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과 안식일(2) (막 2:27-28)

신현우 교수

1. 시작하는 말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예수님의 두 번째 대답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현미경의 도수를 좀 더 높여서 두 절만 집중적으로 관찰하겠습니다.

 

2. 마가복음 2:27

 

(번역)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되어진 것이니라. 그러나 아니니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되어진 것은...!"

 

〈되어진 것이요(egeneto)〉

 

제가 "되어진 것이요"라고 번역한 단어는 헬라어 egeneto입니다. 이 단어는 독일어로 말하자면 "werden" 동사에 해당하며 한국말에는 "되다"라는 말의 과거형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되다"라는 말에 여러 가지 뜻이 있듯이 egeneto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우선 egeneto는 "주어졌다"(was given)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은

"안식일이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니라. 그러나 아니니라! 사람이 안식일에게 (노예로) 주어진 것은..."

로 번역됩니다. 히브리어나 아람어에서는 "에게" "위하여"가 같은 단어 "le"로 표현되므로 예수님이 본래 아람어나 히브리어로 말씀하셨다고 본다면 이러한 번역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러한 번역은 또한 구약과도 일치합니다. 구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선물로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출 16:29: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겔 20:12: "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

 

이러한 번역이 적합할 경우, 이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의 출애굽기 주석 메킬타에 나오는 랍비 Semeon ben Menasha의 말과 일치합니다:

 

Mek. (출 31:14): "안식일이 너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너희가 안식일에게 주어진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랍비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했을 가능성은 없으므로, 예수님이 랍비 Semeon이 인용한 유대인들의 구전을 인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서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구전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을 논박하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차이는 오직 예수님은 '사람'이란 단어를 쓰셨고 랍비 시므온은 '너희'(이스라엘)란 단어를 쓴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로 보편화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은 마가복음의 맥락에서는 좀 더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마가복음은 egeneto라는 단어를 "주어졌다"라는 뜻으로 사용한 적이 없고, "왔다" 또는 "생기다(arose, was made)"라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막 11:19: "그리고 날이 저물매(저녁이 오니 egeneto)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막 4:37: "큰 광풍이 일어나며(ginetai)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그렇다면, 본문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니라. 그러나 아니니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은...!"으로 번역됩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의 문체를 고려했을 때의 본문의 의미입니다. 마가복음은 이 본문을 독자들에 전하는 것입니다. 즉, 안식일은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시려고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이 전하는 안식일 신학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만드신 의도를 창 2:2에는 하나님께서 쉬시기 위한 것이었지만, 후에 하나님은 그 안식일을 인간에게 주셨으므로, 결국 인간을 위해 안식일을 주시려는 의도로 만드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생각 또는 안식일 계명이 본래 인간을 위해 주어졌다는 인식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제도나 법률보다 인간이 더 중요하고 인간을 불편하게 하는 사회제도나 법률은 개혁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사회제도나 법률의 노예가 아닙니다. 그러한 법들이 소수 특권층을 위해 남용되고 대다수의 시민들을 억압하는 무기로 전락할 때는 법들이 본래 인간을 위한 것임을 구약과 신약의 정신에 의해 담대하게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을 남용하여 동포를 억압하는 무기로 삼았던 바리새인들의 거짓된 신학을 폭로하며 비판했습니다. 하물며 오늘날 국회에서 뚝딱거려 만든 인간의 법을 남용까지 하며 시민을 억압하는 무기로 삼는 위정자들과 인간이 만든 교리를 남용하여 성도들을 억압하는 무기로 삼는 현대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앞에 비판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유대교에서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선물이지만, 마가복음에서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온 인류에게 주시기 위해 만드신 선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의도에 근거하고 온 인류를 향하는 이러한 신학은 출애굽과 이스라엘의 형성에 근거하는 유대교 신학보다 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기독교 신학인 것입니다.

 

우리는 좀 더 근원적이고 좀 더 보편적이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정신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우리가 창조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창조 원리로부터 사고하기 시작하면 매우 기독교적으로 사고할 수 있습니다. 속 좁은 민족주의나 인종주의, 배타적 선민주의가 이러한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사고 앞에 용납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3. 마가복음 2:28

 

(번역) "그러므로 그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그 사람의 그 아들〉

 

옥스퍼드의 유대학자 Geza Vermes는 28절의 '인자'는 인간 일반을 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28절이 27절의 결론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아들"에 해당하는 아람어 "바르 에나쉬"가 사람 일반을 뜻하는 것으로 11QtgJob 26:2-3에 사용된 것은 이러한 주장을 지원합니다. 그러나 "바르 에나쉬"는 "나" 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로 예루살렘 탈무드나 탈굼 등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용례가 예수님 당시 아람어에도 적용된다면, 28절은 다음처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그러므로, 그 사람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그런데, 지금 '그 사람의 아들'이란 용어가 마가복음에 나타났으므로, 마가복음에서 이 용어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가를 살펴서 이 용어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가는 이 용어(그 사람의 아들)를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였습니다.

 

막 2:10-11: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막 14:18-21: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본문은 "그러므로 나는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라는 용어대신에 '그 사람의 아들'이란 용어를 사용하셨을까요? 김세윤 박사에 의하면 이 용어는 아마도 메시아 칭호로 사용되기 시작하던 용어였으므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은밀하게 암시하기 위해 사용하신 용어입니다.

 

〈안식일의 주인〉

 

그 사람의 아들, 즉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란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란 주장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 의하면 안식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레 23:3). 그러므로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주장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계시다는 주장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라는 용어를 통하여 자신이 메시아임을 암시하시고, 이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주장을 통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런데, 왜 예수님은 "또한"이란 말씀을 쓰셨을까요? 예수님은 안식일 외에 또 다른 것의 주인이라는 주장을 하셨는가요? 이 "또한"이란 단어의 이해를 위해서는 다니엘서의 도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단 7:13-14: "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서는 하나님께서 인자 같은 이에게 모든 권세를 주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인자 같은 이’라면 예수님의 권세는 또한 "안식일"에 대한 주권을 포함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본문에서 예수님의 권세는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권세,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 죄를 사하는 권세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막 1: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막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막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마가복음은 예수님께 말씀 해석, 귀신 제어, 죄사함의 권세 뿐 아니라 안식일에 대한 주권도 있음을 "또한"이란 용어를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한"의 의미는 제자들이 길을 만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공부한 것처럼 길을 만들 권세는 왕에게 있고, 이 권세는 땅에 대한 주권을 반영합니다. 또한 안식일에 대한 주권은 시간에 대한 주권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23절에 예수님의 땅에 대한 주권이 반영되어 있다면 28절에는 안식일 즉 시간에 대한 주권이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땅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또한" 시간의 주인이시라고 "또한"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이란 한 단어에 뜻이 참 깊기도 하지요? 그런데, 좀 더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일점일획까지 중요한 것입니다. 왜 현미경으로 성경을 보는지 조금 이해가 가시지요? 막 13:35의 "집 주인"은 막 13:26의 "인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막 13: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막 13: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여기서 "집"은 세상을 뜻하지만, "성전"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종말 예언을 시작하는 막 13:1-2에서 성전이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이 집 주인 즉 성전의 주인이면서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주장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의 의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다윗의 주입니다. 막 12:37을 봅시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그렇다면 본문 28절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주이실 뿐 아니라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의미를 담게 됩니다. 그 해석은 아마도 가장 적합한 해석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 이야기가 직전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해석은 또한 예수님의 논증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보여 줍니다: "다윗이 율법을 어기고도 양해될 수 있었다면, 다윗의 주인 그리스도가 단지 유대교 전통을 어기는 것이 허용되지 않겠느뇨?" 설득력이 있지요?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끝까지 인정하려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이 자기들의 안식일 전통을 어기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4. 마가복음 2:27-28

 

〈그러므로〉

 

27절과 28절은 "그러므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28절이 27절에서 추론된 결론이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어떻게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까? 이 두 절이 인과관계로 연결되려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명제가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명제를 내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대표 또는 사람 중의 한 명이 된 인자 예수님은 그 분이 메시아임을 바리새인들이 설령 인정하지 않더라도 역시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27절과 28절이 "그러므로"로 연결된 것은 인간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과격한 결론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이러한 과격한 인간의 안식일 주권 신학은 결국 기독교가 구약의 중심법인 안식일법을 상대화하고 대신 주일을 지키게 하는 성경적 뒷받침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현대 문명의 노예가 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느새 돈 버는 기계, 돈 쓰는 기계로 전락해 가고 있고, 여가 시간에도 역시 노는 기계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하나님을 닮아 만유를 지배하며 또한 쉴 수 있는 거룩한 존재임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쉬는 것이 불안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노예화되어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며 조용히 명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영화가 조용히 책을 읽는 것보다 좋습니까? 우리는 여유 있게 책을 읽으며 음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휴식의 공간을 우리의 삶 속에와 우리의 교회 속에, 우리의 사회 속에 제도화 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빈 시간을 하루 속에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빈 시간들을 지키는 규칙이 우리를 구속하여 우리가 다시 그런 규칙의 노예가 되어 결국 다시 우리가 시간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아들=아담의 아들〉

 

그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아담의 아들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헬라어역본인 70인경에서 '그 사람'이란 아담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27-28절은 다음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아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요. 아담이 안식일을 위해 창조된 것은 아니니라. 그러므로 아담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아담이 안식일의 주인이므로 당연히 둘째 사람 즉 아담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증 속에는 예수님은 새로운 인류를 시작시키는 새 아담이라는 암시가 있습니다.

 

5. 맺음말

 

우리는 본문에서 법률이나 제도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인간을 위하여 개혁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제도로 인간을 억누르는 전체주의 체제들이 무너지는 것을 지난 세기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21세기에 우리는 체제를 보수하는 사고를 버리고 인간을 위해 제도를 개혁하는 생각을 일깨워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이 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인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소수의 무리가 아닌 전 인류를 복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비록 소수가 미리 선택되어도 전체를 복되게 하려고 선택된 것임을 생각하는 보편주의가 예수님으로부터 온 기독교 정신이고, 창조와 아브라함 때에서 기원하는 근원적인 구약의 정신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자신의 특권을 위해 체제를 유지하려는 인간들이 세상을 복되게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온 세상 사람들의 복지를 생각하며 그들이 복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메시아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특권유지 장치를 만들기보다 메시아의 백성으로서 굶주린 자들에게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나누어주고 그들의 영혼이 살게 하고, 또한 육신의 떡을 나누어주어 그들의 육신도 살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진설병을 주고 죽임을 당한 대제사장과 굶주린 제자들이 밀 이삭을 먹는 것을 허락하고, 십자가에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거룩한 제사장의 무리가 걸어갈 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