자가 살아났기에 부활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합니다(20:6).

 

요한계시록의 이 본문을 세대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이 역사 속에서 천년동안 왕 노릇한다고 보지만 저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까지의 기간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역사 속에서 거룩한 나라로 왕 같은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벧전 2:9).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거듭난 사람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였기에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사망이란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몸의 부활을 받은 후에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5:29). 심판의 부활에 참여되는 자가 영원한 사망에 들어가기에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첫째 사망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이미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기에 첫째 사망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부활이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모든 자들이 다 부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복잡하여 보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됩니다.

 

요한복음 5:24~29절입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것은 바로 지금입니다. 그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난다는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활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이 역사 속에서 몸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이 무덤에 있는 자라고 표현되는 28~29절에서 나오는 대로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이 모습을 실제적으로 보여주시는 곳이 요한복음 11장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과 부활이라고 하셨지만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 말씀의 뜻을 몰랐습니다. 부활이란 마지막 날에 부활하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활은 바리새인들도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며 생명이기에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죽어도 부활의 생명 안에 있다는 것을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심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난 나사로는 또 죽었습니다. 그러면 이 나사로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과 생명이신 그의 영이 임한 자는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다시 죽었다고 둘째 사망이 아니라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모든 자가 예수님의 재림시에 몸의 부활이 있습니다. 몸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영원한 심판의 부활이 둘째 사망입니다(계20:11~15).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예수님의 말씀이 임함으로 살아납니다. 이렇게 살아난 자를 첫째 부활에 참여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아직 몸의 구속 곧 몸의 부활이 아니기에 이 역사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사모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는 자는 오직 주의 영이 임한 자만이 압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곧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양자 될 것 곧 몸의 속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8:23). 그러므로 믿음은 보이지 않는 이 약속을 바라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을 이루시기 위하여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고(8:26)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8:34). 이것은 이미 묵시 속에서 완성된 자기 백성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이 완료된 현실을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탄식하면서 몸의 부활을 소망하는 것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빌립보서 3:10~14절을 봅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향하여 달려갑니까?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하기 원한다고 합니다.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역사적인 현실은 고난에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도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들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달려가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노력해서 얻는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부활의 권능에 사로잡혔기에 그렇게 달려갑니다. 그 달려가는 목표와 위에서 부르심의 상이 무엇입니까? 이어지는 말씀을 봅니다.

 

15~21절입니다.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바울이 눈물로 호소하는 십자가의 원수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마침이 멸망이며 그들의 신이 배며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 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무엇이 없기에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이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없기 때문입니다. 시민권이 하늘에 없기에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가 재림하실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이란 변화산에서 보여주신 그 영광의 몸이며(17:1~13), 사도 요한이 본 그 영광의 몸입니다(1:9~20).

 

우리의 낮은 이 몸을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시켜 주실 그 날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자가 바울사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소망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것으로 말합니다. 이러한 자들 중에 이단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특정 교주가 재림한 예수라고 하면서 그들을 추종합니다. 이들은 성경이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재림을 부인하여야 하기에 온갖 비유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이런 집단들은 오히려 구별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더 교묘한 것은 원어로 파자한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물론 원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재림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기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본 원어를 연구를 한다는 사람들의 글을 보면 부활과 재림을 자기의 주관으로 풀어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것으로 말하기에 그 영광의 몸으로 임하실 재림은 부인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것은 몸의 부활에 대한 보증입니다(고후5:1~5).

 

왜 이렇게 되는지 저도 원어를 조금 공부해 보았습니다. 신학교 때 배운 알파벳도 잊어버릴 정도의 세월이 지나서 수 십 만원을 주고 신약을 히브리어로 번역한 책도 사고 스트롱 코드 성경도 사서 비교분석도 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알파벳의 신비라는 책(마르카 알랭 우아크냉, 살림)을 보면 고대의 문자가 어떻게 오늘날의 알파벳이 되는지 그 과정을 연구한 책입니다. 원 시나이어 문자의 형태와 뜻, 고대 히브리어와 현대 히브리어에서 사용된 형태, 원래 의미, 파생된 의미, 히브리어에서 획득되고 기억된 의미들을 연구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파생된 의미들을 보면 수 십 가지가 넘습니다. 이러한 문자를 해석할 때에 사람들은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가져다 쓸 수 있습니다.

 

저도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얼마든지 성경의 본문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단어 하나의 뜻을 나의 선입견을 가지고 보기시작하면 그 주장을 펼치기 위하여 그 단어의 용례를 살펴봅니다. 수 십 가지의 용례 중에 아주 구석에 겨우 한번 정도 나오는 뜻을 자기주장의 근거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자 속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립니다. 여기서 말하는 문자란 율법조문입니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린다고 할 때에 이 영은 곧 새 언약을 말합니다(고후3장). 예수님의 살과 피로 완성하신 새 언약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온전하게 구원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구원은 인간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아들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던 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물론 한글을 쓰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얼마든지 자의적인 해석을 하여 자신이 원하는 뜻들을 성경에서 찾아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볼 때 마다 바울사도가 기도한 것처럼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소망이 무엇인지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어떠한지 이 일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어떠한지를 알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음의 말씀을 묵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1:3~12절입니다.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