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__

그저께 김 선교사는 브라질로 떠났다.
석달 동안 나를 돌보느라 친구들도 제대로 만나지를 못했다.
밤마다 앓는 소리와 뒤척이고 밥도 스스로 할수가 없는 아내를 뒤로 두고 떠나는 그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었다.
‘이런 나를 두고 어떻게 돌가느냐’ 물으니 그래도 가야지’한다.
나는 벳세메스로 울며 가는 소잖어_한다.
언제 다시 오느냐 물었더니 12월에 검은강 신학교 방학 하면 온다고 한다.
참으로 믿음도 좋다고 했다.
그가 돌아 갈것을 생각하면 뭐라 표현은 할수가 없었고 홀로 있을것을 생각하면서  
금새 눈물에 마음이 먹먹하곤 했다.
홀로 있을것을 생각하며 무섭기도 두렵기도 하다.
몇걸음 못가 주저 앉을것 같은 나인것을 나는 알기에_
그러나 주께서 용감한 나를 아시니 겪으라 하시겠지 생각한다.
어떻게 된일인지 내 눈물은 물 가득 먹은 스폰지 같다.
누르면 주루룩 흐르는 물 같다.
이렇게 나는 눈물이 많은냐_ 싶다. 전혀 의식하며 살지 않는데 그렇다.
신기하다.
그리고 이제는 아픔에 대한 말을 하면 줄줄 운다.
그래서 주님게 여쭤본다
제가 왜 이럽니까’라고.
그럼 마음은 말한다 ‘ 다행이라’고.
그래야 '아프고 섧은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지 네가 알지'.

김 선교사는  작년 12월에 한국에 와서 올해2월 27일에 돌아 갔다.
언제나 12월 25일 성탄절과 년초를 성도들과 함께 보내던 그가 나를 간호하고 밥을 해주러 왔었다.
성도들이 우리가 교회를 잘 돌볼수 있으니 나를 돌보라고 보내 주웠다.
아마존에 있는 교회 식구들에게 그리고 신학교를 지키고 있는 목사님들과 전도사님께 믾이 고마웠다.

추운 겨울에 와서 밥지어 주고 파주에 사니 운전에 서툴은 김 선교사는 멀리 다니는 병원에 힘도 많이 들었다.
그저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었다.
그저 나는 빨리 주님께 가고 싶기만 한데_
그래도 내 사는것이 가족의 행복이라니 내 행복만 원할 수도 없다.

엘에에서 비행기를 이어 타느라 하루를 머물며  화상 채팅을 걸어 왔다.
비행기 안에서 많이 화가 났고 슬펐노라고 _
그래서 나는 기뻤다.
드디어 자기의 본색을 보았으니 좀더 자기 의가 깨졌으리.

남편의 얼굴을 보니 겁이 났다.
반갑고 그리워질까봐 마음을 꾸꾹 진정 시켰다.

우리는 이러나 저러나 감사하고 기쁘다.
주께서 도와 주시지 않으면 원색적인 우리를 보며 겸손해진다.
주님의 은헤로 강건할때도 감사드린다.

그러나 인자라는 말을 기쁘게 쓰셨던 주님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려 본다.

나는 쇠약해졌고 똑바로 서지못하고 등이 굽은채로 걷는다.
그래도 나는 기쁘다.
주께 받은 선물이니 부끄럽지도 않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한걸음씩 걷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는 날로 깊어만 간다.
그 분의 마음을 아주 쪼금 알아 가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 받는이들의 심정을 헤아려 가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신지 알아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은혜를 형제들과 나누기 위해서 나는 부르는 곳마다 달려 간다.
어찌 가든지 나는 실려 간다.

어제는 LDI 대학생 수련회에 가서 한 시간 반 동안 설교하고 돌아왔다. 인천에 게신 김 병동 전도사님이 새벽 같이 오셔서 수원 까지 데려다 주셨다.
김 병동 전도사님은 올해 장신대를 졸업하시고 새순 공통채를 하고 계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고아원에서 무작정 독립해야하므로 전도사님은 이 형제와 자매들과 함께 공동체로 살고 계신다.
지난번 나를 하루에 5시간 동안 설교를 시키신 장본인이시기도 하다.

돌아와 기진하여 깊은 잠에 빠졌다.
이제 나는 내일 다시 부산(창원인데 부산으로 아신 모양입니다. 어떻든 부산공항에 오시니 창원으로 모시고 오면 됩니다-이장우)에 늘 푸른 교회에 간다.

김 선교사의 사진을 보는 것을 무서워하면서 안보려고 피하는 나를 본다.

그립고,
홀로 있음이 섧으면 설교나 마치고 짬을 내어 울어야지 마음을 굳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