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49)

눈이 성해야 온 몸이 밝다

 

(마6:22~24)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주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열이라는 율법을 넷으로 설명을 해 주신 뒤 그것을 사랑으로 결론지으셨습니다. 그 아가페의 사랑이란, 열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진리)’로 깨달아, 먼저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알고 그 ‘하나’를 이웃들에게 전해주어 그 하나이신 생명을 마음에 담게 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그것을 전해 줄 때에 주의해야 할 것들을 나열해 주신 것이 6장이라 했지요? 그래서 6장의 첫 단어가 ‘프로세코(주의하라)’인 것이라 했습니다. 무엇을 주의하라 하셨습니까? 구제(엘레에모수네)를 할 때에 왼 편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오른 편의 것으로 구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은밀한 내적인 것으로 구제를 하라 하셨습니다. 구제라는 단어, ‘엘레에모수네’는 ‘엘레오스’에서 온 말인데 ‘엘레오스’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적극적인 긍휼이나 자비’를 가리키는 단어이고 그것을 올바로 깨달아 마음으로 가지면 ‘엘레에모수네’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적극적인 긍휼과 자비를 올바로 깨달아 안 사람이 그것을 정직하고 똑바르게 전해줄 때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구제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기도의 문제였습니다. 기도(프로슈코마이)라는 것은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 사람이 그 하늘의 뜻대로 아버지를 마음으로 가져, 그 아버지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생명의 존재가 되어 그 아버지의 뜻이 ‘옳습니다’라고 고백하고, 그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이웃들에게 흘려주는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그 기도라는 것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은밀한 것으로 해야 하는 것이고, 성전의 골방 안으로 들어가 그 성전이 담고 있는 내용을 잘 배워 그것으로 해야 하는 것이며, 중언부언(바톨로게오, 정확하지 않은 말로 말하다)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올바른 기도는 사람의 죄를 용서해 버리는 힘이 있는 것임을 강조해 주셨습니다.

 

세 번째가 금식의 문제였지요? 금식이란, 꼭 먹어야 할 것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절대 먹어서는 안 되는 율법의 양식을 먹지 않을 수 있는, 진리의 이해문제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올바른 금식을 하기 위해서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머리이신 예수를 장례 지낸다는 것이고 얼굴을 씻는다는 것은 말씀의 표피를 잘 닦아서 그 안의 내용을 보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먹어야 할 것을 먹을 수 있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은 먹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웃에게 그 양식을 구제(엘레에모수네)로 넘겨줄 때에 올바른 양식으로 넘겨 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네 번째가 하늘의 보물과 땅의 보물의 문제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올바로 깨달아 먼저 하늘들이 되고 그 안에 그 말씀을 담아야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가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땅 적 차원으로 말씀을 이해하여 땅의 행위와 땅으로서의 아담들의 가치 자랑에 그 말씀을 이용하고 있다면, 그게 바로 땅에 보물을 쌓는 것이라 했지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의 보물로 그 안에 담고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하늘의 보물인 것이요, 그 말씀을 땅의 것으로 그 안에 담고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땅의 배설물인 것이라 했습니다. 율법의 상징인 바리새인의 그 ‘바리새(파리사이오스)’라는 말이 히브리어 ‘파라쉬’라는 단어를 그대로 음역한 것인데 그 단어는 ‘분리하다’라는 뜻과 함께, 모음만 바꾸면 ‘배설물’이라는 단어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전해주면 그것이 올바른 구제가 되고, 기도가 되고, 양식이 되고, 보물이 되지만, 그것을 표피적인 율법으로 전해 버리면 배설물을 나누어주는 더럽고 추악한 짓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의 보물로, 하늘의 양식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눈이 성해야 합니다. 눈이 성해야 제대로 보고 제대로 본 것을 마음에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본문 22절을 보시면 ‘눈은 몸의 등불이니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눈’이라고 번역이 된 ‘옵달모스’는 ‘옵타노마이’라는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제가 전에 ‘옵타노마이’는 반드시 ‘에이도’와 ‘블레포’의 과정을 거쳐 ‘호라오’로 완성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호라오’는 ‘들음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본다는 것이 그저 사물을 인식하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라면 ‘들음으로 본다는 것’은 보이는 그 표피 안에 내용으로 담긴 것을 들어낼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반드시 성도는 보이는 것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을 인식하는 수준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율법이라 하고, 그 보이는 것을 통하여 그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면 그것을 진리라 합니다. 22절을 원문에 충실하게 직역을 하면 ‘몸의 등불은 눈이다, 눈이 성하면 그 몸은 다른 것을 밝혀주는 온전한 몸이다’가 됩니다. ‘등불이 눈’이라고 하지요? 이걸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등불이라는 말은 창세기 1장에 처음 등장한 뒤 율법서 전체에 아주 많이 등장하는 말이거든요.

 

먼저 성경이 그 ‘등불(뤼크노스)과 ‘눈(옵달모스)’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계5:6)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보시다시피 눈이라는 것은 일찍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눈을 가리켜 ‘영’이라고 하지요? 주님께서는 그 영을 당신의 말씀이라 하셨습니다.

(요6:63)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살리는 것은 영, 즉 진리의 말씀인 것이지 육(율법)은 사람을 살리는 데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영은 뭐라고요? 눈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진리라는 ‘하나’로 보지 못하고 열심히 행위로 행해버리면 그건 생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건 여전히 말씀을 어둠의 책으로 보는 것입니다.

 

말씀은 분명 아래의 말과 소리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진리로 깨달아 알았을 때 그 어둠의 말은 빛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성전이라는 것을 성전이라는 모양과 형식으로 받아 버리면 그게 어두움인 것이지만 그 성전을 통하여 진리라는 내용을 알았을 때 그 똑같은 성전이 그 내용을 안 사람에게는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는 빛(히:오르, 헬:프호스)이라는 단어는 전부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오르’는 ‘마오르’로 빛을 내는데 그 뜻은 ‘진리를 말씀하기 시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헬라어 ‘프호스’는 ‘훼미’라는 단어와 ‘프흐뎅고마이’와 맥을 같이 하는 단어인데 ‘훼미’는 ‘이야기 하다, 말하다’라는 뜻이고 ‘프흐뎅고마이’는 ‘분명한 소리로 말하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빛’이라는 것은 어두움에 속한 아래의 것들을 위의 것으로 보아 분명한 소리로 말할 수 있을 때, 그것을 빛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내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 그 말씀을 진리로 보게 하는 능력을 ‘눈’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눈이 올바르지 않으면 빛이 비추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빛, 광명(마오르)’이라는 단어를 성소 안의 ‘등대’라는 말로 쓰는 것입니다. 성소 안의 일곱 등대는 성소 전체를 밝히는 빛입니다. 그런데 일곱 등대입니다. 일곱 말, 즉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곱 말(언약)’이 성전의 의미를 올바로 밝히는 유일한 빛이라는 뜻입니다.

(계4:5~6)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 하더라

보좌 앞의 일곱 등불이 뭐라고 해요? 일곱 영, 즉 일곱 눈입니다.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을 담고 있는 것이지요? 말씀이 하나님이라는 진리로 깨달아지지 않으면 그 등대에는 등불이 켜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계21:22~23)

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성전은 제사를 열심히 드리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배워야 하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요 어린양이라고 하잖아요?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즉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다른 빛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빛이고 어린양이 바로 그 등대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아버린 이들에게 왜 다른 빛이 필요하겠어요? 아니 애초부터 ‘빛’이라는 개념은 어두움을 내용으로 알아버리면 그것을 빛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창세기 1장 2절까지는 빛이 없었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깊음 뿐이었습니다. 그 깊음(테훔)을 세 번째 날에서 ‘바다’라 칭하기로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그 깊음의 이름(파님)을 ‘어둠(호쉐크)’이라 하자고 2절에서 약속을 하지요? 그러니까 그 아래의 물, 즉 이 세상과 율법과 성전과 인간과 어두움과 죄와 예수까지도, 그것이 담고 있는 진리라는 내용으로 밝혀지게 되면, 그 자체가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어린양이 바로 빛이라고 성경이 결론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계22:5)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어떠세요? 눈이라는 것, 등대의 빛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내용으로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지요? 마지막 확인 도장을 찍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요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말씀이신 하나님이 이 어두움의 땅에 오셨습니다. 무엇을 하기위해 오신 겁니까? 그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치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을 빛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두움을 빛으로 잘 깨달아 알면 그게 바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자력으로 빛을 볼 수가 없어요. 그들은 눈이 성하지 않은 소경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소경들에게 빛을 볼 수 있는 눈을, 영으로 선물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소경이라는 자인식이 먼저 있어야 해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스스로 보는 자라 여기며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눈이 성하다는 말과 눈이 나쁘다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눈이 성하면’이라는 단서를 다시는데 그 ‘성하면’이라는 단어 ‘하플루스’는 ‘하’라는 부정접두어와 ‘플레코(엮다, 땋다)’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성하다’라는 말은 ‘엮지 않고 섞지 않은 것’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한 일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엮어서(타파르, 바느질하다) 치마(띠)를 해 입은 일이었던 것을 기억하세요. 섞거나 엮는다는 것은 순수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눈, 즉 우리가 가진 그 영의 말씀이 섞이거나 엮은 것이 아니어야 빛을 올바로 비출 수 있다는 그런 말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온 몸이 밝으리라’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그 어구는, ‘그렇게 빛을 비출 수 있는(프호테이노스) 몸을 온전한 몸(홀로스 호 소마)이라 한다’는 그런 말입니다. ‘홀로스 호 소마’는 완전한 몸, 온전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눈을 진리로 갖고 있는 이는 어두움을 빛으로 비출 수 있는 사람이고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온전한 몸’이라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이미 앞의 5장에서 잘 설명해 주셨지요?

(마5:14~18)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 이로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우리를 가리켜 세상을 비추는 등대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그 등대의 빛은 산 위의 동네를 밝히 드러나게 한다고 하지요? 그 산위의 동네가 ‘폴리스’인데 그 단어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폴리스’라는 단어는 창세기 2장의 ‘에덴’이라는 ‘동산(간)’을 창설(나타, 심다, 박다, 고정시키다)하셨다는 어절에서 사용된 ‘간’이라는 단어를 옮겨 놓은 것입니다. 그 단어는 ‘울타리를 치다, 성으로 두르다’라는 뜻과 함께 ‘보호하다, 구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서 울타리를 두르고 구별해 놓으신 하나님 나라를 상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저 희생 제사나 열심히 드리고 하나님을 치성으로 섬기는 장소로만 보게 되면 그게 바로 어두움이라는 것입니다. 빛은 그 산 위의 동네, 예루살렘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밝히 보여주는 능력인 것입니다. 그걸 눈이라고 하고, 영이라고 하고, 말이라고 하고,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올바른 눈으로 진리를 분별하여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사람들의 그 행위를 착한 행실(선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말을 덧붙입니까?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왔다’고 하십니다. 그 말은 율법이나 선지자가 나쁜 것이라서 없애버리고 새 것을 가지고 왔다는 말이 아니잖아요? 그 율법과 선지자를 진리로 밝히 비추어 주려고 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그 율법과 선지자 안에 담겨 있던 그 진리가 드러나면 그 율법과 선지자라는 껍데기는 그 자체로 의미가 없어지지요? 그것을 완성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렇게 껍데기와 모형이 의미를 잃는 것을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사라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가 사라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게 될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일점일획이 다 진리로 깨달아지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날려 버릴 수 있는 것이 성한 눈이라는 것입니다.

 

그 눈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우리는 즉시 우리의 현상계가 존재영역의 전부가 아님을 인지하게 됩니다. 이 유한의 세계를 조성한 근원의 터전인 무한의 영역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세상 속에서는 우리 자신의 존재성이 유한의 영역에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음을 감지할 수 있게 되고 그 무한의 세계 또한 불가지의 추상성으로 덮여 있는 것처럼 인식됩니다. 그러나 차츰 그 나라는 내 마음 속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영적 눈이 성해지면 그러한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존적 절망의 상태에 대해서 알게 됨과 동시에, 스스로의 힘으로 유한의 세계에서 무한의 영역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원죄’라 불리는 인간 내부의 생래적 욕망의 실체에 관해서도 잘 알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뼛속 깊숙이 실존의 한계에 사로잡혀있을 수밖에 없는 그 절망적인 옛 자아의 영향으로, 그러한 인간 실존의 충격적 자각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끊임없이 땅의 어두움으로의 퇴행 의지로 점철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빛에 의한 자기 실존의 까발려짐이 심히 불편하고 불쾌하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인간의 의지와 종교 행위와 율법의 세계로 퇴행해 들어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서, 수시로 종교의 탈을 쓰고 종교의 이름으로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심판하고, 도그마의 틀 안에 인간의 관습과 행위와 의식을 가두어 버리고서 그것이 곧 무한의 신비, 생명에 참여하는 길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진리라고 굳게 믿으며 욕망의 바벨탑을 쌓기도 합니다.

 

그래서 열을 다섯으로, 그리고 넷으로, 그리고 둘로, 그리고 하나로 완성하여 주어도 그것을 두려움으로 감추는 이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니 이러한 현상은 우리 안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마25:24~25)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하나를 받은 자가 그것을 주신 분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라는 것에 의하면 그것을 주신 분은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자기는 꼭 심어야 거두어지고 헤쳐야 거두어 진다는 인과응보의 눈으로 말씀을 보았고 그렇게 행했는데, ‘하나’를 받고 보니 그 ‘하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창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전적 주권’이라는 은혜를 말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기 자신 안의 어두움의 영역 속으로 감추어 버리고 자신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 과정은 우리 안에서 공히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 성도의 입을 통해서만 그 빛을 전달하시겠다는 진리 전파의 메커니즘을 확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빛을 받은 자는 절대 주인이 오시는 그날까지 그 빛을 감추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성도는 끝까지 자기에게 밝혀진 그 빛을 끊임없이 두려워하며, 다시금 땅을 향해, 현상계를 향해, 인간의 안목을 향해 곤두박질 칠 수가 없습니다. 성도는 그 두려움과 절망감과 상실감을 극복하고 자신의 눈으로 들어 버린 그 빛으로 산 위의 동네를 환하게 비추는 자로 살게 됩니다. 그건 필연적인 것입니다. 절대로 어두움의 땅에 그 ‘하나’를 감추어 둘 수 없는 자로 끌려가게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빛을 비추는 온전한 몸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니까요.

 

그게 성한 눈을 가진 성도의 모습이라면 나쁜 눈을 가진 이는 어떻게 되는지 보세요. 본문 23절입니다.

(마6:23)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눈이 나쁘면’이라는 어구에서 ‘나쁘면’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헬라어 ‘포네로스’입니다. 그 단어는 ‘수고, 고통(율법적)’이라는 뜻의 ‘포노스’에서 파생이 된 단어인데 그 ‘포노스’는 ‘페네스(육적 결핍, 육적 가난)’와 어근이 같습니다. 그러니까 ‘눈이 나쁘면’이라는 말은 ‘말씀을 보는 안목이 육신적인 것이면(율법이면)’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요? ‘온 몸이 어두울 것’이랍니다. 그 어구는 ‘어두움으로 완전해지는 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멸망이지요?

 

그래서 주님이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네게 있는 빛이(네가 빛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이) 어두움이면(율법)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한 어두움이겠느냐?’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내가 빛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 정말 빛인지, 아니면 그 빛을 담고 있는 그릇만을 보고 그것을 빛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 잘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정작 봐야 할 것은 보지 못하면서 표피적인 겉껍데기만을 ‘에이도’ 한 후에, ‘난 볼 수 있고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아직 빛을 비추기도 전에 자기들은 이미 보고 있다고 우긴 사람들이 있었죠?

(요9:39~41)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뭐라고 하세요?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만들어주고 본다고 하는 자들은 소경 만들어서 어두움으로 완성시키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 앞에서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절대 소경이 아니다, 보는 자들이다.’ 자기들은 성경을 제대로 보고 있고, 그 본 바대로 행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자기들은 소경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주님은 아직 진리의 영으로 빛을 비추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자기들은 이미 보고 있다고 우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진짜 소경들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들이 눈을 나쁘게 갖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눈이 있기는 있는데 진리의 눈이 아니라 율법의 눈입니다. 주님은 그 눈을 보는 눈으로 인정을 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보느냐 율법으로 보느냐에 의해 이 세상을 눈에 보이는 표피로 보느냐 그 내용으로 보느냐가 갈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목은 우리의 세계관이 되고 마음이 되어 우리를 지배합니다.

 

그래서 이 눈의 이야기 끝에 두 주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늘로 나를 지배하느냐, 아니면 땅의 율법으로 나를 지배하느냐에 의해 우리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이 결정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로 나의 주인이 되면 나는 그 주인의 섬김을 받는 자로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율법으로 내게 들이닥치면 나는 그 주인의 종이 되어 그 주인을 섬기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율법의 종은 열심히 자신을 불태워서 자신의 유익을 스스로 챙겨갖는 인과율의 세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마6:24)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 하느니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는 앞부분을 직역을 하면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입니다. 진리 안에서 하나님 말씀의 섬김을 받든지, 율법 안에서 그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밝히고 계십니다. 인간에게는 하늘의 주인과 땅의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인간은 땅의 주인을 섬기도록 태어납니다. 지배와 피지배, 계급과 굴종의 패러다임 안에서 자기보다 힘이 있고 능력이 있으며 큰 존재라 여겨지는 존재 앞에서 한껏 쫄아 주는 것이 땅의 종들의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힘센 신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을 재량껏 얻어내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그게 유한 존재의 절망적 한계인 것이며, 원죄적 욕망이라는 것이며, 선악과 패러다임에 매인 아담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들의 주인은 세상 임금입니다.

 

그러한 자들 중 어떤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집니다. 그들은 지배와 굴종의 패러다임 아래에서의 힘만 센 왕이 아닌, 긍휼과 자비와 사랑으로 섬기시는 거룩한 왕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그 왕을 자신의 주인으로 영접합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선물로 받아 영생에 이르게 되는 반면에 전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서의 하나님을 지옥의 주인으로 맞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늘(진리)을 주인으로 가진 사람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무한의 일자가 유한 존재의 영역 속으로 들어와 당신을 계시해 주시는 그러한 섬김의 모습으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오히려 그 섬김 앞에 자신을 헌신해 버리는 섬김 받는 종이 됩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를 섬기시는 분의 무한한 사랑으로 해석해 냅니다. 그러한 하늘의 종들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가 남아 있다면 그 단 하나는 하늘 뜻 중심에서 타오르는 찬란한 빛, 생명 영역에 참여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 생명을 누리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주인을 섬기는 자의 섬김 행위의 극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물질세계의 인간 관념 속의 ‘주인과 종’의 관계로 이해를 하고 그 분의 말씀을 지배와 피지배, 군림과 굴종의 관계 속에 던져지는 명령 정도로 이해를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권력과 지배의 욕망 속 세상 임금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해된 하나님을 재물(맘모나스)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금과 은으로 만든 성전을 그 금과 은의 내용으로 알지 못하고 그저 금과 은의 성전으로 섬겨 버리면 그게 바로 맘몬인 것입니다. 그건 허욕이라는 가짜 신의 이름입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들이 그들의 생 본능으로 갖고 사는 것, 그게 바로 허욕입니다. 그건 인간의 원죄적 실존의 한계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선함을 추구해 스스로 하나님같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뿌리 깊은 원죄의 욕망입니다. 그 욕망으로부터 발출된 종과 주인의 관계는 언제나 정죄와 심판, 꾸짖음과 책망, 자학과 가책, 억압과 지배의 선동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그러한 원죄의 포악이 지배하는 고통의 영역 속에 생명의 주인이신 말씀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말씀으로 새로운 생명 영역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맘몬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을 물질적 세상의 세계관으로 조작해 버리면 그게 바로 맘몬 신입니다. 인간들이 인간 가치의 상징적, 상대적 개념으로 만들어낸 것이 돈이며 재물이잖아요? 따라서 맘몬이라는 것은 단순히 돈이나 물질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보편의 원죄적 욕망을 축약한 개념인 것입니다. 인간 보편의 욕망이 창조해 낸 가짜 신인 것입니다. 그 신은 지배와 굴종의 패러다임 아래에서 섬김을 받는 신이고 명령을 내리는 신이고 인간 세상의 도덕과 윤리와 선과 악을 바탕으로 심판과 상급을 내리는 세상 신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걸 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아래의 물, 깊음, 어두움 속에서 하늘의 진리를 빛으로 깨달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냥 그 아래의 패러다임 속에 매몰되어서 그것들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이 두 개인 것입니다. 두 개로 보지만 그 두 개로 하나를 만들어내라는 것입니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각기 다른 것을 보고 다른 상을 맺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사람이 살 수가 없어요. 우리의 두 눈은 정확하게 하나의 상을 마음에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진리로 사는 이의 성한 눈인 것입니다. 우리는 두 눈으로 하나를 보고 두 귀로 하나를 듣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콧구멍으로 하나의 생기를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말을 해야 합니다. 그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호흡으로 들이마신 생명을 빛으로 내어 놓는 성도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레위기에 칠면석척이 부정한 짐승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칠면석척은 카멜레온을 가리킵니다. 그 ‘탄쉐메트’라는 단어는 ‘나샴’이라는 단어의 파생어인데 그 단어는 ‘파괴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칠면석척’은 색깔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로 변하는 그런 짐승입니다. 그런데 칠면석척이라는 놈의 문제는 정작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두 눈으로 각기 다른 것을 본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칠면석척은 혀로 살해를 하여 자신의 먹이를 챙깁니다. 두 눈으로 하나를 보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그 혀로 상대방을 죽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눈이 성해야 온 몸이 밝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눈은 성한 상태입니까? 아니면 고장 난 상태입니까?

 

주의 하세요. 나쁜 눈은 땅의 보물을 나쁜 양식으로 담게 하고 그것을 저주받을 혀로 전달하여 종국에는 그 혀로 생명을 살해하는 무서운 결국을 낳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