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구약 안식일 신학과 현재적 하나님 나라

 

 

신현우 교수

 

1. 시작하는 말

 

지난 시간에는 구약의 안식일법이 어떻게 신약에 와서 영화되는가 즉 영적으로 완성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구약 안식일법의 노예해방 정신은 마귀의 올무로부터의 해방으로, 안식년의 빚탕감 또는 고엘제도는 예수께서 우리 죄의 빚을 대신 당하시는 고난과 죽음으로 갚으심으로, 희년의 기업 회복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심으로 영적인 차원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구약 안식일법이 신약에서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재적(육적)으로도 완성되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측면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2. 귀신 쫓음, 질병치유의 기업 회복적 차원

 

우선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도래의 증표로서 하신 사역인 귀신 쫓음은 현재적(육적)인 측면을 가집니다. 귀신들려 무덤 사이에서 살던 사람은 귀신이 나간 후에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5:19를 보면 예수님은 귀신으로부터 구출된 사람에게 upage eis ton oikon sour pros tous sous 즉 "너의 집, 너의 것들에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너의 것들'(pros tous sous)는 그의 기업 즉 토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축귀사역은 귀신들렸다는 이유로 가족과 고향 사람들과 자신의 집과 토지로부터 축출당한 사람에게 그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차원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질병치유도 기업 회복의 차원을 가집니다. 질병의 치유는 전염성의 병으로 인해 고향으로부터 축출된 병자가 이제 자기 고향,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나병환자는 진 밖에서 혼자 살게 명하였습니다. 레위기 13:45-46을 봅시다: "45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그런데, 나병환자는 병이 나으면 진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레위기 14:7-8을 봅시다: "7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놓을지며 8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영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이레를 머물 것이요."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신 것은(눅 5:12-13) 그에게 가족과 기업을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치유하시고 "집으로 가라"는 말씀을 덧붙이시는데, 이것은 질병치유가 기업 회복의 차원을 지님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2:11을 봅시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의 축귀사역과 치유사역은 자신의 기업인 토지에서부터 떠나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토지를 회복시키는 기업 회복의 측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미래적 기업인 새 땅의 약속과 함께 현재적인 기업인 땅의 회복이 예수님의 사역에 포함됨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구약 희년법에 의해서도 기업을 회복할 수 없었던 소외된 병자들까지도 기업을 회복할 수 있게 하는 희년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3. 신약의 현재적 기업: 교회 그리고 세상

 

우리는 전 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업은 미래적 하나님 나라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성도의 기업이 된다면, 성도 즉 교회는 하나님의 기업이 됩니다. 에베소서 1:11을 봅시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교회는 하나님의 기업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사도 바울의 신학은 구약에서부터 연속해 오는 것입니다.

 

신 9:26: "여호와께 간구하여 이르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량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을 멸하지 마옵소서."

 

신 9:29: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노라."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영원한 소유로 받고, 하나님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기업 즉 영원한 소유로서 지키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맺으신 새 언약인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된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와 함께 현재적으로 성도들에게 기업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입니다. 로마서 4:13을 봅시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을 하나님의 자녀들은 또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세상을 상속받을 세상의 후사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이 기업으로 주어졌다면, 모든 민족으로 구성되는 새 언약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에게는 하나님 나라와 함께 온 세상이 주어진 것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이 후사로서의 권세를 가지고 이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기까지 전투하는 전투적 교회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15를 읽어 봅시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통한 죄사함은 인간의 구원과 함께 저주 받은 땅의 회복을 가져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과 함께 회복될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17을 봅시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구원받은 인간과 함께 이제 저주 받은 세상은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4. 구약 안식일법의 신약적 완성

 

〈안식년과 재물의 상대화〉

 

안식년이나 희년에는 땅을 쉬게 해야 했습니다.(레 25:4, 11) 그런데, 경작을 하지 않고 한 해를 보낸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을 필요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여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이는 땅을 쉬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하는 인간의 염려를 내다보시고 그러한 염려를 버리고 담대하게 안식년과 희년을 지킬 것을 명하십니다.

 

레위기 25:20-21을 봅시다: "20 만일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21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동일한 내용의 말씀을 발견합니다. 마태복음 6:31을 봅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태복음 6:25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구약의 안식년과 희년 준수는 재물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신약에서도 재물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는 가르침은 연속됩니다. 마태복음 6:24을 봅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신약은 한 걸음 더 나가서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하면서 구약의 안식년의 정신을 철저화합니다. 마태복음 6:19-20을 봅시다: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나아가 예수님은 아예 재물의 상대화 정도가 아니라 포기를 명하십니다. 누가복음 14:33을 봅시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재물을 소유하는 자의 자리에서 관리하는 자로 물러서야 할 것입니다.

 

〈빚탕감과 나누어 줌〉

 

"매 칠년 끝에는 면제(즉, 빚을 탕감)하라"(신 15:1)는 구약의 안식년 빚탕감법은 신약으로 오면서 예수님의 말씀에서 더욱 철저하게 발전하여 완성됩니다. 빚탕감법을 완성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빌려줄 때 받을 생각을 말고 주라고 하셨습니다. 즉, 빌려줄 때 바로 탕감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식년에만 빚을 탕감하는 구약을 더욱 철저하게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35을 봅시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누가복음 6:30도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나아가 예수님은 이렇게 동시에 빚을 탕감하면서 빌려주는 것, 즉 구제하는 것을 자랑하지 말고 남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6:4을 봅시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빚탕감을 일상화시키는 것, 즉 구제로 안식년 빚탕감법을 완성시키는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율법의 완성은 더욱 철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막 10:21)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마 19:21).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눅 18:22)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눅 12:33).

 

빚을 탕감하는 것이 힘듭니까?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더 무겁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구약 안식일보다 더욱 지키기 힘든 완성된 율법입니다. 이처럼 신약은 구약을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완성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을 통하여 율법적으로도 완성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명하신 소유를 포기하는 구제는 초대교회에서 ‘코이노니아’를 통해 실천됩니다.

 

〈구약의 토지 반환과 신약의 토지 소유의 포기〉

 

신약으로 와서 하나님 나라가 구원받은 성도들의 기업으로 약속되면서, 땅의 기업적 의미는 약화됩니다. 그리하여 땅을 팔지 말라는 구약의 토지법(레 25:23)과 상반되게 신약시대에는 복음을 위하여 땅은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마가복음 10:29-30을 봅시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루살렘 교회는 실제로 땅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었습니다. 사도행전 4:34-35을 봅시다: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물론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구약의 토지법을 지키기 위해 임시로 땅을 팔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빚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핍절한 자들을 돕기 위해서 땅을 임시로라도 파는 것은 구약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차원 높은 행위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구약의 토지법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서 과거에 균등하게 분할된 기업으로서의 토지가 이제 소수에게 몰리고 많은 사람들이 기업을 상실한 상황에서 토지를 가진 자들이 그들 본래의 기업 이상의 토지를 팔아서 기업을 상실한 자들에게 주는 일을 자발적으로 실행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 강조하신 "네 소유를 팔아서 주라"는 명령도 토지가 가장 중요한 소유인 시대에 기업된 토지를 상실한 자들에게 토지를 거저 주라는 명령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우리에게 기업을 잃은 자에게 토지, 기업을 회복시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조건으로,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으로부터 기업으로 받는 조건으로 제시되었을 것이라고 구약 토지법을 통해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다" 팔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의 강조를 위한 과장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드러운 해석도,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와 교회에 결코 부드럽지만은 않은 과격한 명령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사회와 교회에게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소유 중에 평균 이상의 소유를 다 팔아 내어놓으라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날 사회에 과감한 사회복지 정책을 명합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교회가 이 땅의 기업인 토지를 상실한 자들에게 기업을 회복시키는 일을 할 것을 명합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 국가적으로는 지대조세제를 통한 복지정책으로, 사회적으로는 자발적인 하비타트운동이나 토지신탁운동 등으로, 교회적으로는 공동체 운동이나 빈자구제운동 등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5.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율법 완성적 측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측면에서 구약을 완성하면서 동시에 구약의 율법의 정신을 완성하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의 증표인 귀신 쫓음이 기업 회복의 차원을 가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기업이며, 교회의 기업은 하나님 나라와 함께 세상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구약 안식년법이 신약에 와서 재물의 상대화 내지는 포기로, 구약의 빚탕감법이 재물을 포기하는 구제로 완성되며, 구약의 희년에 일어나는 토지 반환이 신약에는 토지 소유의 포기를 통한 빈자구제로 완성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적(현재적)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래에만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에만이 아니라 사회에도 하나님의 통치영역이므로 임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도래할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시간을 뚫고 지금 역사 속으로 들어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시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또한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에게 우리의 땅을 팔아 기업으로 준 것처럼 우리의 죄의 빚을 사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