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
예배의 변질과 예배 중독
예배는 기복적인 무당굿 아니고 진리로 사는 것

신성남 / 뉴스엔조이

 

 

한국의 교인들은 지금 예배와 집회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계 유일의 새벽 기도회를 선두로 하여 주일 대예배, 저녁 예배, 수요 예배, 금요 기도회, 찬양 예배, 그리고 구역 예배 등 한 주간 내내 집회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추가로 정기적인 부흥회, 신앙 강좌, 그리고 특별 집회가 수시로 열립니다. 그 덕분에 전 세계에서 예배가 가장 많은 교회가 한국교회입니다.

교회 생활이 예배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성도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가장 큰 이유가 예배니까요. 그러나 가정생활, 직장 생활, 학교생활, 기타 나머지 사회 활동의 영역마저 모두 교회의 공예배들로 인하여 시간적 또는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고 과도하게 종속된다면 이는 심각한 신앙적 불균형을 초래합니다.

예배가 매우 중요하고 유익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교회 내에 각종 예배와 프로그램들이 범람하지만 정작 신도들의 삶은 어떠한가요. 음식이란 귀하고 좋은 것이지만 이를 너무 과식하거나 잘못 먹으면 급체 또는 식중독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예배를 바르게 시행하고 적용하지 못하면 신도들은 심각한 '예배 중독'에 빠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 많은 예배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개신교 역사상 가장 부패한 교회'라는 오명을 듣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현실이 우리의 예배 생활과 전혀 무관할까요.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예배

 

어떤 경우는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다녀도 삶이 별로 바뀌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여전히 가정에서 짜증내고, 직장에서 이기적이고, 모임에서 험담하고, 사업에서 부정을 행하고, 어려운 친척에게 무심하고, 그리고 가난한 이웃에게 박정합니다.

그래도 예수 믿고 다소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인색하고, 옹졸하고, 잘난 척하고, 다투고, 시기하고, 공의에 무감각하고, 기복적이고, 미신적이고, 그리고 주는 것보다 받기를 좋아합니다.

일 년 내내 각종 예배를 통하여 매주 설교를 듣고, 기도를 많이 하고, 그리고 찬양도 많이 하는데 이처럼 삶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줄줄 외우고 통성기도 또한 요란하건만 실제 생활에서는 자비와 경건이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왜 공예배에 그토록 열심히 참여하십니까. 진정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하기 위함입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삶과 동떨어진 경배를 주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이번에도 또 무당굿처럼 '복을 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시려는지요.

우리의 예배가 삶에 참된 변화를 주지 못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예배입니다. 자신은 요지부동으로 변화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이 해결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그저 욕심일 뿐입니다. 내 속사람과 탐욕은 그대로 둔 채 내 의도대로 하나님을 움직이려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른 예배는 바른 실천이 동반된 예배입니다. 그래서 힘이 들어도 내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깊은 자각이 필요합니다. 그런 진지한 각오와 결연한 마음이 없이 만날 신발이 닳도록 예배당 문턱을 밟아 봐야 무슨 변화가 있을까요. 성도들은 세상을 바꾸려 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자신을 바꾸는 일에서부터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온갖 좋은 말을 늘어놓으며 세상을 바꾸겠다고 허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른 예배가 될 리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본이 안 된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이 사치, 공금 횡령, 뇌물 수수, 성직 매매, 패거리 작당, 교권 남용, 성추행, 세습, 그리고 교회 사유화 등 갖은 악행을 고치지 않으면서 무엇을 바꾸고 누구를 변화시키겠다는 것인지 정말 무책임하고 몰염치한 현실입니다.

최근에 어떤 분이 한국교회의 총체적 부패를 보며 '신학의 부재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을 하셨더군요. 그 말씀이 별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그런 표현조차 큰 사치로 들립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고난도의 신학적 지식 결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매우 기본적인 기초 상식의 결여에 기인합니다. 그런 상식의 회복이 없이 아무리 신학자들과 전문가들이 모여 세미나하고 토론하고 논문을 많이 써 봐야 말짱 헛수고이지요.

한국교회 문제의 핵심에는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과 최소한의 양심마저 무시하고 불의한 교권을 휘두르고 있는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타락한 무리들이 가장 경건한 척 성직으로 위장하여 신도들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고, 그리고 진리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변질

 

이들에게 예배는 하나의 공연 무대에 불과합니다. 유창한 설교와 멋진 기도로 신도들의 마음을 훔치고 자신을 하나님의 사자처럼 돋보이게 하려 애씁니다. 그래서 이방신의 거대한 사원처럼 시각적으로 크고 수려한 예배당이 필요하고, 엄숙한 의식이 필요하고, 고가의 전자 악기가 필요하고, 그리고 신도들의 감각을 자극할 '언어의 유희'가 필요합니다.

가장 성경적이어야 할 설교에는 권위주의적 위세와 달콤한 기만이 난무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전하라고 했더니 엉뚱하게 '목사님 말씀'을 열심히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 표절과 짜깁기가 만연하고 마무리 기도도 그냥은 못 합니다. 감미로운 음악을 깔고 사전에 고심하여 준비한 기도문을 변사처럼 애절한 목소리로 읽으며 미사여구를 늘어놓습니다. 혹시 한 글자라도 잘못 읽으면 망신이니 노심초사하며 조심조심 읽습니다. 그래도 간혹 오낭독을 하게 되고 그런 날은 정말 신성한 목사님의 스타일을 사정없이 구긴 고약한 날이 됩니다.

하여튼 이래도 감히 은혜를 안 받으면 그 교인은 정말 경우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주의 종'께서 이렇게 수고하시는데 어찌 은혜를 안 받고 배기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순진한 신도들은 별 수 없이 그 은혜라는 것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거룩하신 담임목사님의 교회는 또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돈을 더 많이 걷고, 건물을 확장하고, 교인 수를 늘리고, 그리고 다시 대형화를 향해 힘차게 전진합니다. 이런 교회에서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작두에 맨발로 선 무당처럼 홀로 북 치고 장구 치며 수고하시는 주의 종께서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좀 하면 "그건 극히 일부의 이야기이다"며 반발하는 분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침소봉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왕이면 부정적인 것 말고 아름답고 듣기 좋은 얘기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교회의 회복이나 갱신을 언급하는 사람들을 모두 불평주의자로 몰아 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너그럽고 고상한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우리 마을의 공동 우물에 개똥이 한 조각 떠 있습니다. 그러면 뭐 그까짓 거 오직 한 조각뿐이니 괜찮다고 그냥 두시는지요. 그리고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이 정말 단지 한 조각 정도라고 보십니까. 또는 단지 일부의 문제이니 아예 전부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기다리며 구경을 하자는 것인지요.

성도들의 깊은 각성이 필요합니다. 은혜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신 것이 아니신데 유독 공예배를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아침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고 정장을 빛나게 차려 입고 미리 은혜를 받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교회에 갑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평상시 가정에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힘든 모양입니다. 하여튼 그리고는 마음을 단정히 하고 예배의 벅찬 감동과 감격이 내리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물론 이런 자세가 아름답게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 지나치게 되면 목회자나 분위기에 의존하는 신앙에 빠지기 쉽고, 또한 바른 지식보다는 감정에 좌우되는 불균형이 문제가 됩니다. 찬양만 열심히 해도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지만, 그것이 은혜의 중심이 되면 문제가 됩니다. 신자들은 생각을 좀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머리가 빈 뜨거운 가슴은 언제나 맹신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자신이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니면서 세상적으로 성공하여 남들보다 잘살거나 다소 앞서 있으면 그것을 매우 중요한 신앙의 승리로 간주하는 '성공주의'나 '번영주의' 또한 예배를 기복적으로 변질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일부 교권주의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순진한 욕구를 이용하여 이들의 삶을 교회에 가두고 가급적이면 '교회 중심 생활'을 하도록 우선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 빛과 소금이 되는 '성숙한 신자'는 되지 못하고, 그저 교회 일에만 몰두하는 '충성된 교인'이 되도록 유도합니다.

물론 이는 귀족 목사님들의 철밥통을 금칠하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국에 비해 한국교회에 기형적으로 예배나 집회가 많은 것이 이런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예배란 무엇입니까. 교인들이 모여 설교를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그리고 헌금하면 다 좋은 예배일까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셨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예배 역시 원하지 않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피를 좋아하셔서 제사를 원하시고, 돈이 부족해서 제물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예배보다 더욱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제자다운 삶'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귀하고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성도의 삶을 통한 사역보다 예배를 우선시하는 '예배 제일주의'나 '예배 만능주의'는 매우 위험한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예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공예배는 단지 예배의 극히 일부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도의 삶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자주 모이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세상에 나가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성도 자신이 예수님처럼 제물이 되어 세상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예배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사도들의 초기 교회에 현재처럼 번잡하게 많은 공예배와 집회가 있었을까요. 지금 서구 많은 나라들에서는 '작은 정부'를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정부가 너무 많은 일을 벌려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져서 권력을 남용하며 비효율화하고 민간에서 해야 할 것까지 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유형 교회 역시 그 활동을 적절히 절제하며 '작은 교회'를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의 삶이 단순히 교회 활동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니까요. 따라서 교회는 신도들이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밀알이 되어 제자다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와 반대로 교회 생활만 중시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주로 이단이나 사이비가 애용하는 수법입니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단순히 '자주 모이라' 또는 '많이 모이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도들은 성속을 차별하던 중세적 '교회 중심주의'나 '예배 중심주의'의 함정을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가난한 이웃의 눈물을 먼저 돌보아야 할 소중한 헌금으로 바벨탑같이 높은 초대형 건물을 지어 맹신도들을 유혹하고 '거룩한 성전'이라 기만하며 희희낙락하는 자들은 예배의 참된 의미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삶으로 예배하는 성도라면 결코 그런 허욕, 허망, 그리고 허세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세계 어느 나라 교회보다 큰 예배당들을 많이 짓고 빈번하게 예배를 많이 하지만, 정작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삶으로 그 예배를 완성시키는 일에서는 왜 결정적으로 큰 실패를 하고 있는지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예배의 무속화와 기복화

 

이제 우리는 예배에 대해 더욱 성숙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구약의 제사가 아닙니다. 제물이나 돈을 바치고 죄 사함을 받고 복을 구하는 의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사처럼 너무 바침을 강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전 제사는 이미 어린양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어 다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허구한 날 모일 때마다 무당굿처럼 뭘 그리 또 다시 더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인지요. 하여튼 돈을 안 걷는 굿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반면에 사도들의 초기 예배에는 아예 '헌금 순서'라는 것 자체가 없었습니다. 현대 개신교의 예배에 헌금 순서를 슬그머니 삽입한 것은 도대체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은 성전이나 교회당에만 임재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주일에만 함께하시고 평일에는 외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성도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니 마치 예배 중에만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처럼 너무 호들갑을 떨지 말자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 시 개신교 목사가 무당이나 사제같이 권위적인 긴 옷을 입고 제사의 '제주'처럼 행세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는 잘못된 일입니다. 이런 제사장적 처신은 암묵적으로 목사직을 다른 직분들보다 특권화하여 결국 목사가 신도들 위에 군림하게 만드는 매우 미신적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를 제사처럼 의식화하거나 너무 성스럽게 미화하지 말기 바랍니다. 예배는 굿이나 제사가 아닙니다. 교회당은 성전이 아니고, 교회 부지는 성지가 아니고, 강단은 제단이 아니고, 그리고 설교하는 목사는 결코 제사장의 직분이 아닙니다. 그런 무속적 행위들은 부패한 중세 교회에서 이미 오래전에 끝장냈어야 할 미신적인 작태입니다.

또한 예배를 인위적으로 무슨 은혜를 나눠 주는 종교적 이벤트나 공연으로 격하시켜도 곤란합니다. 일부 목회자들은 복되고 은혜로운 예배를 보여 주겠다고 갖은 '감각적 수단'을 동원하며 인위적으로 힘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진심으로 말리고 싶은 일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을 깔고, 아무리 장엄한 의식을 펼치고, 그리고 아무리 거룩한 목소리로 설교와 기도를 잘 해도 그 속에 신령과 진리가 없다면 이는 단지 무속적인 굿거리장단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만날 때 항상 정장을 하십니까. 아버지와 매주 무슨 공식적인 회담이라도 하시려는지요. 진바지를 입거나 운동화를 신고 만나면 아버지가 언제 박대하시던가요. 그리고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만날 때마다 돈을 요구하시던가요.

공예배를 무속화하거나 기복화하는 것은 교회를 병들게 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입니다. 목회자를 사제화하여 '목사 중심 예배'를 유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는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예배나 설교가 스스로 은혜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무당처럼 지성을 드려 은혜를 받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자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이미 큰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공교회의 전유물이 결코 아닙니다. 가난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며 주님께 나아가기만 한다면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산에서, 빈 들에서, 또는 어두운 예배당 구석이나 골방 그 어디서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울러 목이나 손바닥이 좀 뜨거워졌다고 은혜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감정으로 얻어진 뜨거움은 결국 감정과 함께 바람처럼 사라지는 법입니다. 그런 정도는 맹신도들도 즐기는 은혜입니다.

 

 

진리로 사는 것이 예배

 

예배는 이벤트가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군더더기를 잔득 발라서 한 주일에도 몇 번씩 모일 때마다 매번 돈을 걷고 음악으로 장식한 기도와 느끼한 화술로 쇼를 공연하고 있습니까. 이런 것들은 은혜라는 가명으로 예배 속에 위장된 교권주의자들의 치졸한 꼼수일 뿐입니다.

예배에 참석하여 은혜를 사모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가장 큰 은혜는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의 제자 된 삶을 한번 바르게 살아보겠노라고 불의와 헛된 욕심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십자가의 도'를 따르려는 단호한 결단을 성실히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는 삶은 변화시키지 못하고 감성적으로 제사화하고 기복화한 예배를 관습적으로 반복하고 평생 교회당만 오락가락하며 세월을 허비하는 '예배 중독자'들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요.

공예배는 가족 모임입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아버지와 교제하는 시간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자녀들이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족합니다. 처음엔 주로 가정에서 모였던 초대교회 사도들의 무공해 예배를 생각해 보십시오. 겉치장에 분주하거나 의식과 건물의 허세가 없는 소박하고 진솔한 예배가 좋은 예배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도에게는 삶이 예배입니다. 삶이 제사입니다.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당에서 우리의 예배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 있든 지금 자신이 서있는 그 장소가 언제나 경건한 삶으로 수행하는 생생한 예배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마 12:7)."

 

데스크 승인 2013.12.04  07:27:43

 

 

 

 

 

교회밖에 모르는 예수쟁이들
반성이 필요한 교회 중심 생활

 

 

신성남 / 당당뉴스

 

 

주일 아침이 되면, 먼저 9시 교회 학교 예배에 참석합니다. 중고등부 교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학교 다음은 11시 대예배입니다. 예배 후에는 바로 성가대 연습이 있습니다. 그 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 2시 청년부 집회에 참석합니다. 조별 모임까지 다 끝나면 4시 30분 정도가 됩니다.

그러다 보니 7시 저녁 예배 시간이 다소 어중간합니다. 그래서 대개는 교회에서 나머지 오후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예배에 참석합니다. 이렇게 집에 돌아오면 밤 10시가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주일 하루 온종일을 교회에서 보낸 셈입니다. 그 외에도 틈이 나는 대로 수요 예배, 금요 기도회, 토요 모임, 새벽 기도회, 구역 예배 등에 참석합니다. 물론 평일에는 직장에 나가서 토요일 오전까지 근무를 해야 합니다.

필자가 잘 아는 어느 청년의 실제 교회 생활을 잠시 열거해 보았습니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교회 내에 이런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주일 아침 교회 학교부터 시작해서 대예배, 성가대 연습, 부서별 오후 집회, 그리고 저녁 예배까지 교회 내의 여러 모임에 참석하고 밤에 집으로 돌아오면 몸이 거의 녹초가 됩니다. 식사 준비나 설거지 등 교회 허드렛일도 모두 교인들의 몫입니다. 게다가 장로나 권사 등 주요 직분자들은 목사님의 눈총을 의식해 주일 새벽 기도회를 거르기도 불편합니다.

흔히 목회가 힘들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신도들도 결코 쉽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일에는 직장이나 가사일로 시달리고, 주일마저 제대로 쉬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니 교인들이 평일에 사회에서 제대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도리어 기적입니다. 아마 전 세계 어디에서도 한국교회 신도들보다 더 심하게 한 주일 내내 돌림방을 당하는 교인들은 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비신자들 중에는 '교회에 나가고 싶어도, 너무 피곤하게 해서 겁난다'고 말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더구나 교회 내의 집회나 프로그램이 더욱 다양해지고 있어 갈수록 더 분주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느 대형 교회는 매일 새벽 기도회에 모이는 운동까지 한다니 문제가 더욱 복잡합니다. 하여튼 한국교회의 열심은 정말 알아주어야 합니다.



절제가 필요한 교회 중심 생활

필자도 한때는 '교회 중심 생활'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교회에 가면 편안하고 행복했습니다. 성경을 배우는 것이 너무 기뻤고, 믿음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또한 존경할 만한 목회자들과 친절한 성도들이 마냥 좋았습니다. 친구의 인도로 처음 출석한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사랑을 배웠고, 그리고 성경 이야기 속에서 꿈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교회 중심 생활에도 큰 절제가 필요함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의 일입니다. 그 이유는 신자들 삶의 중심이 예배당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가정, 직장, 학교, 지역 사회 등 '인생의 전 영역'에 균형이 있게 자리해야 옳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도들은 매우 성공적인 '선데이 크리스천'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에브리데이 크리스천'이 되는 데에는 크게 실패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매우 경건하고, 가정에서는 약간 경건하나, 정작 사회에서는 별로 경건하지 않은 이중생활을 합니다. 주일날 교회에서는 모두 다 독실하신 장로, 권사, 집사 그리고 교사이신데, 평일에 직장이나 학교나 지역사회에서는 이분들이 다 어디에 숨어 계시는지 그 향기를 느끼기 힘듭니다.

오히려 평소에 참으로 야박하고 까다롭기로 소문난 어떤 직장 상사가 한참 나중에 알고 보니 교회 장로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부패와 탐욕으로 큰 비난을 받는 어느 유명 인사 역시 장로라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란 적도 있습니다. 더구나 직장에서 점심때마다 꼬박꼬박 기도를 잘하는 동료 집사가 매우 이기적이며 인색한 사람이라는 주위의 평을 들으면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또한 교회에서는 제사장처럼 경건하신 목사님이 막상 가정에서는 진정한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교회 내에서 경건한 신자 노릇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마치 온실에서 화초를 키우는 일과 비슷합니다. 믿음 좋은 모습으로 교회 일을 열심히 하겠다는데 누가 말리겠습니까. 정작 큰 문제는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고, 생각과 생각이 부딪치고, 그리고 이익과 이익이 부딪치는 세상 속에서 신자다운 삶을 사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대형화 추구' 현상의 이면에도 바로 이 '교회 중심 생활'을 잘못 오용한 측면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의 깊은 자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분들은 신도들이 세상 속에서 구별된 삶을 실천하는 한 알의 밀알이 되기보다는, 우선적으로 교회에 '죽도록 충성하는 일군'이 되기를 바라고 또한 그렇게 유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외형적 성장에 당장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우선일까요, 아니면 가정이 우선입니까. 어떤 목회자들은 쉬운 이야기도 매우 어렵게 돌려서 말하는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적절한 균형이 있는 것이고, 양자택일의 극단적인 경우라면 가정을 돌보는 것이 우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정보다 교회에 열성인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것은 본래 이단과 사이비 교단의 주요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소위 보수 교단에 속하는 교회들에서조차 이런 생활을 은근히 따라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평생 교회 일에만 매달려 매주 세월을 보내게 하고, 실제 가정과 사회에는 별 유익과 영향을 주지 못하는 미성숙한 기독교인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수가 거의 천만 명에 이르렀지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사회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신도들의 교회 경력은 계속 높아지지만, 속사람이 별로 새로워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 새신자일 때나 집사나 장로가 된 지금이나, 신앙적 미자립 상태로 변함없이 그저 담임목사의 모유만을 찾는 발육 부진의 신앙생활에 머무르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그리고 상당수의 이런 사람들이 직분자라고 양복 입고 무게를 잡으며 목사의 시녀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모양 이 모습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성장하더라도, 교인은 별로 성장하지 못한 곳이 바로 지금의 한국교회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은 교회의 이름으로 모이고, 돈 내고, 건물 짓고, 선교하고, 구제하고, 그리고 봉사하는 일을 목이 터져라 강조하여 교회 성장에 큰 재미를 보고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분들은 같은 순간에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에서 신자들의 삶이 서서히 망가지며 고통 받고 있음을 크게 간과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부 귀족 목사님들의 배부르고 오만한 행태를 보면, 도대체 신도들의 그런 고통에 제대로 관심이나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성숙한 신자로 사는 일

한국교회는 예배당에 모이는 일에 성공하고 있으나, 흩어지는 일에서 크게 실패하고 있습니다. 끼리끼리 모여 지지고 볶는 일에는 이미 경지에 이르렀으나, 지역사회에 소망을 주고 유익을 주는 일에서는 큰 낭패를 보고 있습니다. 각자 삶의 영역에 흩어져 신자답게 사는 일에서 그만 쓴잔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탈세한 장로 사장이 욕을 먹고, 직장에서 이기적인 집사가 따돌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권사 시어머니와 집사 며느리가 서로 반목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누구도 그리 쉽게 자유롭지 못합니다. 필자 역시 과거 신자답지 못하게 처신한 행동이 문득 떠오를 때면, 밤에 이불 속에서도 혼자 얼굴이 뜨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틈만 나면 잘난 척하고, 남을 가르치려만 들고, 부동산 투기에 동조하고, 사치 풍조에 어울리고, 불의한 이익에 관대하고, 가난한 친척과 이웃에 무심하고, 직장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부하 직원에게 거칠고, 그리고 가정에서 완고한 것이 우리들의 한심한 모습입니다.

요즘 교회와 교인들은 넘치는데, 참된 제자들을 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교인들이 '신자다운 삶'을 사는 데에 실패한 결과입니다. 수십 년 동안 시계추처럼 교회만 왕래하면 뭐합니까. 사람이 좀 달라져야지요. 허구한 날 성경을 배우고 연구만 하면 뭐합니까. 나가서 실천을 해야지요. 신도들의 생활을 진정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따라서 이제라도 우리는 구태의연한 교회 중심 생활을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아울러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에서 신자다운 삶을 먼저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목회자들부터 근본적으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교인 수에 집착하고 교회 성장에 촉각을 세우기 전에, 먼저 교인들이 어디에서든 독립적인 신앙 인격을 갖추고 신자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들 자기 권리를 철저히 챙기는 이 영악한 시대에, 우리 신자들만이라도 조금 손해를 보고 살면 좋겠습니다. 가정의 화평을 위해서라면, 내 권리와 편리를 크게 양보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희생이 없는 화평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진정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따뜻한 시어머니와 착한 며느리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 남편, 아내, 형제, 그리고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도 전도에 욕심부리기 전에, 우선 남들을 세워 주고 도와주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진급이 좀 늦어지면 어떻습니까. 가능하면 남보다 조금 더 나누어 주고, 조금 덜 가져야 합니다. 시장에서도 너무 깎지 말고 제값을 주고 사면 좋겠습니다. 남들은 일부러 구제도 하는데, 영세한 상인들에게 박절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신자들은 세상에서 다소 어수룩해 보이고, 바보가 되어도 좋을 것입니다. 모두들 자신의 이익을 철저히 챙기는 빡빡한 세상에서 신자들만이라도 좀 윤활유가 되고 향유가 되면 좋지 않을까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아 헌금을 많이 한들 무슨 영적 유익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삭개오처럼 자기 것을 비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세상과 소통하는 신자가 되어야

한국교회의 참된 성공은 큰 건물을 짓거나 많은 예배당을 늘이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설교를 잘하는 유명 목사들이 많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계속해서 장로 대통령이 나오고, 장로 기업인들이 많이 늘어나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으로 시급히 필요한 것은 교회는 물론, 가정과 사회 속에서 제자 된 삶을 구체적으로 성실히 실천하는 '경건한 신자'들이 늘어나는 일입니다.

목회자들이 먼저 전심으로 힘써야 할 일은 '교회의 성장'이 아니라, '교인의 성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우리는 교회밖에 모르는 예수쟁이, 복만 밝히는 예수쟁이, 겉과 속이 다른 예수쟁이, 강자들 편에만 서는 예수쟁이, 부와 권력을 탐하는 예수쟁이, 타 종교에 무례한 예수쟁이, 이웃에 냉담한 예수쟁이, 그리고 사회 정의를 외면하는 예수쟁이 생활을 필히 청산해야 합니다.

아울러 '헤롯 성전'을 폐하신 예수님처럼, 필요하다면 우리도 '예배당'이라는 높은 울타리를 허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만 거룩한 척 위선하지 말고, 세상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며 소통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욕을 하든 말든 예배당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유아독존하는 신자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갈수록 어두워지는 이 세대에 예배당 속에 안주하는 신도들은 단지 빛을 잃은 등불이며, 맛을 잃은 소금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신자다운 삶을 사는 데 무수한 실패를 했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실망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코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손해보고 사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용기를 내어, 기필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겠다는 거룩한 다짐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어찌하든 제자답게 한번 바르게 살아 보자고, 때로는 잠을 설쳐 가며 기도하고 고심하는 진정한 예수쟁이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기대해봅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

샬롬!

 

입력 : 2011년 02월 16일 (수) 19:59:25 / 최종편집 : 2011년 02월 16일 (수) 22:27:24 [조회수 : 3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