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요한 목사님은 서울에서 몇번 뵙고 교제한 분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하려함이라" (고후 4:8 ~ 10)


왜, 성도는 이긴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은 당하고 박해와 버림을 받아야 합니까?

 

우리가 너무 쉽게 속는 것은 거듭난 성도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고난이 없고 만사 형통 할 것이라는 철부지 신앙입니다.

내가 잘되야 한다는 나 중심의 신앙이죠, 그로인한 내 꿈의실현 그리고 능력을 가장한 이김의 신학 성공의신학 번영의 신학이

기독교를 얼마나 왜곡되게 했으며,성도의 심령을 얼마나 피폐케 했는지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바가 아닌가요?

 

나를 바로 보지 못하게 하며 끊임없이 나의 유익을 추구하며 내 야망을 성취시키는 도구로써의 신앙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기에 성도의 삶에는 죄를 이기는 승리만이 있었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삶이

하늘을 소망하게하며 이렇게 사는 성도에겐 죄로인한 아픔과 고통 그리고 질고는 더 이상 없어야한다는 잘못된 결론,

이로인하여 우리 생이 하나님 찬양하는 일과 소원 성취와 만족한 삶으로 인도하여 우리의 생을 윤택하게 만들어줄거라는 형통의

신학이 기독교의 핵심 내용이 되어버린지 오래입니다.

 

예수믿으면 날마다 찬송하고 기뻐뛰면서 주를 보며 살줄 알았는데, 정반대의 사건들이 밀려들때는 내가 잘믿고 있나, 이런

회의가 갑자기 밀려와 거의 실족할뻔 했던 일도 많았죠,

그럼에도 예수 잘 믿으면 기도응답 소원성취 모든 것들이 다 잘 된다고 너스레를 떠는 자들도 있는데, 우리 신세는 왜 이리도

처참한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고사하고 심판을 독차지 하고 있는 자들처럼 만물의 찌꺼기같이 취급당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성경은 유독 성도만이 세상으로부터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리려는 시도가 그치지 않는 것은

예수의 죽음을 그 몸에 짊어지게 하심으로 그 생명이 우리 몸안에서 나타나게 하시기 위함이라 하시네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은 이런 것들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고 애통하는자가 진정 복 있는자라 하십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후에는 점점 더 시간이 지날수록 철이들어 아버지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해 드릴줄 알았는데, 그리되면 주님 공로가

더 흐릿해질까봐서 그랬는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의 추악한 내면이 드러나기 일쑤며 어둠의 실상이 빛으로 드러나고마니

할 말이 없어지네요, 빛이 강하면 강할 수록 어둠이 견디지 못한다고 했잖아요, 우리가 빛 가운데로 행함다 함은 어둠의 일을 버리고

빛의 일을 행한다기 보다는 어둠의 일들이 빛에 의하여 고발당할 때, 즉 폭로될 때 그것을 인정하는 그 행위가 빛 가운데서 행한다

는 말씀의 진의가 아닐런지요,

 

성령이 다시는 죄를 안 짓고 아예 못 짓는 자로 만들었다면, 이런 고민거리도 없었겟죠, 상한 심령과 애통 속에서 우린 위로를 경험

하고 고난의 애가 속에서 진정한 천상의 찬송을 부르며 하늘 영광만을 찬양할 수 있었겠죠, 허나 육과 영의 갈등구조속에서...

자아가 깨지는 경험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승리를 만긱하게 하시며, 내 연약한 몸안에 예수생명이 나타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와 섭리라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이는 그리스도안에서 내가 매일 죽은자임을 자백하는 것이 그 은혜안에서 내가 산 자

로 새생명 가운데 역사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랍니다.

 

진작에 애가는 끝나고 우리 삶에 찬송이 울려퍼지고 피 튀기는 갈등은 종식되며, 이김만이 역사하기에 내가 살아나 예수안에서

생명만이 약동할거라는 기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하루속히 무너지는 것이 복이라하네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하면서 가장 많이 오해하는 부분은, 죄의식을 떨쳐버리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믿음 좋은것인 양,

그리 착각하는 것인데, 이는 언약의 묵시성과 현실에서 수평적으로 겪게되는 체험을 혼돈하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말씀의 겉과 속을 함께 봐야하며 성경의 표피와 내면의 진의를 같이 봐야 하고 시공을 초월한 계시적 측면에서 말씀을 봐야지

그저 성경을 내 위주로 내가 경험한 선악 구조의 개념안에서만 보게되면 그 사람의 성경관은 대단히 왜곡되고 편협해 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예수안에서 새것이 되었기에 날마다 번창하는 새날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육을 죽이시는 신음소리 장성곡이 더욱 크게

울려퍼지게 되어 있으며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으면 이제 살아나 새생명 가운데 생명의 기운이 약동해야 하는데 사망의 냄새가

약동하는 이유는 뭔가요? 그리스도를 믿는자라면 이제 그 안에서 예수의 향기가 나야지 인간냄새,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쓰레기만도 못한 자신을 발견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고전4:11~13)

 

그 인간의 냄새가 바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로 덮을 조건이라면, 날마다 죽고 스스로 살아나지 못하는 사망의 그림자 안에서

울려퍼지는 장성곡이 예수 생명이 드러날 수 있는 조건이라면, 날마다 실패와 좌절을 맛보며 나 안됨을 고백하는 항복 선언이

바로 그리스도의 이김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는 조건이 된다면, 이 역설적인 운명이 성도의 길이요 축복인 것이 이해되시나요?

 

그런고로 묵시안에서 산 자임을 아는 자들이 역사 속에선 죽은 자임을 알고 몸부림치는 그 고백이 복있는 애통입니다.

 

우리가 죽는거 따로 사는거 따로 편차를 두고 벌어지는 각 사건이 아니라 이는 동시에 벌어지는 것인데, 묵시에는 과거와 미래가

없고 현재만이 존재할 뿐, 묵시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계시의 눈으로 보고 그것을 체험하고 기록한 것이 성경이라면. 이미 완성된

현재를 필자가 영감을 받아 기록한 그 말씀을 우리는 시공 밖에서 계시의 눈으로 봐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내가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거예요, 다만 육의 오감안에선 죽은자로 감지되는 것 뿐입니다.

역설적으로 산 자는 이 육이 시퍼렇게 살아 있어 오늘도 죽지 못하고 펄펄 뛰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육신의 한계를 직시하고 '난 어찌해볼 수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이구나' 이렇게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자가 진짜로 죽은자요,

그리스도안에서 묵시안에서 산자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산 자가 되었다고 계속 살아있어서 주님만 찬양하고 다시는 사망의 냄새를 풍기지 말아야한다는 논리는 일견

맞는말 같지만, 모든 자를 불가능속에 가두고 종국엔 심판 받을 자로 결론나게 하시고 오직 십자가로 그 죄를 가리워 심판을 면케

하시어 온전히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하시려는 새창조의 메카니즘과는 거리가 있는 그런 논리인 것이죠,

 

우리 더 이상 이 세상에서 구역질나는 시체화장놀이 그만하고, 착한사람 코스프레 집어치우고 시퍼렇게 살아 있는 나 자신을

인정하자는거예요, 억지로 이 악물고 참고 벼르지 말고, 그것을 오래참음, 인내로 자신을 속이지 말고, 자기 민낯을 과감하게

드러내란 그런 말입니다.

벼르다 기여코 터져버리면 자신의 밑바닥이 통째로 드러난 뒤 자존심 상해 헛소리 하지말고 그냥 난 시체요, 죽은 송장맞아요,

그 무덤앞에서 내 죽음을 알리는 장성곡을 부르자고요~

그렇게하면 그것이 거꾸러질 일을 당해도 망하지 않게되는 비결입니다.

 

우린 그렇게 어거지로 견디면서 내가 죽었다고, 변했다고, 성숙했다고, 너스레를 떨며 자신을 속이지 말고 그냥 인간 냄새 풀풀

풍기는 예수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는 단 한시도 존재일 수 없는 구제불능성 인간 맞아!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철저히 인정하는

자라면, 왜 나를 온전히 구원해 줄 그 예수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안 되는 이유는 우리가 믿되 어설프게 믿기 때문입니다.

나를 좀 세련되게 해줄수 있는 그런 신앙, 말씀대로 사는 것처럼 보여, 예수 본받는 삶 세련된 성화주의로는 결코 나의 가능성을

송두리째 부정해버리고 그리스도에게 나는 없음이라 자폭하며 함몰될 수 있는 기회는 영원히 주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초라함에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지 못한 자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말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어렵겠죠,

 

차라리 나사로처럼 죽은지 사흘이되어 냄새가 풀풀나는 시체가 '나맞아요!' 그를 가리웠던 붕대와 모든 두루마리을 다 풀어 놓아

죄인의 민낯을 보여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요, 심판 받아야 할 죄인 중의 괴수임을 자꾸 고발하시는데, 난 아니라 부정한다면, 이는 가라지일겁니다.

차라리 우린 굵은 베옷을 입고 장성곡을 부르는 것이 위로받는 길이요, 주님 가신 길이요 십자가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찬송은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고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천상에서 울려퍼지는 하늘나라의 노래입니다.

성도가 이세상의 고난가운데서 드디어 바라보게되는 묵시의 현실을 보고 영혼에서 터져나오는 그것이 찬송이예요,

 

성도는 하늘의 묵시안에서 자녀가 되었고 의인이 되었고 구원이 완성되었지만, 이 역사의 실존은 그 반대입니다.(고전4:12)

 

이 역사안에서 창세전 언약안에 있는 무리는 심판을 면치못하는 구제불능성 피조물로 입증되어야하고, 살아나지 못한 시쳇 덩어리

없음이란 티끌로 존재가 아님이 드러날 때 비로소 예수그리스도의 덮는 은혜가 '로기조마이' 자녀로 여겨주심의 일방적 은혜로

그들을 덮어주는 십자가의 피가 하늘과 땅을 하나로 연결하는 언약의 기둥으로 성육신의 실체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십자가의 실체화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장성곡이 없이 찬송만 울려퍼지는 그 약속은 우리가 결국 그 나라에 도달할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다시는 애통이 없고 곡하는 것이 없고 아픈 것이 없는 천상의 하늘나라에서 성취되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에 앞서 애가를 먼저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눈에서 씻기시매 다시는 사망이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 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 (계21:4) ~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