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과 안식일(1) (막 2:23-26)

신현우 교수

1. 시작하는 말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안식일 전통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 전통을 배경으로 마가복음 2:23-26을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시간에 겨우 네 절을 다루냐고 하실 분도 계실 텐데, 깊이 다루려면 네 절도 많으므로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이라는 거대한 하늘을 보기 위해서는 창을 통해서 보는 방법도 있지만 작은 바늘구멍에 눈을 대고 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비록 바늘구멍이라도 눈을 바짝 대고 보면 시야 전체가 보일 수 있지만, 큰 창문이라도 멀리 떨어져서 보면 하늘의 일부만 보일 것입니다. 성경처럼 심오한 책을 이해하려면 몇 절을 깊이 연구하여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구절들이 연결되어 열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수박겉핥기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전체를 보는 방식의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려면 현미경으로 한절 한절을 연구하기도 해야 합니다. 자 그러면 현미경으로 한 절 한 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 마가복음 2:23

 

(번역) “안식일에 그분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그 제자들이 길을 만들기 시작하며 이삭을 훑으니”

 

〈호돈 포이에인 1〉

 

"호돈 포이에인"이란 헬라어 원문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길을 가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비슷한 표현이 70인경 사사기 17:8에 "길을 가다"란 뜻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표현은 마가복음에서는 문자 그대로 "길을 만들다"는 뜻으로 쓰였다고 봅니다. 개역성경의 "길을 열며"라는 번역은 매우 잘된 번역이라고 봅니다. "길을 만들다"는 표현에는 복음서 기자의 깊은 신학이 담겨있습니다.

 

"호도스" 즉 "길"이란 용어는 마가복음에서 세례 요한의 사명과 관련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예수님을 위해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길을 닦는 것, 또는 길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막 1:2-4을 봅시다: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막 1:2-3에서 "길"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마가는 예수님을 "주" 즉 "여호와"(야훼)로 소개합니다.

이사야 40:3을 봅시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즉 막 1:3의 "주"는 이사야 40:3의 "여호와"의 번역어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고 그 "주"가 예수님이라면 예수님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또한, 말라기 3:1을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은 "언약의 사자"와 동일시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 3:1을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하-아-도온)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여기서 "주"는 "여호와"의 번역어가 아니고 말 그대로 "주"란 단어 ‘하-아-도온’의 번역어입니다.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가진 세례 요한이 "내 사자"라면 예수님은 "언약의 사자"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 즉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을 지금 제자들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보다 앞서 가며 예수님이 가실 길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림을 통해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 즉 그리스도인들을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이 시대의 세례 요한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재림의 길을 예비하며 산다면 우리는 참으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세례 요한처럼 담대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호돈 포이에인 2〉

 

유대인들의 책 미쉬나 산헤드린 2:4은, 왕은 "길을 만들기 위하여 [누구의 사유지든지] 뚫고 지나갈 수 있고, 아무도 그에게 항의할 수 없다."고 합니다. 만일 이 전통이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도 적용되었다면, 마가복음 본문은 여기서 예수님 또는 제자들을 왕으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3. 마가복음 2:24

 

(번역) “바리새인들이 그분에게 말하되 ‘저들이 하지 못할 일을 안식일에 어떻게 행하는지 보시오!’”

〈하지 못할 일을 안식일에〉

 

개역 성경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로 원어를 번역했는데 저는 "하지 못할 일을 안식일에"로 순서를 바꾸었습니다. 원어의 "포이우신 토이스 사바신 호 욱 엑세스틴"의 순서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무언가 행했는데 그 일이 하지 못할 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하지 못할 일"은 주중에도 하지 못할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는 것과 "하지 못할 일을 안식일에 했다"는 것을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럼 제자들이 한 "하지 못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길을 만드는 일을 한 것을 지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은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주중에도 "하지 못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중에 밀밭을 뚫고 길을 만드는 것이 "하지 못할 일"이라면 거룩한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구나 "하지 못할 일"을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라는 말을 강조하려고 덧붙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하지 못할 일"은 이삭을 훑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 살핀 대로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전통이 금하는 행위였을 것이기 때문이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답변은 길을 만드는 것에 대한 것과는 별로 관계없기 때문입니다.

 

〈보시오〉

 

바리새인들의 지적은 경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 살핀 대로 안식일을 어기는 사람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의식적으로 안식일을 어길 때에는 처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고 후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병자를 고치신 것(막 3:1-6)은 만일 이 두 사건이 동일한 날에 일어났을 경우 그래서 의식적으로 안식일을 어긴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죽이려고 의논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전통의 잣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위를 평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이삭을 훑는 것이 과연 추수에 해당하는 일이냐는 것은 의문이 있습니다. 신 23:25을 봅시다: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손을 사용하여 이삭을 따는 것이 낫을 사용하는 것과 구분되는 것을 볼 때 손으로 소량의 이삭을 따는 것은 추수가 아니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손으로 이삭을 딴 제자들의 행위는 안식일을 어기는 경제적 노동행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누구에게 팔려고 추수를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배고픔을 달래려고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호흡이나 심장의 박동, 소화 작용처럼 생존을 위한 움직임의 범위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의 전통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우리는 전통을 검토하지 않고, 옳다고 단정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사람이 오류에 빠질 수 있듯이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전통이라는 잣대가 오류로 가득할 수 있다는 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시대의 노예가 되고 전통의 노예가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바로 시대의 노예, 전통의 노예인 줄도 모르고 당당하게 감히 예수님 앞에서 제자들의 행위를 불법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4. 마가복음 2:25-26

 

(번역) “그분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사람들이 핍절하고 주렸을 때에 무슨 일을 했는지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대제사장 아비아달 때에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제사장들 외에는 먹지 못할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다윗은 진설병을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집 즉 성전과 관련된 율법을 어겼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지 바리새인들의 전통을 어겼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다윗의 행위가 양해될 수 있다면, 제자들이 바리새 전통을 어긴 행위는 더욱더 양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다윗은 생명의 위기에 있었으며 제자들은 단지 배고플 뿐이었다고 지적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어긴 것은 율법이고 제자들이 어긴 것은 바리새 전통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특수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당시 바리새 전통이 안식일에 금식을 금한 것을 공부했습니다. 그렇다면 먹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굶주린 제자들은 바리새 전통을 존중하려고 했어도 금식금지와 이삭 자르기 금지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이 그대로 굶었으면 바리새인들은 왜 안식일에 금식하느냐고 지적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2:5은 예수님의 논증을 좀 더 명확하게 합니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 이 말씀은 성전법이 안식일법보다 더 높은 상위법임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성전법에 속하는 진설병취식금지법을 어긴 다윗의 행위가 그의 배고픔 때문에 양해된다면, 그보다 낮은 법인 안식일법을 다시 해석하여 적용한 바리새 전통을 어긴 제자들의 행위는 더더구나 그들의 배고픔 때문에 양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아비아달 때에〉

 

삼상 21:1절 이하에 의하면 당시 대제사장은 아히멜렉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표현은 아히멜렉이 아비아달의 아들이라는 구약의 구절들(삼하 8:17; 대상 18:16; 24:6)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아비아달은 예언의 능력을 받은 자로서(삼상 23:6-12; 30:7-8) 성령을 받고 예언을 하신 예수님(막 1:10; 13:4-27)과 비교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되어 사용되었을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 예수님〉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위는 다윗의 행위에 비교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다윗에게 비교된 것입니다. 다윗처럼 제자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제자들은 다윗처럼 대적의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미래의 왕인 것처럼 제자들 즉 그리스도인들도 미래에 왕으로 등극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왕으로 제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 11:1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에 비추어 볼 때, 제자들은 다윗보다 더 큰 자들로 간주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다윗보다 크고 천국에 속한 제자들이 세례 요한보다 크다면 당연히 제자들은 다윗보다 클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굶주릴 수 있습니다. 또 박해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신분을 망각하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세상을 통치할 왕의 신분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분 자각은 우리가 경제적 재난이나 정치적 박해를 당해도, 억울하게 쫓겨 다니며 배고픈 피난의 길을 갈지라도 우리 영혼이 참으로 안식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다윗에게 진설병을 준 대제사장에 비교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성전법에 금지된 진설병을 굶주린 다윗이 먹도록 허락한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이 바리새 안식일 전통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대제사장보다 더 큰 분으로 여기는 신학이 깔려있다고 본다면 본문의 논증은 더욱 설득력이 있게 됩니다: "대제사장이 다윗이 율법이 금한 진설병을 먹도록 허락했다면, 하물며 대제사장보다 더 큰 이가 단지 바리새 전통이 금한 밀 이삭 잘라먹는 일을 허락하지 못하겠느냐?"

 

본문 속에는 여러 가지 암시가 있습니다. 언약의 떡인 진설병(레 24:8)을 다윗에게 준 대제사장이 죽임을 당한 것처럼, 예수님도 미움을 당해 죽임을 당하고 그리하여 새 언약의 떡을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막 14:22)

 

레 24:8: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막 14: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우리는 굶주린 다윗이나 제자들이 먹은 떡이나 밀처럼 우리의 굶주림을 해소시키시는 것이 예수님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마음에 영접하기 전에는 우리 영혼의 굶주림은 해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님은 굶주리고 쫓기는 다윗을 구하려고 진설병을 주고 사울 일당의 손에 죽임을 당한 대제사장처럼 우리의 굶주리고 쫓기는 영혼을 구하려고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것입니다. 이 생명의 떡은 본래 죄 많은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지만 예수님은 미리 죽임을 당하시면서 이 떡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마귀의 손에서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떡을 먹고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5. 맺음말

 

영혼의 안식을 얻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리새 전통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한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곳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관습을 무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교회의 관습 중에도 바리새적인 전통을 과감히 무시하고 개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때 우리 영혼이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신분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가 비록 세상 관습을 무시하고 바리새적 종교 전통을 개혁하는 삶을 살 때 당하는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고통을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그리스도와 함께 온 세상을 다스리는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미리 기름 붓고 택한 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허락하여 주시는 생명의 떡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전통에 어긋난다고 하며 거절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를 제자들과 일치시키며 본문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르게 한 번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혹시 우리는 바리새인 역을 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저기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만든 각종 전통을 가지고 저울질하며 무죄한 자들을 정죄하고 박해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가진 전통이나 신념체계는 혹시 바리새 전통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너무 쉽게 나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며 어쩌면 주님의 참 제자의 길을 가는 자들을 박해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우리는 교만하게도 기록된 성경말씀에도 대항하며 우리의 생각이나 교리를 옳다고 강조하지는 않는가요? 우리가 이러한 인본주의적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 시대의 바리새인인지도 모릅니다.

 

이 바리새인이 살 수 있는 소망은 오직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 받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바리새 집단으로부터 따돌려지고 왕따가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한 때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변화 후에 "미쳤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의연히 그 길을 전혀 외로워하지 않고 걸어갔던 것입니다. 세상이 다 미쳐 돌아갈 때 제 정신이 되려면 세상의 눈에 미친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미친 세상이 주는 사상적 관습적 문화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의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의 영혼은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