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이장우 목사


이사야 1:1-9  고발당하는 이스라엘  1999. 6. 30.



이사야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사야의 활동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2,800년 전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누어진 상태에서 북이스라엘은 이사야의 사역 기간에 앗수르에 의하여 망하였고 남유다도 심각한 위기에 처하여 있습니다. 이때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스라엘을 향하여 고발합니다.


2절에 보시면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우리가 재판을 하기 위하여 고발을 할 때 증인을 부르는 것처럼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을 때에 증인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입니다.(신4:26, 30:19, 31:28, 32:1) 이중에서 한 곳만 찾아봅시다.


신명기 32장 1절입니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 지어다” 모세가 지금으로부터 약 3,4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마지막 설교를 할 때에 증인으로 하늘과 땅을 부르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이사야 선지자의 고발의 내용과 거의 같습니다. 모세와 이사야의 연도 차이는 약 600년 정도인데 600년 전에 예언한 그 말씀이 이사야 시대 때에 거의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사야 선지자 때뿐만 아니라 그전과 그후에도 여호와를 반역하는 모습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신명기 32:1-18절을 한 번 읽어봅시다. 6절에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냐 너를 지으시고 너를 세우신 아버지가 아니냐 너의 아비에게 물어보라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구원되어 왔는가를... 그 출애굽의 과정을... 그런데도 너희가 살찌고 배부르니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있었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약 600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 그중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고발을 받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 중심으로 성전을 고수하며 그래도 제사를 지내고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는 그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사정없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배은망덕한 일이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유다 백성들에게 짐승만도 못하다고 책망합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한다고 책망합니다. 커다란 소라도 주인집의 아이의 손에 끌립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인을 알아보는 것이지요. 짐승뿐만 아니라 새들을 비유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한 곳도 있습니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렘8:7)


(교원대학원 교수가 갈매기 알을 인공 부화하여 키웠더니 그 갈매기가 갈매기 무리와 함께 살면서도 교수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날아옴.)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체적인 죄목을 4절에서 말씀합니다. 범죄한 나라, 허물진 백성, 행악의 종자, 부패한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라고 책망합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고발은 더 무서운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은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 11절과 13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이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성전에서 무수한 제물을 바칩니다. 월삭과 안식일과 절기를 잘 지킵니다. 이러한데도 왜 선지자는 고발을 할까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이지요.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것은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식의 제물드림과 안식일지킴입니까? ‘내가 이만큼 제물을 드리고 날을 잘 지켰으니 하나님이 복 주실 걸?’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치 사사시대에 ‘미가’의 집에서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세웠으니 복 주실 걸,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사사기 17장 1-13절을 봅시다. 미가라는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은 일천 개를 훔치고, 어머니의 저주를 들은 후 은을 다시 내어놓는데, 어머니는 그 은으로 신상을 만들고 아들 중에 하나를 에봇을 만들어 입혀서 제사장을 삼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레위 소년 하나가 떠돌다가 그 집에 이르자 그가 레위 지파임을 알고 그 집에서 연봉으로 은 열 개, 의복 한 벌, 먹을 것을 제공하기로 하고 제사장을 세우고는 제사장 세웠으니 복 주실 걸, 하는 태도와 지금 이사야에서 유다 백성들이 제사를 많이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마찬가지의 생각이 우리 안에 가득합니다. 주의 은혜로 내가 복을 받는 줄을 모르고 나의 행위로 복을 받는 줄 아는 사람은 꼭 선지서를 다시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는데 실제 알고 보니 자기 욕심에 이끌려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유다 백성들은 얻어터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심히 맞았는지,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을 만큼 온통 상처뿐인데도 주께로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매는 돌아오라는 신호인데 그것을 거부하고 계속 더 맞으려고 기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사1:5-6)


그러므로 그 당시 이스라엘이 당한 형편이 7-8절입니다. 땅이 황무하고, 성읍은 적군이 쳐들어와 불에 탔고, 토지는 이방인에게 삼키웠고,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황량하였는가 하면 포도원의 망대처럼, 원두밭의 상직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께서 은혜로 남겨 두시지 않으시고 행한 대로 갚으셨다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바로 알고 나에게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돌아오라는 말입니까? 제사 지내고, 안식일 지키고 있는데 무얼 어쩌란 말입니까? 내가 지금 십일조 하고 주일성수 하는데 뭐가 잘못됐다는 것입니까? 그 대답은 신명기 8장으로 갑시다.


신명기 8:11-20절입니다. 애굽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잘나서도 아니요 수가 많음도 아니라 오직 주의 약속을 따라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구속함을 입은 그 의미를 잊어버린 제사는 그들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된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무엇입니까? 짐승, 그것도 정결한 짐승의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짐승을 누가 잡습니까? 제사 드리려고 끌고 온 사람이 잡습니다. 그때 짐승을 잡으면 죽을 짐승이 가만히 있습니까? 안 죽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목을 치고 각을 뜨면 온몸에 무엇을 뒤집어쓰고 갑니까? 피를 뒤집어쓰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사람의 자세는 어떤 것입니까? 내 대신 죄 없는 짐승이 죽었구나. 이것이 제사의 중심입니다. 이 정신이 빠져버린 제사는 자신의 욕심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의 의미를 상실한 제사를 주님께서 받지 아니하시듯이 오늘 우리의 모든 예배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더 깊이 알아가는 예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