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장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약속(언약) 으로 유명한 장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으니 이를 그의 ()여기셨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15장입니다. 1518절에 조금은 생각해 보아야 대목이 나옵니다. 창세기 1518절은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 내가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까지 자손에게 주노니

 

이는 아주 간단하게 지금으로 이야기 하면 예수 믿으면 천국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자손들에게 땅을 주겠다는 약속이니까 당연히 미래에 일어날 일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미래형으로 써야 되겠지요. 우리가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것도 미래에 일어날 일이고 당연히 미래형이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에 주노니(번역은 준다) 라고 번역된 말은 영어성경은 현재형, 히브리어 성경은 완료형으로 되어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는 순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소유는 벌써 우리들이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번복하거나 변화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기정 사실이고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아이로니칼 하게도 이것을 변경시키거나 아니면 확신을 갖지 못하고 혹시 변경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하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행위를 보고 약속을 변화시키거나 없었던 일로 하지 않습니다. 믿고 나서의 열매를 보고 그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약속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이고 심한 경우에는 하나님을 떠나는 일까지 일어나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을 정리하면 이러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하나님이 천국을 주겠다고 약속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약속의 말씀을 하신 것이 바로 위에 있는 18절입니다. 이렇게 미래형을 쓰지 않고 현재형 또는 완료형을 것은 만큼 확실한 절대로 변하지 않는 약속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확실하게 마음으로부터 믿는 다는 것은 정도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미 결정 일입니다. 그런데도 말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성경에 나와있는 마디 때문입니다. 예수님 다시 오실 심판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 너희들이 행한 대로 갚는 다는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우리들이 취해야 자세에 대한 성경말씀의 잘못된 이해(예를 들어서 양과 염소의 비유 ) 만약 이러한 것들이 여러분들의 천국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한다면 무조건 잘못 이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이십니다. 우리의 행위가 잘못됐다고 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하나님을 찾는 우리들의 잘못될 수밖에 없는 행동으로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분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72122절에 나오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는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믿느냐 믿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흔히 예수 믿는다고 천국가는 아냐 라는 것을 강조하며 겁주는 말로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천국 앞에서 자기 공로 늘어 놓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데 천국 문에서 예수님에게 세상에 있을 무슨 무슨 했어요. 라고 자기 공로 늘어 놓겠습니까? 이것은 틀림없이 가짜입니다. 사람들은 행위로 구원받는 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거나, 또는 예수 믿어도 행위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려고 자기가 공로를 늘어 놓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행위가 천국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이지요. 아직도 예수님의 은혜의 인식없이 자기들의 행위를 늘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지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100%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행위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행위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 아무렇게 살아도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가슴깊이 느낀 사람은 조금 부족하기는 하지만 아무렇게 살지 않습니다. 이것은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믿는 사람들은 천국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해도 해도 안됩니다.  저희들은 예수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편의 글이 이 정도인데 조금 짧은 글도 있고 조금 긴 글도 있습니다. 최근의  한 편을 더 올려놓겠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제가 성경을 읽기 전에 기도할 , 항상 기도하고 조심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대하기 이미 생각에 의해서 어떤 결론이 이미 내려질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읽을 수록 이러한 일이 더욱 많아지는 같습니다. 어쩌면 성경 지식에 대한 교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름 대로의 결론이 내려진 성경을 보게 되면 결국 생각에 굳어져 있는 결론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향으로 성경이 해석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대할 생각을 버리자는 마음을 가지기도 하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정말로 조심해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의 생각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려고 하는 바른 생각이라면 감사할 일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가 있을 있고 그리고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되면 이러한 사실에 대해 더욱 조심하게 되고 더욱 많은 기도를 하게 됩니다. 것이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일까?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지요.

가끔 생각이 나시면 이러한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이야기하는 것과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서두를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한국 사람이 되려면 한국 사람 부모 가정에 태어나야만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 그렇구나 나는 한국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정말로 원해, 그러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한국 사람 부모에게서 태어나야 . 라고 반응한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사람 조금 이상한 사람 아냐? 라고 말할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조금 잘못 이해해서 위에 말한 사람처럼 말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전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하실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비유 자체 속에 핵심이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엇인가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한 비유를 드는 것입니다. 틀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도 너무나 우아하고 세련되게 해석을 하다 보면 핵심을 놓치고 다른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고위층 아마도 산헤드린 공회의 관리인 같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질문을 합니다. 당신이 하는 짓을 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인 같기는 한데 당신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시고 전혀 뜻밖의 금방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나 아는 유명한 말씀이지요.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없느니라(3:3)’ 여기서 유명한 거듭남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거듭남이라는 말을 성화의 단계인 도덕적, 윤리적으로 이해를 하거나 영적성숙의 의미로 이해를 하거나 아니면 선택 받은 사람의 조건이나 혹은 마땅히 가져 자세 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는 이유는 , 해야 한다는 때문입니다(거듭나야 한다). 그래서 마치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나님을 있는 것처럼 이해를 합니다.

 

말씀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너를 선택해 주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거듭나고 거듭나지 않고는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아니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육은 죽고 성령에 의한 믿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3:5~6). 태어나는 것은 전혀 우리의 의지가 개입할 수가 없지요. 예수님은 말씀을 하시려고 거듭남이라는 말을 하신 것입니다. 말은 도덕, 윤리하고 아무 상관이 없고 우리의 자세하고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당연히 예수 믿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조건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입니다. 태어날 우리가 원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선택해서 이러한 가정에 태어나야 하고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태어나는 것은 우리의 의지나 선택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이라는 말은 문학적인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번도 문학적인 표현을 쓰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말씀 속에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거듭남이라는 표현을 하신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거듭나면 (다시 말해서 예수 믿으면) 지난 주에 이야기했던 고린도 후서 517절의 새로운 피조물의 신분이 되는 것입니다. 마디로 네가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없다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네가 예수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없다 정확하게 같은 말입니다. 거듭 나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 믿는 것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자세와는 전혀 관계없는 말씀입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 듯이 우리의 선택이 전혀 개입할 없고 100%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말씀이 아니라 같은 사람을 택해서 거듭나게 주시 다니 너무 너무 감사한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