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선물한 시집

'신은 쓸모라는 말을 알지 못한다'에서 한 편 옮깁니다.)



십자가를 사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솔 광장

방사선으로 뻗어가는 아홉 길 중 하나

벼룩시장 쇼윈도가 즐비한 거리 귀퉁이

해어진 보자기로 덮은 좌대를 펴놓고

남루한 노인은 십자가를 깎고 있었다


비틀어지고 갈라진 잔솔가지들 그대로

껍질을 벗겨내고 불에 그슬려

자르고 붙여 조각칼로 다듬는

생채기투성이 손끝에서 돋아나는

볼품없는 기형의 십자가들


"How much?" 가격 묻는 외국인 손님에게

웃음인 듯한 우악한 표정을 지으며

노인이 집어 건네는 종이상자 조각 속

가격인 듯 쓰여 있는 색바랜 서툰 글자들

"가격은 당신이 정하면 됩니다"

가격표에는 숫자가 없었다

당황한 손님 세워두고 아랑곳없이


십자가만 다듬는 무심한 늙은이 앞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생각이 많아지다가

고민이 길어질수록 가격도 올라가

이해할 수 없는 값을 치르고

십자가 하나 사고야 말았다


노인은 끝까지 말이 없었다



                 *


성서는 "값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데 '값없다'는 말이 '공짜'라는 의미만은 아니지요.

값을 매길 수 없을 때 값이 없다고 합니다. 

하늘나라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야 하늘나라를 살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목숨을 다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