Ⅷ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과 안식일(2) (마 12:8)

신현우 교수

1. 시작하는 말

 

이 시간에는 계속 마태복음을 다루겠습니다. 지금 공부할 본문은 마태복음 12:8 한 절입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2:28과 거의 동일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서 다른 각도에서 조명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입체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거의 동일한 말씀이 다른 각도를 가지는가 하면 약간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이고, 또한 문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각 복음서의 문맥은 그 사이에 담긴 말씀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당시 역사적 배경도 연구하고, 한 절 한 절 현미경으로 보기도 하겠지만, 또한 앞뒤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이렇게 앞뒤를 잘 살피는 것은 신학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성경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고 헬라어 성경을 읽지 못해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앞뒤를 분별하는 것은 참으로 많은 소득을 얻게 합니다. 제가 참으로 권장하고 싶은 방법입니다. 그러면 마태 각도에서 본 예수님 말씀을 현미경과 망원경을 동시에 사용하여 살펴보겠습니다.

 

2. 마태복음 12:8

 

(번역) "왜냐하면,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이니라."

 

〈인자〉

 

'인자'란 용어가 '그 사람의 아들'이므로 이것은 인간을 가리킨다는 주장이 돌아다니고 아직도 그것을 믿고 있는 학자들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어떤 용어든지 그 용어를 사용한 사람이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가를 살피지 않고 의미를 사전적으로 규정하면 안 됩니다. 사용자가 용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가는 사용 용례를 관찰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인자'는 마가복음에서처럼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자대신 "나"라는 용어로 바꾸면 뜻이 정확하게 통하게 됩니다. 왜 하필 '나'를 가리키려고 '인자'란 용어를 쓰셨을까요? 아마도 김세윤 박사의 주장대로 이 용어가 가질 수 있었던, 메시아를 드러나지 않게 암시적으로 지시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일 것입니다.

 

마 16:13: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6: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26:23-24: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마 26:45-46: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처럼 마태복음에서 인자는 '나'와 같은 뜻이라면, 마 12:8은 다음처럼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므로,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여기까지는 마가복음에서와 동일합니다.

 

〈안식일의 주인〉

 

그러면 안식일의 주인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마태복음에는 '주인'이란 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 9:38에는 "추수하는 주인"이란 말이 나오는데 직역하면 "추수의 주인"이란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여기서 "추수의 주인"이란 핀란드의 젊은 신학자 Back이 주장한 것처럼 "추수를 감독하는 사람"이란 뜻일 것입니다. 렇다면, 안식일의 주인이란 표현은 안식일을 감독하는 사람이란 뜻일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감독하는 주권을 가지셨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가복음에는 인간의 안식일에 대한 주권에 근거했는데, 마태복음에는 그런 근거가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대신 다른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제 앞뒤를 좀 더 멀리 망원경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수님께 주셨다면 당연히 안식일도 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을 ‘나의 것’이라고 하실 수 있고, 당연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고 주장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권세를 받은 다니엘서 7:13에 나오는 ‘인자 같은 이’와 동일시하고 있고, 그래서 ‘인자’라는 용어를 더구나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안식일의 주인 주장은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의 전권대사, 즉 메시아라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에서처럼 논리적으로 누구나 될 수 있는 안식일의 주인 주장이 아니라 오직 메시아만이 할 수 있는 안식일의 주인 주장인 것입니다.

 

인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해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안식일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서 그러하고, 실제로는 인간은 안식일 계명의 통제 아래서 안식일의 노예로서 자신들의 행동을 안식일 계명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안식일의 주인으로 만드시려고 창조하셨지만, 타락한 인간은 안식일의 노예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초기 헬라 교부인 오리겐은 그의 마태복음 주석에서 이 점을 잘 지적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인간들처럼 안식일의 노예가 아니시다." 사도 바울은 안식일만이 아니라 율법 일반이 인간의 주인으로서 인간을 다스리고 있는 현상을 기록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롬 7:1)

 

마태복음에서는 메시아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 되셔서 안식일의 노예인 인간들을 해방시키시는 것입니다. 율법의 올무에서 우리를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거치지 않으면 창조 때에 비록 인간이 안식일의 주인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대상으로 창조되었고, 인간과 교제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 쉬셨다고 할지라도, 타락한 인간은 안식일의 주인이 현실적으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세주 예수님은 안식일의 노예된 인간들을 해방시켜 진정한 안식일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의 주인 예수님은 제자들이 ‘죄가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이처럼 제자들이 무죄한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었지만 8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이니라."

 

예수님은 안식일 위에 있기 때문에 안식일의 노예를 자유케 하실 수 있고, 그래서 무죄 선언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진설병을 먹을 특권을 가진 제사장들의 떡을 특권을 포기하고 굶주린 다윗에게 대제사장이 준 것처럼, 마치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한 안식일을 쉬는 날 없이 평생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처럼,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무거운 바리새 안식일 전통의 율법주의의 멍에 아래 신음하는 제자들을 풀어주시고 가벼운 자비의 멍에를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성전이 제사장에게 안식일에 일할 수 있게 허락하는 것처럼, 안식일의 주인 예수님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바리새 전통을 무시할 수 있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바리새인들이 아니고 예수님이시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안식일에 바리새인들의 전통을 따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비의 원리에 따라 바리새 전통의 무거운 짐을 지고, 피곤하고 지킨 무리들을 쉬게 하십니다.

 

3. 마태복음 11:25-30

 

마태복음 12:1-8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쉬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전후를 살펴봅시다.

 

마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영혼)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처럼 직전에 나오는 말씀과 연관 속에서 본문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무거운 짐"은 안식일 전통을 비롯한 바리새 전통들일 것이고, 예수님의 멍에 또는 짐은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자비"일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육체의 짐을 지면 안 되는 안식일에 ‘전통’의 무거운 짐을 지도록 함으로써 사람들의 영혼이 쉬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마 바리새 전통에 따라 안식일을 지킨 사람들은 다음날 정신이 피곤하여 하루 더 쉬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영혼의 안식을 없애버린 것은 안식일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무거운 돌을 날라야 하는 이스라엘을 쉬게 하시고자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자비로운 의도에 정면으로 위배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의 자비로운 의도에 따라 바른 안식일을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가볍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바른 원리를 간단히 제시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골치 아프게 세부조항들을 외울 수도 없게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원리는 자비의 원리입니다. 이것은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원리입니다.

 

출 6:6-7: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자비의 원리대로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쉴 수 있게 하십니다. 육체만이 아니라 마음도 쉴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짐이 가벼운 이유는 예수께서 이 짐 또는 멍에를 함께 지시기 때문입니다. 멍에는 소 두 마리가 함께 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암스테르담 크로스로드교회의 개종한 유대인 설교자인 브라이언 뉴만에 의하면, 예수님의 멍에란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 끄는 멍에란 뜻입니다. 예수께서 함께 멍에를 메고 가시므로 가볍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사망의 짐을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우시는 십자가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가벼운 멍에입니다. 이것은 나의 이기심을 못 박고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가벼운 멍에입니다. 예수께서 성령님을 통해 함께 메고 가시는 동역의 멍에인 것입니다.

 

이 자비의 멍에,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예수님과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성령의 위로를 받으며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이 평화와 안식을 찾기 전에는 우리 영혼은 그 어디서도 안식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영혼은 예수님을 찾아야 하는 목마른 영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멍에를 함께 매기 전까지 우리 영혼의 갈급함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설교자 휘필드는 설교 때마다 죽어가는 죄인들을 보며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울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비기독교인들을 볼 때 이러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살 뿐 아니라, 또한 병든 자와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 집을 떠나 헤매는 나그네들을 긍휼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본받을 때 영혼의 안식은 찾아올 것입니다.

 

4. 마태복음 12:18-21, 41-42, 50

 

마태복음에서 구체적으로 자비는 이방인 선교를 향하고 있습니다. 전후를 살펴볼 때 이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 12: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 12:41-42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이러한 말씀은 이제 니느웨 사람들, 남방 여왕에서 더 나아가 모든 이방 민족을 포함하는 이방인 선교를 하나님의 자비는 의도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방인 선교와 예수님의 가벼운 멍에 사이에 안식일 논쟁이 놓여 있는 것은 바리새 전통을 부수어야 이방인 선교가 효과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오늘 우리들에게 교회가 선교를 위하여 잘못된 전통들을 개혁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통이냐 선교냐를 선택해야 할 경우를 당하면 과감히 선교를 택하여야 합니다. 유럽의 교회들이 비어가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기 개혁을 하는 힘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교회들이 그래도 계속 살아남는 이유는 계속 변화를 추구하며 자기 개혁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교회들은 미국 신학을 많이 수입했으면서도 교회 형태는 매우 전통을 바꾸기를 거부하는 형태입니다. 경직된 미국 신학에 경직된 교회 전통이 조합되어서 매우 큰 위기가 올 수 있을 것인데, 벌써 교인이 늘지 않는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식 열린 예배도 안된다, 유럽신학도 안된다 하며 담임목회자 자리는 아들에게 물려주는 판이니 전도가 되겠습니까? 유럽처럼 뿌리 있는 신학에 미국처럼 변화할 수 있는 교회가 조합되는 대안에 한국교회 특유의 장점들이 조화된다면 혹시 이 난국이 타개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는 비기독교인들에게 자비를 행하며, 교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초신자들에게 관용하며 그들이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교회 분위기를 만들며, 카톨릭을 비롯한 다른 교파들에 대해서 관용하며, 과감히 잘못된 전통을 개혁하여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리게 해야 할 것입니다. 선교는 지상 명령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과업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선교를 막는 바리새적 교회 전통들을 찾아내어 고쳐야 할 것입니다.

 

5. 맺음말

 

참된 영혼의 안식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은 안식일 논쟁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바리새적 율법주의로부터의 해방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바리새 전통을 부수고, 우리에게 자비의 율법을 주십니다. 이것은 무거운 짐에 눌린 자들을 긍휼히 여기어 빼어내어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죄 짐에 눌린 자들을 예수께로 인도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짐에 눌린 자들이 쉴 수 있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을 억누르는 제도적 장치가 있다면 그것을 개혁하는 것입니다. 병든 자, 외면당하는 자, 외로운 자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비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자비를 베푸시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을 내리시고 또한 그들을 통하여 온 세상이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