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미션 인싸이트’ 라는 책을 만드는데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여성 선교사로서 20년 이상 선교한 여성 선교사들에게 요청된 글들 중에 저는 '겨울 나무의 행복'이라는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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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겨울 나무의 행복      
선교사, 허운석  

주님의 손에 붙들리어
스물 세살의 나이에 별안간 불같이 제 생애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분의 뜨거운 사랑에 겨워서 일년 후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때 나는 중국이나 일본의 선교사로 헌신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혼과 더불어 다시금 남편 안에서의 삶 속에 내 자아 소멸이 필요함을 알았고 나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훈련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 차렸다.

결혼한지 몇년 후 남편이 기도에 열심이 적다고 생각한 나는 남편과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었다. 남편은 그 당시 장로회 신학 대학 학부 3년 겨울 방학 기간이었다.결국 남편은 금식 기도 20일을 작정하고 북한 산, 즉  삼각산 통일봉 이라는 곳에 텐트를 치고 금식 기도를  시작했다.


금식을 시작한지 15여일이 지났는데 주님께서 40일동안 금식을 하라고 하신다고 하며 계속 금식 기도를  하였다. 거의 40일이 다가올 때 남편이 내게 ‘주님께서 목회자가 없는 농촌교회를 섬기라’ 고 하셨으며 그곳에서 나사렛과 갈릴리의 삶을 배우라”고 하셨다고 했다. 당시 전임 전도사로 일하던 구산 장로교회를 사임하고 목회자 없이 비어있는 농촌교회에 가자고 하였다.  이때, 저희 딸 수산나가 3살이었고 지훈이가 4개월 되었을때이다. 남편은 무사히 40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당시 친구였던 최일도 전도사님의 소개로 경상북도 금릉군 부항면 월곡리 학동이라고 하는 열세 집이 있는 목회자가 비어있는 부항 중앙교회의 담임 전도사가 되었다. 참으로 깊고 깊은 골짜기에 두대의 버스가 서로 비켜설수 없었던, 좁은 그리고 비포장도로를 지나 버스에서 내려 오리를 걸어 들어가야 하는 첩첩 산중이었다.

새로운 삶, 갈릴리와 나사렛
6년동안 가난한 농촌교회에서의 삶은 그동안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를 드러내 주는 시간이었다. 순수했던 나의 마음은 어느새 나의 비젼을 이뤄가는 사람으로, 모든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를 세워가는 사람으로 변질되어 있었음을 회개하였다.

6년이라는 시간동안, 있는 그대로, 가난한 삶으로 자신을 드리기를 원했다.
우리가 목회했던 그 동네를 일컬어 동네 주민들은 하늘 아래 첫동네라고 했다.
우리 교회가 있던 그 동네는 정말 가게조차 없어서 무었을 구입할래도 오리를 내려가야 했다. 어느날은 간장을 사러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니 8개월된 아들이 마루에서 떨어져 마당을 기어다니다 밭으로 굴러 떨어져 있었다. 그후 나는 아들을 등에 업고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고 그후 서울에서 오토바이를 보내주워서 아이들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다녔다. 아이들은 들과 산으로 뛰어 다니며 메뚜기를 잡아구워 먹으며, 돼지 감자를 캐서 먹고 입가가 돼지처럼 지저분해도 해맑게 웃으며 강하게 성장했다.

어느날 아들이 말했다 엄마, 왜 강아지들은 밤에 안경을 쓰는거야? …

겨울에는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며 꽁꽁 얼은 냇가에서 얼음을 깨며 빨래도 하고 나물을 뜯으면서 나는 가난한 삶에서 살아내는 지혜를 얻으며 삶을 풍성히 가꾸는 사람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무엇에도 잘 적응하며 자족하는 사람으로 훈련 되어갔다. 깊은 고독과, 가난, 그리고 섬김 속에서 조금씩 나사렛의 주님과 친숙해 가는 우리들을 보았다. 6년후에 아마존의 척박한 환경으로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으면서, 왜 주님께서 농촌에서 우리들의 모든것을 내려 놓게 하셨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기였던 지훈이와 누나인 수산나,  아빠가 신대원을 마칠 때까지 우리는 늘 아빠와 헤어졌다 만났다의 연속이 계속되었다. 이런 헤어짐이 아마존의 선교지에서도 연속되었다.지금까지 가족이 함께 잘 살아본 세월이 많지 않았다.

금요일밤에 첩첩 산중에 땅거미가 질때 서울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빠를 기다렸던 아이들과 남편을 맞이하는 시간은 나 역시 남편 없이 어린 아이들을 키우면서,교회를 섬기며 홀로 견디는 아픔을 많이도 감내해야 했다.그러나 새벽 4시 30분에 종탑의  새벽 종을 치는 기쁨이 컸었다. 때로는 종 소리에 깨어 우는 아기였던 지훈이를 등에 업고 두명의 집사님들에게 말씀을 전하던 순진한 내모슴을 생각하며 지금도 웃음이 입가에 서린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께서 저를 남편 없이 홀로 살게 하신것은 저를 기르시는 주님의 크신 배려이심을 알았다. 그것은 내 자아 처리를 하시기 전에 자아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시는 시간이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주님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한다는 자체가 악이었음을, 그리고 내가 선을 행한다는 자체가 또한 악함이었음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주님께서 아담의 생명에 무엇이 있는지 그 속을 보게하시는데 혼동스러운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마존 선교사로 가기 위한 모든 준비를 농촌교회를 섬기면서 준비시켜주셨다.

불의한 청지기의 마음으로 아마존으로
남편이 신대원을 마치고 1990년 3월, 목사고시 자료를 구하러 서울에 다녀왔던 남편은 드낫없이 인도로 선교사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다. 인도에 단기 선교를 다녀왔다는 장신대신대원 선교학 부전공자 중 한사람이었던,홍순범 전도사가 “인도는 그렇게 가난하고 선교사가 필요하다” 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럼 모두 선교학 부전공자들이 인도에 단기선교를 갔으니 “몇명이나 인도에 선교사로 헌신했느냐”는 질문을 했을 때, 그들은 아무도 인도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단다. 그날 밤, 아무도 인도에 선교사로 헌신할 사람이 없다는데 네가 가야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하며 홀로 아니라고 대답을 하며 밤이 깊도록 번민에 쌓여서 고민하다가 새벽녘에 그렇게 원하시면 제가 인도에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잠이 들었다고 하였다 네가 가 주었으면 한다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기로 했단다. 그리고 얼마 후 총회 세계 선교부 총회에 찿아가서 인도에 가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세계선교부에서 말하기를 인도에는 선교에 문이 막혀서 불가능하고. 반면 브라질 아마존에서 선교사 요청이 있는데 아무도 지원자가 없으니 그리로 가주었으면 한다는 요청을 받았다고 하였다.

김철기 선교사가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였을 때, 나는 한마디로 거절했었다.
농촌교회를 섬기는 일도 이렇게 힘겨운데 우리의 영적인 상태로서는 미지의 땅을 품고 섬길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선교사는 모든것에 준비되어진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우기 아마존이라는 땅은 나에게 신비한 어느지역 쯤으로,  한마디로 무서운곳 이라는 정보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죽을 준비를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들도..

그러므로 나는 6개월을 더 기도하겠다고 했다. 어느날 비가 많이 내려 한강 다리가 넘친다고 서울에서 난리가 나던 즈음,  이른 새벽 서울에서 장신대 이광순 교수님께서 서울로 올라 오라는 호출이 있었다. 이 교수님의 사무실에 도착하니 신촌 장로교회 오창학 목사님과 미국에 계신 교수님의 친구이신 박광자 선교사님이 함께 계셨다 박광자 교수님은 젊은 시절 아마존에서 사역하셨던 분이셨다. 이 교수님은 그분들께 우리를 소개하셨다 “아마존으로 갈 선교사들이라”고 소개하셨고 곧 바로 신촌교회 당회장이신 오 창학 목사님께서 저에게 질문하셨다. 왜 사모님은 선교사가 되는것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래서 선교사로 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것인데 어떻게 쉽게 결정을 하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하신다고 무척 기뻐하셨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6개월이라도 기도하려 했으나 이렇게 어른들이 몰아가시니 “주님게서 네 기도 필요없다. 순종하라.” 하시나 보다 싶어서 순종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이튼날 선교사 훈련에 들어갔다.
나는 선교사 훈련을 받으면서 함께 훈련받으시는 선교사 후보들의 마음들이 참으로 이상하게 보였었다. 마치 선교지를 관광지로 생각하시나 싶어서 마음이 몹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녹색 지옥이라고 하는 아마존을 향하여.
김철기 선교사는 전라도 사람이라는 이유로 신촌교회로부터 선교사 파송을 거절당하였다가 당회장 오 창학 목사님의 설득으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우리는 쌍빠울로에서 10개월동안 힘겨운 생활 속에 언어훈련을 받았다.  

김철기 선교사는 정말로 열심히 언어를 배웠다 10개월간 언어를 마치고 강의를 하며 설교를 했다.그러나 나는 아이들을 돌보아야하는 연고로 언어훈련을 제대로 받지를 못했다.또한 언어를 배우는데 심히 어려웠다. 공부하는것을 워낙 좋아하지 않아서 그랬을것이다. 쌍빠울로에서 비행기로 7시간이 소요되는 아마존으로 향하였다. 쌍빠울로  한인들 중에 어느 연로하신 권사님이 싸주신 된장 고추장을 가장 소중히 챙겨 아마존에 도착했다.
그러나 나는 선교지에서는 홀로 언어를 열심히 배웠다.그것은 어떻하든지 깊게 말씀을 전하고 싶어서였다.그리고 남편이 신학교를 세웠고 교회를 세웠으니 강의와 설교를 하고 싶었다.정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열심을 내어 어려운 모세오경과 사도행전과 로마서 강의와 항상 교회와 채플에서 설교를 할수 있었다.남편에게 언어를 가르쳐 달라고 많이도 애원했지만 자기일로 항상 힘겨운 그는 도움이되어 주지 않았다.

마흔 여섯에 기타를 배우고, 신학교 성가대와 함께
아마존에 도착하니 마치 요즈음의 찜질방에 내린것만 같았다.
거대한 아마존에는 260여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언어는 있지만 문자는 없다.
날씨는 35도에서 45도를 일년 365일 오른다. 습도가 90%를 윗돈다.모든것이 축축했다. 오직 끝도 한도 없는 정글과 강 과 하늘 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 그리고 채소를 심어서 채소가 되는 땅이 아니었다.

온갖 벌레와 독충들이 몸속으로, 귓속으로도, 머리속으로 들어가 물어서 제 정신으로 살수가 없었다. 아이들과 나는 물려 늘 온몸에 피와 고름 진물이 흘렀다. 벌레들의 독은 얼마나 가려운지 상상을 초월했다.이 가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참으로 감내하기 힘든 세월이었다. 지금까지 주님께서 떠나라 하시는 명령이 없으시니..
사람들은 아마존을 일컫어 지구의 허파, 지구의 산소 창고라고 한다.
어느날 나는 생각했다 주님의 위대하신 사랑을,  아마존을 보호하시는 방법을 보면서 ‘주님은 바보”라고 불렀다. 누구도 산소가 필요하다고 하나님께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주님은 이렇게 아마존에 산소 창고를 만드시고 산소를 공급하시다니 그 누구도 감사하지 않는데 “주님은 바보”  왜 이렇게 주님은 마냥 착하시기만 하실까?...

만약 아마존의 환경이 좋았다면 아니 아무리 덥고 습해도 먹을것이 없어도 독충만 없다면 사람들은 아마존에 들어와서 아마존을 훼파하여 큰 문제가 벌써 생겼을 것이다.그래서 나는 아마존의 독충들을 일컫어, “아마존을 보호하는 수호 천사”라고 부른다.
아마존의 인디오들은 단순한 생활을 한다 물고기를 잡아 먹고 사냥을 하고 만디오까라고하는 구근 식물을 갈아 볶은것이 주식이다.참으로 단순한 삶이다.

브라질 사람들은 아마존의 인디오들을 “들판의 뛰어다니는 영혼 없는 짐승”이라고 말한다. 너무나 놀랍다. 그리고 마음이 너무 많이 아팠다.
이 보다 더 끔직한 말이 어디 있을까?
주님께서는 이들을 우리에게 돌보라고 하셨다.



나는 46살에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우리형제들의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해서 였다. 우리 형제들은 브라질 사람들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4년간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기타를 가르쳤다. 아마존에는 습도가 높아 종이의 생명이 길지 못하다 그러니 기억을 잘 해 두워야만 한다. 모든 학생들에게 하루에 한시간씩 연습을 하게 했다. 그래서 1년이 지나면 거의 다 찬양 사역자들이 되었다. 그리고 나면 자존감이 상승하고 사람들 앞에서 두려움 없이 주님을 찬양하며 찬양 사역자들로 아름답게 성장을 하였다. 그래서 설교할 때에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천장만 보았던 두려움에서 온전히 해방을 받았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할 때는 기타 한대씩을 선물하여 주었다. 큰 기쁨이었다.
그렇게 기타를 배워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악보를 읽을 줄도 합창을 해 본 적도 없는 신학생들에게 찬송가를 가르치고 그들에게 성가대 지휘를 시작하여 지금은 일년에 한번씩 졸업식 즈음에 칸타타 전곡을 공연한다.브라질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다.그리고 그들도 하나님을 함게 찬양한다.그리고  놀라 이들이 들판에 뛰어 다니는 영혼 없는 짐승이 아님을 그들의 가슴으로 느끼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할렐루야!!  

아마존에 들어가 인디오 부족들고 더불어 살면서 “감사합니다” “용서합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단어가 없는 그들에게 어떻게 주님의 용서를,사랑을,감사를 어떻게 전할수 있었겠는가.
인디오 부족들에게 늘 억울한 소리를 듣고 독을 먹이고 핍박을 하고 끝없는 배신 당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죽으심을 부활을 설명할수 있는 기회로 받게 하셨다. 이렇게 조금식 복음을 알아 가기를 간절히 바랬다. 때로는 주님께 고통을 호소하면 그 사람의 모습이 내 앞에서의 너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셨다.그러니 모든것에서 나됨을 보여주셨으니 할말 없이 기쁨으로 그분과 살수 있었다.

김철기 선교사를 생각할때면 어떻게 그렇게 모진 핍박을,모함을 끊임없이 받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것이라고 생각했다.  2003년 4월에는 인디오 부족들이 우리를 독살하기 위하여 마시는 물에 독을 풀어 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아마존강의 인디오들은 대체로 강 옆에서 삶의 터전을 잡고 거주한다.
그것도 아주 뛰엄 뛰엄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사역 초창기부터 우리는 모터 보트를 타고 카누를 타고 의사들을 동반하고 월 1회 인디오 마을들을 찾아가 복음 전도와 의료사역을 병행하였다.
지금은 크고 좋은 병원선을 가지고 있지만 몇년전까지 우리는 보트나 카누를 타고 인디오 마을들을 찾아가서 사역하였다. 며칠을 가야 하는 먼 인디오 마을들은 가솔린을 먼저 보내거나 가솔린만을 태운 보트나 카누를 보내서 중간 중간 가솔린을 놓아두었다가 가솔린을 공급받고야 돌아올 수 있었다.

선교지 곳곳에 산재해 있는 폭포와 급류를 지나야 했다. 폭포를 지날 때면 폭포 위 아래로 카누를 올리고 내리자면 공포로 전율하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눈물이 흘렀다. 카누를 폭포 위 아래로 움직인 후에는 짐들을 모두 나르고 다시 카누에 올라서 여행을 계속했다. 밤이 되어 정글에 해먹을 걸고 잠을 청할때면 고단함에 지쳐,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오! 내 주님 하고 불러 보노라면 그분이 가까이 오셔서 내 헝글어진 머리를 안쓰러이 쓰다듬으시는 손길을 느끼곤 했다.


우리가 사역하는 선교지는 아마존의 검은 강 상류지역이다.
강의 색이 검은색이라서 검은강이라고 부른다. 아마존의 인디오 부족은 대략 260개 부족으로 추정한다 그중에 우리 지역에는 23개의 부족이 살고 있다.
우리는 교회들을 개척했고 그리고 1997년 3월 21일 검은 강 상류 신학교를 세워서 22개 부족 중에서 일곱 부족들이 학교에 들어와서 공부하고 있다. 학생들과 가족들을 포함하여 80여명이 공동생활을 한다. 신학교가 시작된 이후 90여명이 졸업하여  40여명이 목사 안수를 받았고 50여명의 전도사님들이 정글속에 흩어져 사역하고 있다. 또한 저녁에는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여 대학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인디오 형제들은 일찍 결혼하므로 기혼자는 아내와 자녀들이 함께 들어와서 공부를 한다.
항상 말라리아에 걸리고 그리고 하루라도 문제가 없이 지나가는 일이 없다
특별히 우리 형제들은 문화인이 아니기에 좀더 정성을 기울여만 한다.  


자녀를 가진 모든 선교사들이 겪는 어려움처럼 우리 자녀들도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딸 수산나가 아마존 현지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그곳 현지에 고등학교가 없어서 1997년 한해동안은 공부를 계속할수 없는 상황이 되어 1년동안 집에서 놀고 있었다. 참으로 대책없는 부모들이었다.대책이 없이 사는것이 대책이었다.그때 엘에이에 계신 어느 목사님께서 아마존을 방문하셔서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두 아이들을 미국에서 공부 할수 있게 하여 주셨다. 그때 수산나는 16살이었고 지훈이는 13살이었다.두 아이는 미국으로 가서 수산나는 바이올라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마치고 아마존에 돌아와서 일년간 선교사로 사역하고 미국에 돌아가서 바이올라 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에도 늘 아마존에 가서 교수사역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암투병을 함으로 이제는 내 옆에서 나를 돌보느라 자기 꿈도 실현해 보지도 못한 채 엄마 옆과 아마존을 오가며 헌신하고 있다.
이렇게 주님게서 수산나를 아픔 속에서 믿음의 용사로 키워가시는 것을 보면서 주님의 나라에 쓸만한 사람으로 세워가고 계심에 감격하고 감사할 뿐이다.

우리가 선교사로 출발할 때, 일곱살이었던 지훈이는 여러나라들을 전전하며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겪었다.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격한 사춘기를 보냈다. 그리고 엄마가 폐암이 발견되면서 그 동안 엄마를 힘들게 했다는 아픔에 주님께 전적으로 돌아왔고 지금은 아이합 대학교에서(IHOP UNIVERSITY)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기도하며 아마존 선교사가 되기 위하여 준비중이다.  

어떻게 그 많고 어려운 일들을 감행했던지, 뒤돌아보니 그 날들이 내생에 있었음이 내 일 같지 않게 놀랍기만 하다. 그 많은 인디오 형제들에게 어미가 되어 사랑하며 울며 주님을 나누며 노래했던 그 많고 많은 사랑의 사연들이 이제 병들어 함께 할수 없음에 더욱 그리움만 짙어 간다.선교지에 도착했을때의 젖먹이들이 이제 모두 청년들이 되어 나를 볼때마다 함박 웃음을 보인다.

나는 2006년도 안식년을 맞이하여 한국에 들어왔다가 선교지로 돌아가기 일주일 전에 폐암을 발견하고 비행기를 타는 그날에 나는 수술을 해야 했다.
내 나이 50이 되었을 때, 나는 이미 기력이 쇠하여져서 때론 지팡이를 짚곤했다. 그리고 나는 50세에 마치 7,80세 노인같은, 기력이 완전히 소진된 사람 같았다. 그리고 늘 주님께 주님, 나는 너무 오래 살은것 같다고 말씀을 드리곤했다.  말라리아에 걸리고, 제대로 먹지 못하고 피곤에 지치다보니 더이상 나의 삶을 지탱할수 없음을 느꼈다. 그러나 언제나 주님께 새힘을 주시기를 간구할때 마다 새힘을 주셨었기에 그곳에서 버틸수 있었다.
지나고 나니 참으로 어리석기만 했다. 비로소 건강을 잃고 나니 이제야  얼마나 자신이 어리석었는가를 보게된다.

폐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하고 6개월 후에 암이 없어졌다하여 아마존으로 돌아갔다. 그때 의사는 폐암 2기 환자일 경우 생존율이 50%라고 했었다.  

내 사랑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있는 곳이 나에게는 천국이었다. 그들과 웃으며 울며 고통하며 주님을 기뻐하며 누렸던 곳은 녹색 지옥이 아니라 내게는 천국이었다.

긴 세월을 김선교사와 나는 주님께 우리 형제들이 거듭나기를, 그리고 자아가 소멸되기 위해 십자가 질 줄을 아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 갈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의 터위에 믿음의 집을 짖기를 참으로 긴세월을 기도하며 전쟁하는 삶을 살았다.차라리 우리가 죽고 저들이 변화되고 거듭 날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여 달라고 애원했었다.
마침내 주님께서는 2009년 10월에 시카고의 휘튼 칼러지에서 일어났던 부흥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부흥을 주셨다.정말 우리가 상상할 수없었던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모두들 정글 속으로 달려가 울부짖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그 무서운 살인, 수간,  강간, 동성애, 도적질 등등을 낱낱히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줄이 끊이지 않았다. 그후 주님의 더욱 힘있게 오셔서 학교에 거주하는 학생들 전체가 방언을 하게 되었다.
불같이 임하신 주님께서는 동네에서 신학교에 들어오는 사람들마져도 같은 부흥의 역사를 덧입혀 주셨다.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변화를 받았다. 부흥이 있은 후 그들의 얼굴은 죽은 인디오의 얼굴이 아니라 은혜가 충만한 얼굴들로 존귀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 망고 나무는 많이 있었지만 단한번도 열리지 않았던 망고나무에 엄청나게 많은 망고 열매들이 그 땅의 역사상 처음으로 열렸다. 망고뿐만 아니라 모든 과일들도 더욱 풍성하게 열렸다
역대하 7장 14절의 말씀이 선교지에 그대로 임했다.

그리고 나는 그해 2009년 12월에 다시 재발하여 6개월에서 1년밖에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후 늘 나는 욥기서를 읽어 왔으며 욥기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암 까닭에 하나님을 혼동스러워했다. 그리고 시험에 드는 사람들도 많았었다. 그렇게 험한곳에 가서 헌신한 사람에게 복을 주시지 않고 어떻게 그런 고통을 주실수가 있는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욥의 친구들이 되어서 나의 허물과 죄를 찿기 시작했다.
그리고 권면도 많이 받았다.선교에 헌신은 했을지 모르나 아직 깨지지 않은것이 있어서.. 참으로 합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목사님들까지도 힘들어하셨다.나를 강단에 세울수 없는것이 교인들이 시험들까 염려하셔서 그렇다고 하셨다.

그러나 내게는 참으로 복된 시간이었다.
이땅에서 이렇게 버림 받은 모습으로 있게 하시고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조차 낯설은 사람이 되게 하신 주님의 뜻을 욥기서를 통하여 위로를 받았다. 욥의 박탈과  벌겨 벗겨짐으로 내몰으신 하나님은 무엇을 사람들에게 계시하시고 싶으셨던 것일까. 죄없이 받으셔야 하는 아드님의 십자가의 모멸과 능욕과 그 고난을 신실한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미리 이해할수 없는 인간에게 그 심정을 보이신것일까? 라고  생각했다.

욥이 모든것을 빼앗기고 버려지지 않았다면,죽을 병에 걸리지 않았었더라면 욥의 친구들 속에 있었던 광명한 천사의 모습을 가진 사탄의 모습이 어떻게 이 세상에 드러날 수가 있었을까? 뜻이 있어서 받는 고난임에도 그들은 끝까지 숨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깨서 용서해 주실것이라고 정죄했다. 그러나 욥이 죄가 있어서 그 고통을 받은것이 아님을 하나님은 증명하셨다.주님은 우리를 믿음있는 사람으로 여기사 종종 주님의 고난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고난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시고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주신다.
폐암 수술 후 어느덧 5년을 지나면서 매년 나는 겨울나무를 눈이 시리게 본다.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나의 모습과 같다.
풍성했던 잎으로 치장되어졌었던나, 많은 열매들로 칭송되었던 나무에 겨울이 이 모든것을 거두워 갔다.
이제 모든것을 잃고 시커먼 몸을 드러낸 볼상 사나운 나무에게 누구도 관심을 같지 않는다. 이제 이 나무는 아무에게도 매력적이지 못하다.그렇게 잔인한  추위를 견디며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뿌리로 모은다.
그 분이 진짜 주고 싶은것을 주시고 싶은 마음을 헤아려가면서 힘겨운 십자가 안에 머물고 있다.



나도 그리 생각했었다.
2006년 7월 우리의 열매라고 생각되어진 뛰어난 4명의 인디오 목사님들과 함께 안식년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때 나는 생각하기를 이제 예수님을 영접하고 시골에서 6년의 연단과 아마존에서 16년의 연단이 있었으니 나는 이제 만사가 형통하여 남부럽지 않는 축복과 형통을 받을것이라고 혼자 생각했었다.이제 주님게서 선교비도 부족함이 없이 주실것이라고 혼자 기뻐했었다.
그때 주님게서 제게 물으셨다 “너는 이땅에서 상을 받을래?  아니면 내 나라에서 받을래? 나는 물론 이땅에서 상을 받을수 없음을,  이미 성령께서 개입되셨으니 아니라는것을 알면서도 내 속내의 소리는 ‘주님 그래도 이땅에서 그렇게 서럽게 기도하며 늘 80명의 식구들의 생활비에 쪼달리는 고통도 엄청 받았으니 이제 존경 받는 선교사가 되어 시달리는 선교사에서 벗어 낫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네가 이땅에서 칭찬을 받으면 너는 이미 이땅에서 상을 다 받은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땅의 복 대신에 폐암을 받았고 왼쪽 폐의 절반을 절단하고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나의 주님의 다른 모습을 알기 위한 고통의 행진이 시작이 되었다.나는 그 분의 사랑을 일컬어 ‘잔인한 사랑’이라고 했다.

2010년 4월 다시 암이 재발되어 말기암으로 6개월에서 1년의 생이 남아 있다는 판정을 받고 암 성장을 막는 고용량으로  함암제를 투여하면서 같은 해 11월에는 다시 폐에 물이 가득차서 폐에 관을 꼽고 물을 뽑아야했다. 이렇게 지내는 기간 통증이 얼마나 심했던지, 마치 생살을 가르는 것처럼 견딜수 없는 통증으로 한마리의 짐승이 찢긴 몸으로 아파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여러종류의 통증을 조절하는 진통제들이 있었지만 진통제 알러지까지 있는 나는 통증을 참아내느라 그저 고통이라는 단어와 주님이라는 단어외에 아무것도 느낄수가 없었다.일년이 지난 후 주님께서는 믿음이 신실하신 양 시영 내과 선생님을 통하여 통증을 없애 주셨다. 또한 주님을 사랑하는 신실한 형제들을 통한 섬김 속에 살아 가고 있다.

이 모든 시련 가운데 주님의 안식이 내 심령을 주장하시므로 나는 모든것에서 주님을 느끼며 이 고통 안에 숨어 있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으로 잔잔한 기쁨을 누릴 수가 있었다. 이것이면 나는 족했다. 나는 무엇을 더 구해야할지 모르겠다. 선교사가 병들어 돌아올때, 그것은 모든이들에게 짐이 됨을 명심해야한다. 누가 짐을 좋아하겠는가?
나도 암이 재발되고 한국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을 때, 머무를 곳이 없이 이곳 저곳을 통증이 있는 몸을 이끌고 다니기도 했다.세상적으로 볼때는 마치 버림받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분께서 이 작은 나에게 당신의 버림 당하심, 고난, 고통, 모멸받으심을 나눠 보여주시는 시간이었다.
병들은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길이 없다.그들은 끝자락에 서서 남은 작은 자존심도 내려놓아야한다.어떤 대우를 받던 최고의 대우를 받는듯이 기뻐하고 감사해야한다.참으로 묵직한 십자가를 성큼 지게 하시고 거기에 깔려 튀어 나오는 내 심정을 검토하시며 부지런히 정결케하는 일을 하시는 주님의 단호하신 모습을 뵈었다.이것이 그분께서 특별히 나를 사랑하시는 방법이시고, 나에게 주신 최상의 보상이심을 알아 차렸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은 모습은 이땅에서 병들어 죽게된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같은 사람으로 살았는데 특별한 사람이 되어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여겨진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함께 외칠수 있는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목 마르다” “다 이루웠다” 하신 외치심이 주님과 깊이 연합하기 위해 믿음의 여정에 있는, 사랑으로 숨겨진 사람들임에도…

부활로 가는길, 평생을 주님께  받은 은사로 목숨을 걸고 충성했던 댓가라고  하신 주님, 이제는 때가 됨에, 온전히 주님과 하나되는 길로 나의 심령을 몰아가시는 지독하신 주님의 사랑에 어떻게 다 감사 드릴수 있을까?
오직 주님의 사랑에 겨워 살았던 나의 마음을 주님게서 알아 주신것이 아니가!

아마존의 있는 나의 맏음의 자녀들과 형제들은 나의 고통 속에서 함께 주님의 존귀하심과 승리를 보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이러할진데 이 작은 내 얼마나 복 받은 선교사인가!!


그리고 '선교지의 음식을 소개하라'는 난에 저는 암 투병을 하며 이 식사를 계속하면서 면역성을 높였으므로 이 대체 의학적 식사법을 소개 합니다.


자연 치유 식사법

1, 아침식사
아래와 같은 음식을 드시기 전에 먼저 청국장 가루 한수푼이지만 고봉은 하지 마시고 - 마가루 한수저 밋밋하게 그리고 녹차가루 티수푼 작은 것으로 삼분의 일 혹 도라지 가루가 있으시면 도라지 가루도 반수저를  
물 3-4숫푼에 매실 효소 한수푼 넣어 섞어 드셔요

2)압력 밥속에 찌는것
(일인분 기준으로 하여서___)
ㄱ. 단호박_8분의 한조각
( 청국장 가루를 드시고 난후 첫번째 먹는 음식이 단호박인데 단호박을 잡수실때는 다른것과 섞어 드시지 마시고 단호박만 드십시요  단호박을 드신 후에 다른것들은 자유롭게 다른 것들을 섞어 드십시요.)  
ㄴ. 고구마 반개정도 _껍질채 드셔요
ㄷ. 감자는 껍질 벗겨 반개  정도

3) 삶는것__**
ㄱ.마늘15알 정도 은 삶아서 완전히 익히시고 된장을 아주 조금 넣어 깨소금 조금과 매실 효소 조금 넣어 무친다.(매실 효소는 3년 이상 된것을 사용하는것이 좋습니다. 암 환자는 설탕을 피해야 하므로 매실 효소를 담근지 3년이 지나면 설탕 성분이 없어 진다고 합니다.)
ㄴ. 부로클리는 끓는물에  잠깐 데쳐서 먹는다
ㄷ.양배추는 얇게 채 쓰셔서 끓는 물에 약간 데치시고 건저서 된장 아주 조금과 매실 효소 반 수푼 과 깨를 조금 넣고 무친다.( 들깨 가루를 넣으면 더 맛있을 수가 있습니다.)
ㄹ. 달걀 한 개를 삶아서 먹는다.
ㅁ.쑥떡 하나를 드셔요( 암환자는 몸을 따듯하게 해야 하는데 쑥이 몸을 따듯하게 합니다.)
그리고 쑥떡을 만들어야하는데 쑥과 현미 70% 현미찹쌀30% 아주 쑥을 많이 넣어 두번 빼달라고하셔요.그리고 소금 설탕은 절대로 넣지 마셔요.

4)삶지 않고 먹는 것  
ㄱ.도마도 반개 정도  
ㄴ.사과 사분의 일 정도  
ㄷ.파프리카(노랑색  빨강색 ) 은 반정도 드시고
ㄹ. 비트는 얇게 썰으셔서 3쪽을 드셔요
ㅁ.알로에 종류의 사뽀나리아_라고 합니다. 알로에는 무뉘가 없지만 사뽀나리아는 무뉘가 있음이 틀립니다.
만약에 사뽀나리아가 없으시면 알로에 껍질을 벗기시고 씻으셔서 한 사람 당 6cm 드시기 좋게 으셔서 드셔요.

그리고 김치나 깻잎을 함께 드시는데 김치는 친환경식으로 담가 드시면 좋겠습니다.

**__김치 담그는 방법__**
배추를 절인후 씻으시고
찹쌀풀을 쑤시고 _ 국물을 만드는데 _ 양파 멸우치 다시마 표고버섯 무 당근 _ 삶으시고 졸인다음에
피망을 믹서기에 가시는데 국물 낸것을 조금 식힌 후에 함께 갈으시고 고추가루와 함께 비시면 됩니다
.군데 군데 무를 찡겨 농아도 좋구요 조금 달달하게 하시려면 배를 조금 넣어도 되겠습니다.

  2. 점심식사

점심때는 가능한 나물들을 많이 섭취하시고 나물들을 묻힐때는 된장을 약간만 넣고 매실 효소 조금을 넣습니다 밥은 아주 소량 약 3분의1공기를 먹습니다. 밥 대신 카레를 드실 수도 있습니다.
고기를 드실 때는 삶아서 수육처럼 드십시요.
돼지고기 삶으실때는 압력밥솥에 거피 한수푼 된장 한수푼 소주잔으로 한컵넣으셔서 15-20분 삶아 드시랍니다.

3.저녁식사
아주 소량의 음식물을 섭취합니다.
죽이나 쑥떡, 밥을 드실수도 있으나 아주 소량으로 섭취합니다.


이렇게 3개월을 하면 체질이 바뀌고 면역성이 올라간답니다. 그리고 몸에 독이 빠져나간다고 합니다.

위에 있는 식단은 제주도의 서귀포에 계신 최사라 선교사님으로 부터 도움을 받은 자연치유 식사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