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다. 흔들리지 않고, 젖지 않고서는 꽃이 될 수 없다고 시인은 노래했다. 이런 노래를 했던 시인은 고난 앞에서 고난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참 자유를 누렸을까? 그 고난의 주체자를 만났을까? 그리하여 마침내 꽃을 피웠을까....? 세상이치만으로도 저런 시를 쓸 수 있었다면 과연 우리는?

 

목사님께서 종종 말씀하시는 자아 (自我)에 대한 풀이는 언제 들어도 은혜다.

창을 손에 들고 자기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자 끙끙거리는 모습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며, 낯설지 않은 너무나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들이 걸어온 모습이기에 낯설 까닭이 없다. 아니 오히려 가장 익숙한 모습이다

 

지금 내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까마득히 잊은채로, 내가 내 인생을 책임 질 수 없는 피조물임을 잊은 채로, 이 모든 존재들의 근원을 잊은 채로, 그렇게 나를 지켜가는 익숙한 몸짓 밖에 할 수 없는 존재들이 아담의 후예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존재들 중 특별히 그분께 선택된 유난스런 존재들이 있다. 그 존재들에게 그분은 작업을 거시는 것이다. 하나님 스스로의 존재를 알리시어 그분을 경외케 하기 위하여 그 익숙하던 삶의 테두리를 헐으시며 간섭하시는 것이다. 때리시고 싸매시며, 뽑으시고 심으시며, 흩으시고 모으시고, 멸하시고 세우시며 그분을 발견토록 작업하시지 않으셨다면 내가 나를 지켜 낸다는 것이 죄악이라는 것을 절대로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깨달음, 이 인식의 변혁, 성경에는 거듭남이라 말씀하신다.

 

거듭남.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아담근성이 발동하면 그 익숙한 길로 빠르게 화답하며 걸어간다. 세속적 가치기준으로 호, 불호를 가리며 취하고자 한다. 그러나 작업 거시는 그분의 은혜는 그 특별난 존재들의 헛 발길에 제동을 거신다. 흔드신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 흔들림 때문에 불쾌해 한다. 짜증을 낸다. 그리고 아프다고 아우성이다.

 

아이들이 몇 달 동안 인간관계의 무거운 짐으로 버거워 하고 있다. 인간관계를 통한 흔드심이다. 바람과 비를 통한 젖음이다. 처량하고 곤하다며 엄마인 내 앞에서 투정이다. 엄마 때문에 성질대로 못한단다. 엄마 때문에 참아놓고 엄마 앞에서 온갖 투정을 부리는 저 아이러니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라며 깨달음을 주신다. 하나님 앞에서 말도 안되는 투정을 부리며 시도 때도 없이 시위하는 사람이 바로 너 라고 하신다. 여호와 경외하기를 가르치기 위해 불필요한 건더기들을 털어내시려고 흔드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당신이시라고 하신다. 그 흔드심이 그분께서 꽃을 피워 가시려는 작업 과정 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것이 내 방법 이라고 하신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윗도. 솔로몬도 그 끝없는 성경 속 인물들 모두는 그렇게 그분의 흔드심으로 털리어 가면서 언약을 기억해 내었던 것이다. 그 언약을 기억하고 그 언약대로 이루실 능력의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를 지키시는 분이심을 깨달아 갔던 것이다.

 

그것을 나는 어찌 이리도 쉽게 잊는가. 그러니 아이들도 부족한 엄마를 따라 하는가 보다. 흔들리면 흔들린다고 아우성이고 젖으면 젖는다고 아우성이다. 조급해하고 불안해하는 이 모든 불신앙의 행태들은 그 흔드심의 주체이신 그분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타이밍과 모든 상황들, 어둠까지도 사용하시어 빛 되신 당신을 가르치시려는 학습장이 바로 이 역사 속 삶 이라면 그 어떤 사건과 그 어떤 인간관계도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은 없었으며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꽃 이야기를 제대로 전수해 주는 일이 엄마의 몫일테다

 

어느 고마우신 분께서 비틀거리는 아이들에게 도종환 시인의 시 한 구절을 보내시며 충고하셨다. 삶을 회피하지 말고 충실히 걸어가라고, 그렇게 흔들리며 가는 것이 인생길이라고. 각자 몫의 난관 앞에 고개를 돌리지 말라고. 그리고 거기 난관을 지나 팔 벌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라고.

 

어미 된 심정으로 나 또한 그들을 향한 소망이 있다. 이 땅위의 모든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그 사건 위에 내가 있어라고 하시는 분을 발견하고 여호와 그분만이 나를 책임지실 능력과,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분이심을 깨달아 알아 가기를!


솔로몬만이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왕이므로 아무리 아도니야가 세력을 모아 스스로 왕이 되려 하여도 아도니야는 왕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결국은 척결당하고 말았듯이, 진정한 왕은 예수그리스도 한분 뿐 이심을, 그분만이 우리들 삶의 강력한 퉁치자이심을 가르치시려고 우리 안에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아도니야를 그분께서 하나하나 부수어 나가실 때 그분의 주권을 잊지 않고 원망 없이 기억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