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예레미야 강론을 처음 시작 하실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2년이 훌쩍 흘렀습니다.

 류호준 교수님의 글을 인용하시며 기계적이고 이론적인 분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파토스가 어떻게 이스라엘 역사 속에 유유히 흐르고 있는가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란다며 시작하셨습니다.

 

서서히 예레미야서에 빠져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들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 편에서 이해가 되면 감격해하고 은혜 받았다며 섣부른 몸짓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보여서 얼마나 얼굴 화끈 거렸는지 모릅니다.

말씀은 내가 이해하고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더 강하기에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떠밀려 갈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가면서

솟구치는 눈물을 훔치며 보내었던 수요일 밤이 많았습니다.

 

언제나 자기를 예배하고 자기를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리 속에

나 자신이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음을 보았을 때는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언약이였습니다.

자신의 방식과 방법을 가지고 나와서 그것을 믿음이라 여기는 죄인들에게

그게 아니라시며 계속해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방법으로 알려 주시는

그 지독히 아픈 사랑은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셨습니다.

 

너는 죄인이야 그러므로 이렇게 내가 너를 용서하겠다...”

 

마지막 시간에는 그저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 예레미야애가 5:1>

이 말씀은 죄 밖에 지을 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뻔뻔한 듯한 기도라고 하셨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이기에 그 약속을 붙잡고 그들은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께로 돌아갈 힘도 없고 회개할 능력도 없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주셔야 우리가 돌아 갈 수 있습니다.

나는 나만 사랑한 자이지 예수님을 사랑한 적 없습니다....”

 

예레미야와 함께 했던 2년의 시간은 이런 그들의 기도에 아멘 아멘하며 울며 따라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잘못 학습된 고정관념은 자아확장에 너무나 충실했기에 자율성을 찬미하는데 아직도 익숙합니다.

내 마음을 존중하는 이 흔들리는 자아는 대중의 견해나 군중의 시선에 자유롭지 못하며

 때로는 허약한 자존심을 챙기려다가 고통을 자처하기 일쑤입니다.

 이 허위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결국 인간고통의 뿌리는 죄악이라는

예례미야서의 가르침 아니 성경전체의 가르침을 수시로 잊게 됩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그러니 저는  모순 덩어리 입니다.

그러니 그분으로만 가능하다는 이 멧세지가

제 가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흐르고, 또 흐르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말씀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나의 자아만족에 머무른다면 그것이 곧 죄악이라 하셨던가요?

 

다니엘서로 넘어간다 하셨습니까?

예레미야서가 너무나 격했기에 아직 충격과 감격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는데요.

제 절친에게 예레미야가 끝나서 섭섭하다 했더니

다니엘서로 안 섭섭하게 해 주시겠지 라고 하더군요.

지난 2년 동안의 수요일 밤이 너무 좋아서 이렇게 서투룬 심정으로 감사의 표시를 드립니다.

2015. 6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