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대하여 질문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황두용 목사님의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라는 기도에서 기다리는 기도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을 때 기도한다고 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경우 자기 능력으로 벗어날 수 없을 때 절대자 신이 도와주기를 바라는 기도를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으면 스스로 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기도하게 됩니다.

 

일반적인 기도는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은 있지만 자신이 할 수 없을 때 절대적인 능력을 지닌 절대자에 도움을 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기도는 기도자의 뜻과 절대자의 도움이라는 두 측면을 담고 있습니다.

 

조건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언제나 좋은 조건을 바랍니다. 좋은 조건을 바라면서 또한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래서 성공한 삶, 혹은 실패한 삶을 이야기합니다. 성공과 실패는 세상에 처한 조건으로 이야기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자신이 노력하여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위기에 처하여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경우 그냥 포기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자에 매달리며 도움을 간구하게 됩니다. 절실하게 도움을 간구하는 표현이 기도라고 여깁니다.

 

기도는 이렇게 개인적으로 마음에서 간절히 바라는 표현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의 절실한 움직임을 따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개인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으니 기도는 개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도는 결국 이기심과 같이 갑니다. 이기심도 개인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니 기도는 이기심에 편승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기도가 오히려 이기심을 조장하게 됩니다.

 

개인이 마음으로 바라는 기도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구출을 바라는 것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럴 수 있다고 용인되긴 하지만, 이기심을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 바라는 바를 추구하는 것은, 스스로 노력하여 얻든, 아니면 절대자에게 도움을 바라든. 이기심의 집착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기도가 오히려 이기심을 심화할 수 있습니다. 이기심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의 영역에까지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우상숭배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절대화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뜻을 우상으로 세우는 것이 됩니다. 자신의 뜻으로 하는 기도의 문제점이 여기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뜻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지나치지 않으면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입니다.

 

기도가 개인의 마음에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귀결은 당연해집니다. 개인의 마음을 따라 기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목적하는 바로 기도가 향해지니 우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기도를 자신의 뜻으로 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도 기도가 자신의 뜻으로 하는 것이라고 따라가는 것은 문제입니다. 종교적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면 이런 경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종교는 인간 본성으로부터 출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와 우상숭배의 경계를 명확하게 그을 수 없습니다. 둘 다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것임으로 마치 선과 악의 경계를 긋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적인 기도는 좋고 우상숭배의 기도는 나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이 하는 기도를 따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따른다고 할 때 주의해야 할 바 가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종교적인 창시자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종교적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라 기도하는 것도 종교적인 기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삶을 사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 부각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 자신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자신의 뜻으로 사는 종교적인 삶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전개되는 내용은 성경에서 들려주는 언약으로 이야기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을 세상에 보이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 보게 된 것은 언약의 삶이지 종교적인 삶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은 언약의 삶이지 종교적인 삶이 아닙니다. 언약의 삶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이지만 종교적인 삶은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언약의 함께와 종교의 개인성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라하는 기도는 예수님이 보이신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을 따라하는 기도에는 기도자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부각됩니다. 즉 예수님을 따라하는 기도는 언약의 기도입니다.

 

기도자가 자신의 뜻에 몰입하는 것은 자신에 마음에 갇히는 것입니다. 결국 홀로 고립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자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홀로의 삶이 아닌 함께의 삶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아닌 기다림을 보이게 됩니다. 바람은 개인의 마음에 갇힌 것이지만 기다림은 함께로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바람은 홀로의 삶이지만 기다림은 함께의 삶입니다. 여기서 기다림은 자연에 일어나는 현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의 삶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언제나 기다리는 삶입니다.

 

개인으로 바람과 함께로 기다림은 언제나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바람의 기도와 기다림의 기도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바란다고 하기보다 기다린다고 해야 합니다.

 

기다림으로 기도한다면 기도는 인도되는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인도하시는 내용으로 기도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인도되기 때문에 마음이 바라는 것으로 몰입되지 않습니다.

 

개인이 마음으로 바라는 기도에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인도되는 기도로 나아가는 것은 성령님에 의해서입니다. 종교적인 기도에서 영적인 기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종교적인 기도이고, 영적으로 인도되는 기도는 언약의 기도입니다.

 

바라는 기도에서 기다리는 기도로 나아가는 것은 종교적인 마음에 머물지 않고 언약의 영성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언약의 영성은 무엇보다 기도의 내용으로 보입니다. 기도가 영적으로 인도되면서 영성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