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한나 아렌트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아이히만의 잘못을 무사유라고 했습니다. 일부 인용합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중략-

최후 진술에서 그는 ‘[나치] 정부가 처방한 재평가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평범한것이고 심지어 우스꽝스런 것이라면, 만일 이 세상의 최고의 의지를 가지고서도 아이히만에게서 어떠한 극악무도한 악마적인 심연을 끄집어내지 못한다면, 이는 그것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직 거리가 멀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더구나 교수대 아래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생전에 장례식장에서 들었던 것 외에 생각해 낼 수 없었다는 것은, 그리고 이러한 고상한 말이 자기 자신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은 분명코 아주 일상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 그런데 그것은 교훈이지 현상에 대한 설명도 아니고 그에 대한 이론도 아니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파멸로 이끌어 가는지를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통하여 보고 깨달은 교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인간을 모르는 평가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사유하면 자신이나 인류가 파멸로 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은 아직도 인간의 사유가 어떠한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렌트가 일반적인 인간을 모른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유해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쟈크 엘륄은 세계적으로 사고하고 국지적으로 행동하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사유하라는 말일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고 합니다(6:6,8:21). 이러한 인간의 사유라는 것이 어떤 죄가 되는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살해한 자들이 극악무도한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무사유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사유하는 모든 것이 항상 죄 뿐임이 문제입니다.  인간의 모든 사유가 항상 악할 뿐임을 성경이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악한 사유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44)”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 사유하지 않음이 아니라 그들이 사유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저들을 사하여 달라고 합니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인 줄 압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일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편향된 사유를 진리로 여기고 있기에 온 세상에 요란함이 가득합니다. 자신의 사유, 모든 생각과 계획이 항상 죄뿐임을 아는 자들은 예수님만 믿습니다. 예수님만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과 그 말씀을 믿는 겁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 외에는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