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똥덩어리, 죄덩어리, 흙, 벌레, 없음 등등 죄인의로서의 인식에 가용되는 이러한 용어들은 십자가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자신을 이러한 처지로 이해하고 그가 그 이해한 바를 사람들에게 표현할 수 있다면 그는 과연 이러한 표현들을 과감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우리가 너무나 잘 알듯 흔히 우리는 우리 내면의 일어나는 챙피함을 그 반대것으로 포장하여 내미는 심리학적 기술을 사용한다. 전혀 쿨하지 않은 소심한 남자가 자신을 쿨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신의 소심함을 그대로 내비치는 것과 같다. 전혀 사랑을 모르는 여자가 자신은 여러 남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사랑에 목마른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내면을 감추고 그 반대편의 긍정적인 효과를 충분히 타인으로 부터 얻어내기 위해 반댓말을 애둘러 표현한다.

자신을 똥덩어리, 괴물, 없음, 벌레등의 표현으로 일치시키는 사람은 오히려 자기가 얼마나 그러한 내용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인지 반증하는 결과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런 자신의 비참함을 보게 된사람은 감히 사람들 앞에서 저런 말들로 자신을 소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말로서 자기를 은유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침묵하고 하늘을 바라 볼 뿐이다. 누군가 말을 걸어 복음 앞에서 너 자신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는 어쩌면 겨우 한마디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게 사람들이 거창하게 위의 용어들로 자기표현을 인터넷 상에서 해대는 것을 보면 과연 그들의 인식이 정말 자신이 일치시키려는 저 용어와 같은 내용에 속해있는지 의문이든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의 틀(혹은 신학의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 나는 것이 있을 때에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 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과연 없음의 자리에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는 자기 비하이지 결코 성경이 말하는 자기 부인의 성격 아니기 때문이다. 이전에 나는 '자기 부인인가, 자신에 대한 절대적 부정인가?'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글은 그때의 내용과 는 약간 다른 목적으로 쓰여졌다. 즉, 이 글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신학적 사고의 틀에서 답습한 어떤 용어를 차용하여 사용할 때 그것을 그저 맹목적으로 아무 의미없이 자신들에게 대입하여 자신을 가학하는 모습들을 파헤치고자 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똥덩어리니, 없음이니, 벌레니 하면서 자기 비하를 하고 있나?
아니 먼저 그것이 왜 자기 비하로 밖에 성립될 수 없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기부인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지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람들에게 소개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주되심 뿐이다. 그리고 그런 주되심은 우리의 약함에서 나타나는 것이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강한 어조로 약함에 상응하는 용어를 차용하여 표현하는 방식에 있지 않다. 우리의 약함은 우리의 입을 다물게 하고 가만히 상고하게 하며, 더 간절하게 하며, 더 인내하게 한다. 우리가 간혹 신앙 위에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할 때에는, 자신이 평상시에 사용하는 가장 보편적인 용어로써 자신을 표현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자아의 탄식은 자아가 순수하게 인식하는 내용들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장 비참한 용어가 똥덩어리라면,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을 그렇게 소개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썼기에 그러한 신학적 메커니즘 안에서 그러한 표현들로 자기를 표현하는 것을 신학의 한 방향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엉뚱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비단 자기 비하의 용어들이랴?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신학적 용어들에서도 그렇다. 복음은 언제나 나의 복음이어야 하지 결코 너의 복음, 누군가의 복음이 되어선 안된다. 그런 복음과 고백들은 나와는 상관 없는 복음이며 나는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복음과 멀어져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만약 내 자신이 나를 사람들 앞에서 낮추고자 한다면 그건 일종의 자기 비하가로 성립 될 뿐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진심으로 통회하고 돌이키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면 그 때 나는 자기 부인이 된다. 곧 자기 부인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지 결코 사람들 앞에서 흔들며 요란 스럽게 떠드는 내용들이 아니다. 우리의 자기 부인은 골방에서 시작하며, 깊은 고뇌에서 시작하며, 처절한 절망에서 시작하며, 나의 죄 됨을 인식하는 곳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빛 앞에서 끊임 없이 내 숨겨온 어둠속의 온갖 배설물들을 확인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자기 부인은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 앞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들통나면서 진행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면서 우리가 얼마나 그 죽음을 직접 감당했어야 했던 자인지를 아는 그 송구스러움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의 자기 부인은 세리와 같이 입을 닫고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바라 볼 뿐이다. 걸어갈 때에도, 지하철을 탈 때에도, 운전을 할 때에도,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에도, 갑자기 밀려오는 그 송구스러움과 죄송스러움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며 눈물짓는 일뿐이다.

같은 용어를 말해도 그것이 사람들 앞에서 사용된다면 그것은 자기 비하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사용된다면 그때에는 자기 부인이 된다. 나의 고백이 사람들 앞에서 나의 신앙의 수준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나 방편이 되어선 안된다. 그러한 피상적인 고백은 '주여 주여'하는 자들과 다름 없음이며, 믿음과 상관없는 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된다. 우리의 말은 고백은 항상 주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뭐라하든 어떻게 바라보든 주 앞에서 우리의 고백은 늘 변함없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에게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며 살았고 세상 위에서 믿음의 여정을 잘 감당하였다. 우리의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왜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함과 동시에 자기 십자가를 지라 말씀 하셨을까? 자기 부인과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는 것 그 자체가 동일하기 때문 아니였을까? 나의 옛사람이 죽을 때 나는 부인된다. 또한 나의 옛사람이 다시 살아날 때 마다 믿음 안에서 자행되어야 하는 일이 자기부인이며 그것은 순수하게 지켜져야 할 믿음의 약속들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얼마전 캐리비안 해적에서 부제로 쓰인 명제다. 정말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 누가 속닥거려도, 넌 틀렸다고 해도, 넌 아니라고 말해도, 욕하고  비방해도,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오직 말을 하시는 분은 그리스도뿐이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자기부인을 당하는 자는 자신의 행동을 타인에게 결코 해명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