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과 안식일(1) (마 12:5-7)

신현우 교수

1. 시작하는 말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마가복음 2:23-28을 통해 예수님의 안식일 신학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시간부터는 마태복음 12장의 병행구절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당연히 우리 중에 어떤 분은 왜, 같은 안식일 밀 이삭 논쟁을 또 다루느냐는 의문을 가지실 터인데, 그 이유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비슷한 본문을 마가와 마태 그리고 누가에게 주셨는가와 같을 것입니다. 건축을 하려면 청사진이 필요합니다. 이 청사진에는 대개 정면도, 측면도, 윗면도가 함께 필요합니다. 그래야 실제의 건물을 어떻게 지어야 할 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입체를 평면에 그릴 때는 이처럼 여러 측면에서 보고 그것을 머릿속에서 종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가 4개나 우리에게 주어진 것도 입체이신 예수님을 평면적인 언어로 묘사를 제대로 하기 위한 방안인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기사를 복음서 여기저기서 연구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입체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위해 우리는 한 눈으로 성경을 보면 안 됩니다. 입체를 보려면 최소한 눈이 두 개 있어야 합니다. 한 눈으로 보면 원근 감각이 없어서 입체로 보이지 않게 됩니다. 두 눈으로 보면 오른 눈과 왼눈에 보이는 것이 각도의 차이로 인해 조금 다르기 때문에 입체를 머릿속에서 재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마태복음이라는 다른 눈을 통해 예수님을 관찰하여 예수님을 입체로 만납시다!

 

2. 마태복음 12:5

 

마태복음에는 마가복음이라는 정면도에 없는 측면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 12:5-7입니다. 이 부분은 마가복음에는 없는 부분입니다. 우선 이 부분을 5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개역개정)

 

그러면 우리는 읽어 보았나요? 혹시 못 읽으셨거나 기억이 안 나시면 지금 읽어 보겠습니다.

 

민 28:9-10: "9 안식일에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두 마리와 고운 가루 십분의 이에 기름 섞은 소제와 그 전제를 드릴 것이니 10 이는 상번제와 그 전제 외에 매 안식일의 번제니라."

레 24:3-9: "3 아론은 회막 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8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9 이 떡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안식일에 성전 안에서 제사장들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안식일법에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느 법이 더 크다는 것일까요? 안식일법인가요, 성전법인가요? 예, 성전법이 안식일법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Robert H. Gundry는 그의 마태복음 주석에서 이 점을 잘 지적했습니다.

 

이 말씀이 도대체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훑어먹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제자들이 지금 성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제사장인 것도 아닌데요? 그래서 학자들은 이 말씀이 제자들이 새 언약 시대의 제사장들로서 새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일하고 있으므로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없다고 해석해 왔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신학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좀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다음 구절을 연구해야만 이 구절의 뜻이 좀 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3. 마태복음 12:6

 

(번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것이 여기 있느니라."

 

개역성경은 "더 큰 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많은 학자들은 이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헬라어 meizon은 중성이므로 "더 큰 것"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이 중성을 남성과 다름없는 것으로 혼동하며 지금까지 약 2,000년간 해석이 진행되어 왔는데, 스위스의 탁월한 신학자 Ulrich Luz는 그의 마태복음 주석에서 그 동안의 해석의 방향을 뒤바꾸며 "성전보다 더 큰 것"은 다음 구절에 나오는 "자비"임을 잘 지적했습니다.

 

마 12:41의 "플레이온 요-나-"도 pleion이 중성이므로 "요나보다 더 큰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마 12:42의 “pleion Solomo-nos”도 역시 "솔로몬보다 더 큰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더 큰 것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선포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 즉 euaggelion은 중성이므로 성이 일치합니다. 요나는 이방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며 이방인 선교를 했고, 솔로몬은 남방 여왕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전하며 이방인 선교를 했으나, 이제 예수님은 모든 이방에 땅 끝까지 전파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고 계십니다. 이런 이방 선교는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인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는 가장 크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보다 더 큰 것이 안식일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5절에서 성전법이 안식일법보다 더 큰 것을 파악했습니다. 성전법이 안식일법보다 더 크므로 성전은 안식일보다 더 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보다 더 큰 것은 또한 더군다나 안식일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파하시는 하나님 나라 복음은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으로서 성전보다 더 큰 것이므로 안식일보다 더군다나 큰 것이며, 따라서 안식일법을 능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복음 또는 자비가 도대체 제자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제자들은 지금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 안식일을 범할 수 있다는 것인가요?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다음 구절을 공부하겠습니다.

 

4. 마태복음 12:7

 

(번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들을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말씀은 자비가 제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호세아 6:6의 인용입니다.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원하지 아니하며"는 바로 뒤에 나오는 병행구절의 "보다.... 원하노라"와 관련시켜서 생각하면 "덜 원하며"의 뜻을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미워하며"라는 복음서의 표현도 "덜 사랑하며"의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곧 덜 사랑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만일 참으로 부모를 미워하는 것을 뜻한다면 이것은 구약의 계명에 어긋나고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비가 제사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또한 제사가 드려지는 성전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이 안식일보다 중요하므로 자비는 더군다나 안식일보다 중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비가 안식일보다 중요하다는 결론이 본문 뒤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자비가 안식일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배고픈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훑어 먹는 것을 용납한 예수님의 자비로운 관용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자비의 정신은 안식일 계명의 기본 정신이기도 합니다. 안식일은 애굽에서 안식일이 없이 평생 죽을 때까지 매일 중노동에 시달리는 이스라엘에게 쉼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창조 후 쉬신 하나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안식일의 하나님 닮는 정신은 또한 이스라엘을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자비를 닮는 것으로 실천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집안의 종들이나 나그네들도 쉬도록 하는 자비를 행해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잃어버린 것은 바로 안식일의 본질적인 정신인 자비였습니다. 그들은 이 정신을 잊고 안식일을 형식적으로 지켰습니다. 그 결과 안식일을 지키는 열심이 오히려 타인들에게 무자비하게 행하는 결과까지 낳게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먹을 것이 없이 유랑하는 나그네 된 제자들에게 그들의 규칙대로 먹을 것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무자비하게 밀 이삭을 훑어내어 먹는 것을 추수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전통을 어긴 것에 불과한 제자들의 행동을 자기들의 전통을 하나님의 율법과 동일시하며 불법이라고 지적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계명을 지키려고 자비의 계명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한다면 바리새인들은 그보다 한 참 더 중요한 자비의 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다가 예수님께 그들의 눈에 든 나무토막을 지적당한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려다가 오히려 더 큰 정죄를 당한 것입니다.

 

〈자비〉

 

이처럼 자비는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비의 강조는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따라서 기독교 윤리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또한 율법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마 23:23을 봅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기서 "긍휼"이 바로 자비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자비는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죄인들에 대한 사랑, 병자들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 가난하여 빚진 자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 등으로 나타납니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20: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마 18:32-33: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종합하여 마태복음에서 자비란 "이웃에게 긍휼의 표현으로 선을 행함"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뜻은 마 12:7의 병행구절인 마 12:12에서 분명합니다. 여기서는 자비를 "선을 행함"으로 규정하고 있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병자를 고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2)

 

이러한 마태복음에서의 "자비"는 구약의 자비 즉 ‘헤세드’의 뜻과 일치합니다. 사사기 8:35, 삼하 2:5-6에서 자비는 선행을 뜻합니다.

 

삿 8:35: "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이 이스라엘에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아니하였더라."

삼하 2:5-6: "5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6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마태복음은 이웃에게 베푸는 자비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는 자비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외면하고 오직 하나님께 와서 제사를 드리기만 힘쓰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심판을 베푸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제사 드리는 노력은 이웃을 소홀히 할 때 소용없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병든 자, 가난한 자, 무시당하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일한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 자비를 잃어버리고 거룩한 체하는 외식으로 가득 찬 종교집단으로 전락할 때에는 자비의 법을 어긴 바리새인들이 당한 질책을 동일하게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5. 맺음말

 

우리는 이 시간에 안식일법의 본질이 하나님의 자비를 본받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자비를 상실한 안식일 전통보다 고통당하는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자비를 행하는 것을 예수께서 더 기뻐하심을 보았습니다.

 

자비를 외면하고 전통을 고집하며 남을 무시하며 정죄하는 바리새주의는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다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바리새주의는 인간본성에 내재하여 있다가 어느 시대에든지 계속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가 바리새 기독교로 전락해 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기독교가 한 때 그렇게 되었을 때 유럽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다시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성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남의 입장을 고려하는 자비와 긍휼보다는 자기를 고려하여 이기적인 행동을 합니다. 이것은 약자에는 보호 본능으로 나타나지만 강자에게는 특권사수로 나타납니다. 이 자기중심성을 타인중심성으로 바꾸는 개인 개혁과 자기 집단 중심성을 다른 집단을 고려하는 이타성으로 바꿀 때, 거룩한 그리스도인과 거룩한 공교회는 회복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타성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아가페 사랑의 세계관 속에 미래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무식한 자, 비천한 자, 가난한 자, 멸시 당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쌍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무자비한 자들은 예수님도 무자비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또한 비천한 자들을 긍휼히 여긴 자비로운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맛보며 고백할 것입니다.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마 25:37-39)

 

그때 주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