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레미제라블’은 1985년 영국에서 뮤지컬로 초연된 후 지금까지 공연되고 있는데, 이 뮤지컬을 다시 영화화한 것이 이 작품입니다.

 

19세기 초중반 장발장(휴 잭맨)은 굶주리는 조카를 위해 빵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무려 19년을 감옥에서 생활합니다. 지독한 형벌이지요. 이 프랑스법이 정의로운 법이라고 생각 되십니까? 형벌의 목적이 교화라면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이고, 형벌의 목적이 징벌이라면 혹독한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꿈에도 그리던 자유가 찾아왔지만 장발장에게는 주홍글씨와도 같은 딱지가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취직이 안 될 뿐 아니라 허기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아! 가련한 장발장이여! 이 장발장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장발장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은 프랑스의 법도 아니고, 프랑스의 왕도 아니고, 프랑스의 복지체계도 아니고, 프랑스의 개신교목사도 아닌 카톨릭 신부입니다. 이 신부는 굶주린 장발장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잠자리도 제공합니다.

 

그러나, 장발장은 그다음날 새벽에 은잔을 훔쳐 달아나다가 경찰관에게 붙잡히는데, 경찰관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이 은잔은 신부님이 선물로 준 것이오” 경찰관이 장발장을 데리고 신부에게 가서 물어봅니다. 이 장발장의 말이 사실이냐고. 그러자, 신부는 경찰관에게 장발장의 말이 사실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장발장에게 “그대는 가장 귀중한 금촛대는 가지고 가지 않았소”라고 말하면서 금촛대도 장발장에게 챙겨줍니다. 이로써 장발장에게 구원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뒤의 줄거리는 장발장이 새로운 신분으로 살면서 여러 사람을 도와주다가 판틴(앤 해서웨이)을 만나고, 그녀의 딸 코제트(아만다 사이프리드)를 양녀로 삼게 되고, 법의 화신인 쥬베르(러셀 크로우)를 피해 도망 다니는 이야기가 진행되고, 코제트는 운명의 연인인 프랑스 귀족출신 민중혁명가 마리우스(에드 레드메인)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마리우스는 사랑과 혁명의 격량 속에서 갈등하는 장면이 진행됩니다.

 

영화의 대부분은 배우들이 현장에서 직접 노래를 부르는 방식으로 촬영이 되었는데,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장발장의 세상과 법을 향한 분노에 찬 노래,

 

사랑하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으나 결국 그 남자는 떠나가고 혼자 사랑하는 딸을 키우기 위해 사창가에 몸을 맡겨야 하는 처절한 운명의 판틴이 울부짖는 노래,

 

법의 집행만이 정의라고 생각하면서 평생 장발장을 추적하는 쥬베르에게 다가온 장발장의 자비의 손길에 갈등하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쥬베르의 웅장한 노래,

 

장발장을 따라 좇기는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 운명 같은 연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 코제트의 감미로운 노래,

 

사랑과 혁명 사이에 갈등하면서 부르는 마리우스의 고뇌에 찬 노래, 그리고 민중봉기에서 혼자 살아남은 마리우스의 슬픔의 노래.

 

주옥같은 노래들이 영화를 꽉 채웁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구원이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실패한 혁명의 뒤안길에서 운명의 사랑 코제트가 마리우스에게는 구원일 것이고, 죽음 앞에서 딸의 운명을 맡긴 판틴 및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봐준 코제트에게는 장발장이 구원일 것이고, 새 삶을 살게 된 장발장에게는 그 신부가 구원일 것입니다.

 

그러면, 장발장에게 자비의 용서를 보여준 그 신부에게 구원은 누구이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인류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감당하시고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이 영화는 구원과 용서와 사랑과 혁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감동을 올해가 가기 전에 맛보시기 바랍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어떤 아줌마의 말 “영화가 도대체 왜 이래? 이상한 영화잖아!” 그리고 옆에서 같이 걷고 있던 준성엄마의 말 “너무 감동적이야! 내 생애 최고의 영화야!”

 

여러분의 감상은 어떠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