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에 그레고리 비일의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라는 책이 새물결플러스 출판사에서 번역․출간되었습니다. 번역되기를 기대하였던 책인데, 직접 책을 훑어보니 역시 기대할만 했습니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성경에 나오는 우상숭배자는 그 우상을 닮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제는 ‘우리는 우리가 숭배하는 그 대상이 된다’.라는 의미인데, 번역되면서 제목이 바뀌었네요.^^

 

비일은 이 책에서 구약의 우상숭배 구절로부터 신약의 우상숭배 구절까지 성경신학적으로 추적하는데, 우상숭배 중에 특히 우상과 우상숭배자가 닮는다는 구절을 중심으로 세밀하게 해당 구절을 주해, 해설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 나갑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주 흥미로운 부분도 많이 있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 책은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몇 장만 간략하게 언급하겠습니다.

 

2장에서는 비일이 핵심 주장을 펼치는 도입 구절로서 이사야 6장을 언급합니다. 이사야 6장은 이사야 선지자가 환상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는 구절로 알려져 있는데,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도록 하라는 소명을 받습니다.

 

흔히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 말씀은 아무에게나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고, 택한 자만 깨달을 수 있게 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말도 맞는 말이지만 비일은 위 구절을 당시 우상숭배를 일삼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들이 숭배하는 우상처럼 눈감고 귀멀게 하라는 메시지를 선포한 것이라고 합니다.

 

4장에서는 이 우상숭배의 기원이 에덴동산의 아담으로 거슬려 올라간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창세기 1-3장에는 전혀 우상숭배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일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한 사건을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여야 하는 아담이 뱀의 형상을 반영한 것이고, 결국은 아담이 자기 자신을 숭배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다음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기원은 시내산에서의 금송아지 숭배 사건이었고, 이 금송아지 숭배 전통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바알 숭배로 이어지고, 북이스라엘에서 여로보암 왕이 단과 벧엘에 세운 금송아지 숭배까지 가게 됩니다.

 

6장 이하에서는 신약성경에서의 우상숭배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신약에서의 우상숭배는 무엇일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어떤 우상을 숭배한 것일까요? 여기서 비일은 아주 통찰력 있는 제안을 하는데, 구약의 금송아지 우상 숭배가 신약에서는 유대인들( 및 지도자들)이 철저하게 따르던 ‘전통’을 숭배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의 우상은 ‘전통’입니다. 구전율법이지요.

 

이 구전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토라(율법)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토라의 목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유대인들은 이 목표를 무시하고 오로지 문자적으로만 토라를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토라의 규정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각종 ‘전통’을 만들어낸 것이고, 이 전통은 자신들도 지키기 어려운 멍에였음에도 모든 유대인들에게 강요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하시면서 많은 부분을 비유로 가르치시는데,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는 이 이사야 6장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당시 우상숭배-전통에 빠진 유대인들은 이 비유의 말씀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죽은 ‘전통’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은 온전한 율법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 ‘전통’에 열심이었던 바울은 회심한 후 여러 서신서의 구절들을 통해서 구약의 우상숭배 구절을 인용하고나 암시하면서 이방인 뿐 아니라 유대인도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상숭배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던가, 아니면 참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을 경배하던가?

 

현대의 우리들에겐 무엇이 우상이겠습니까? 한국 교계가 표방하는 개혁주의가 우리의 또 다른 우상이 되어 있진 않습니까? 아니면 돈, 권력, 종교가 우리의 우상이진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