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한국 교회는 온통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교리적 전통일 뿐이다. 설교나 성경공부 이 모든 것들이 신자로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갖가지 율법들을 제시하면서 그대로 지켜 행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제자사역, 전도사역, 가정사역 세미나, 새신자 교육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훈련하고 교육하여 교인으로 만들려고 한다. 교회에서 시행하는 프로그램들을 적당하게 이수하면 신실한 교인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일들을 교회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이 선교 단체이다. 그래서 온갖 선교 단체가 학교로 직장으로 날뛰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대학생들과 직장인들을 설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각종 단계를 설정하여 그 단계를 거치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벌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제까지 교회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기한 느낌 때문에 많은 교인들이 선교 단체에 가입하여 열심히 구원을 얻는 방법을 터득하고자 한다.

 

애초부터 성령의 사역이라든지 주님의 십자가 사역은 안중에도 없다. 인간이 하지 않으면 주님도 일하실 수 없다고 못박아 놓고 있다. 우리가 소극적이면 성령께서도 일하시지 않는다고 우리의 의지에 성령을 묶어놓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 그것은 잠시 우리를 일깨워주는 역할에 불과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모두가 하등의 쓸데없는 이론에 세뇌되어 있어서 단체로 주님이 원하시는 길과는 반대로 달리고 있는 것이 선교 단체나 교회의 실정이다. 실로 그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다(롬 3:15).


인위적으로 모인 교회나 선교 단체에서는 애써 나온 자들에게 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심어주고 싶어한다. 다시 말해서 계속적으로 자기 모임에 나오도록 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만들어 낸 상품이 소위 말하는 '구원의 확신' 이라는 것이다. 계속 모임에 붙잡아 둘 근거를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으로 교인들의 정신을 장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의 모임에는 복음이 없고 성령이 일하시지 않기 때문에 민중들의 발목을 잡아둘 만한 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인들이 당을 만들어 놓고 세 불리기를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비정상적인 신앙인의 모습으로 치부한다. 심각한 것은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감정적인 면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뜨거운 신앙, 동적인 신앙, 열정적인 신앙이라야 좋은 신앙이고 바른 신앙이라고 말한다. 열심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예배당에 물질을 투자하고, 목사를 섬기며, 교회의 조직 유지와 발전에 헌신(?)을 하면 구원의 확신이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러나 목사에 대한 반감이 표출되며, 교회 조직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비윤리적인 생활상이 불거지면 우리는 금방이라도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성경도 전혀 읽지 못하고, 기도도 전혀 되지 않는 이런 상태가 되고 보면 우리가 갖는 구원과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한 자신감들이 우리에게서 흔들릴 때 얼마나 같이 흔들리는지 모른다. 그러니 이제까지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은 자신감에 불과한 것이었다. 천국에 가겠다는 자신감 말이다. 나 자신이 흔들리면 신앙도, 성경도, 심지어는 하나님까지도 흔들린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신앙 생활이고 구원의 확신에 대한 허구성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되짚어보고 다시 질문해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는가? 과연 그러한가? 그것은 무엇을 근거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구원의 확신이란 무엇인가? 이 말이 과연 맞는 말인가? 맞다 그르다는 판단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신학과 신앙에서 판단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말이다.


이 모든 의문들의 기준은 오직 성경이다. 왜냐하면 성경만 계시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왜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한가? 왜 그런가? 우리가 요청할 수는 없었는가?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고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자들이었다. 죄로 말미암아 이미 죽은 존재이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계신 곳과는 철저히 차단되어 있는 상태가 죽은 상태이다(창 2:17). 그 결과로 인간은 생명의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가 없으므로 에덴 동산에서 추방 될 수밖에 없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2-24).

 

생명 나무의 길은 있으나 막아 놓았기 때문에 거기로 가지 못한다는 것은 막은 분, 즉 하나님 편에서 열어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이란 하나님 편에서 자기 자신을 열어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시하신 성경이 증거 하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고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고 있다(요 5:39). 그래서 요한복음 1:12,13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 말씀에서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가 아니고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분'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고 인간의 모든 노력이나 근거를 깡그리 부정하는 것이다.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내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조차도 성경은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천국은 우리가 자신감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넣어주시는 나라이다.

 

죄인이 성경의 몇 구절을 읽는다고 확신이 생기고 의인이 될 수 있는가? 그러한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좋은(?) 교회에 등록해서 교리 몇 개 외우고 세례 받고 세례 교인이 되고 그래서 세례 교인답게 교회가 욕먹지 않을 정도로 경건하게 사는 것이 구원받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도 아니요, 도덕의 종교도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복된 소식이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구원받은 자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면 내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이 구원을 받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기준은 내가 아니고 오직 예수님이시다. 나의 구원의 확신이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이 영생의 근거가 된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구원의 진리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 밖에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라는 의미는 예수님도 되고 다른 것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한 분만이 기준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분이 구원을 어떻게 이루시는가를 보면 된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게 되었을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마 13:11). 그 때에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12절)라고 하시면서 마태복음 13:14-15 말씀을 하셨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마태는 이사야의 말씀이 이미 성취된 것으로 보았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었고(마 1:21), 동시에 자기 백성이 아닌 자가 자기 노력이나 힘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고 거부하시는 것에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요한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7-40)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를 받으시고 내어쫓지 않으시며 마지막 날에 반드시 다시 살리신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알기로 하고 십자가만 전하기로 했다고 선언하고 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바울 사도를 비롯한 모든 사도들의 사역 역시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아니한다. 바울 사도는 로마의 감옥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들었다. 그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즉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때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에서 이사야 6:9-10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행 28:25-27). 어떤 사람이 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믿느냐 하는 것은 바울 사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말씀이 성취되는 것에 주님의 일하심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차원이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을 하거나 구원을 가져야 한다고 윽박지른 적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이란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바울을 비롯한 다른 모든 사도들이나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그저 복음만 전했을 뿐이다. 믿게 하시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 점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성령을 이 땅에 보내셔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 그분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고"(요 16:8),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하셨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란 무엇인가? 요한복음 16:14에 의하면 "내 영광", "내 것"이라고 표현된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이다. 진리의 영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곳은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인간이 십자가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오직 성령의 일하심이 아니면 안된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 다음에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이 우리의 책임인가? 결코 아니다. 구원이란 처음부터 주님의 일이고 마지막까지 주님의 일이다. 우리의 행위나 노력이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다. 이런 점에서 구원의 확신이란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붙잡고자 한 근거에 불과한 것이고 오늘날 교회나 선교 단체에서 교인들을 자기 조직에 묶어 놓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란 없다. 아니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이란 없다. 우리의 감정은 속임수에 놀아나는 변덕쟁이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확신이란 주님께 있는 것이다. 주님이 하고자 하신다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번 구원받은 자는 결코 하나님을 떠나거나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다. 성도에게는 궁극적인 승리만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보장해 주시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것이 구원의 상태이지 내가 구원을 받았다 안 받았다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3:22-24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을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들에게 의롭다 하심을 주시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이 단번에 이루어져 단 한번으로 하나님께 만족이 되었듯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단번에 거룩하고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그래서 50% 성도, 99% 성도라는 말이 있을 수 없다. 또한 구원을 받아가고 있는 사람 또는 10% 구원받은 사람이 있을 수 없으며, 80% 영접한 사람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루신 약속은 이렇게 분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만 되는 것이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9-20).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불안한 우리의 감정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보다 오직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이심을 항상 고백하는 차원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방향이 새롭게 잡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에는 삶의 모든 방향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향해 삶의 방향이 잡혀 있다는 것이다. 죽은 자가 살려줌을 받았다면 살려주신 분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육체의 소욕을 항상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주님을 따르고 주님 안에 산다는 것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마 16:24). 다시 말해서 육체의 모든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을 때에 비로소 구원에 골인하여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오직 성령의 사람은 항상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로 살게 되는 자라는 의미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조차도 성령께서 하신다(갈 5:22-24).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고 그것이 자신의 자랑이라고 했다(고전 15:31).


'구원의 확신'이란 감정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건달과 같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면서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게끔 우리 자신을 사로잡는다. 거기에 사로잡혀서 꼼짝없이 종노릇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실상이다. 때문에 바울 사도가 외쳤던 그 외침이 성도에게서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7:24-8:2). 그러므로 성도란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 가진 모습으로 하루 하루를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감사하며 자신을 죽일 뿐이다(1999.12.17/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