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평은 모든 줄거리가 소개되기 때문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영화는 서울 청계천이 현재의 모습으로 개발되기 전에 그곳에서 영세한 밀링, 선반 공장을 운영하던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사채를 빌리면서 발생하는 이야기입니다.

 

첫 장면에서 ‘강도’라는 남자(이정진 분)가 사채를 받아내는데, 그 방법이 기가 막힙니다. 사채를 빌린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드러난 사실은 원금 300만원을 빌렸는데, 늘어난 이자가 3천만원, 무려 이자가 원금의 10배가 됩니다. 그러니, 매일 벌어 겨우 풀칠하며 사는 사람들에겐 이 원금과 이자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강도’가 원금과 이자를 떼이지 않고 안전하게 수금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였는데, 사채를 빌리는 사람들에게 상해보험을 들게 한 후, 만약 사채를 못 갚을 경우 자신의 신체(손이나 발 등)를 자상(自傷)하여, 그 보험금으로 사채를 갚게 하는 것입니다. 대단합니다. 잔인한 것은 죽지도 못하게 합니다. 죽으면 보험금 타기가 복잡하다고...

 

구조상 사채를 갚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강도 같은 놈(사실 ‘강도’는 칼을 들고 다닙니다.)은 피도 눈물도 없이 자상을 집행하거나 돈을 받아내는데, 그 채무자들이나 가족들이 ‘강도’를 향해 자비를 구합니다. “일주일만 더 시간을 달라”.

 

하지만 강도는 냉혹합니다. 이를 못 견딘 채무자들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불구가 됩니다. 그러면 채무자들이나 가족들은 이 ‘강도’를 향해 외칩니다. “넌 지옥에 갈거야, 불에 타 죽을거야” 나중엔 이런 저주도 나옵니다. “차에 매달아 널 질질 끌고 다니면서 죽일거야!” 이 채무자 가족들의 아픔과 고통이 하늘을 찌릅니다.

 

여기서 감독은 가족이 있는 채무자들과 가족이 없는 ‘강도’와 대비를 시킵니다. ‘강도’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에게 버림을 받고 홀로 자라서 지금의 ‘강도’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가족의 사랑이나 가족의 아픔을 알 길이 없죠.(강도는 자신을 버린 엄마에 대한 깊은 원한이 있어 날마다 자신의 집 벽에 걸린 풍만한 가슴을 드러낸 여인의 그림을 향해 칼을 던집니다.)

 

이 ‘강도’에게 ‘엄마’라고 주장하는 여자(조민수 분)가 나타납니다. 사랑에 못 말라 한 ‘강도’는 이 여자를 차츰 엄마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여자는 ‘강도’의 엄마가 아닙니다. 첫 장면에서 사채를 갚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장애인 ‘상구’의 ‘엄마’입니다. 이 엄마는 복수를 위하여 ‘강도’에게 접근한 것이지요. 엄마의 목표는 ‘강도’가 보는 앞에서 자신이 스스로 죽음으로써, ‘강도’가 겪어야하는 (엄마를 잃은) 아픔과 고통을 평생 간직하고 살게 하는 것. 잔인한 복수입니다.

 

이제부터 엄마의 복수가 시작됩니다. 엄마는 스스로 납치된 것처럼 꾸며, 강도에게 고통을 줍니다. 강도는 엄마를 찾는 과정에서 예전에 자신이 사채를 받기 위하여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을 찾아다닙니다. 그 사람들 중 누군가가 엄마를 납치하였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 과정에서 보험금을 타기 위하여 상해를 당한 채무자들의 비참한 모습이 그려지고, ‘강도’는 자신의 잘못을 조금씩 후회합니다.

 

엄마는 자신의 아들 ‘상구’가 운영하였던 공장의 출입문 자물쇠 뭉치를 들고 ‘수호 금융’(뭘 수호한다는 것인지? 자본과 악을 수호?)의 사장을 찾아갑니다. 이 ‘수호 금융’은 ‘강도’가 일하는 사채업체인데, 결국 ‘강도’도 이 거대한 자본(맘몬)의 하수인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엄마는 이 자물쇠 뭉치로 그 사장의 머리를 내리쳐 죽이는데,(영화에서는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 엄마의 복수는 자본과 악의 근원(근본적인 근원은 안 되지만)에 대한 복수이고, 그 자본과 악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강도’를 대신한 복수이고, 자신의 아들 ‘상구’를 대신한 복수입니다.

 

그리고, 엄마는 철거중인 건물에 올라가서 ‘강도’를 밑으로 부른 후 자신이 납치되어 추락할 것처럼 연기를 합니다. 이 때 ‘강도’가 엎드린 채 두 손을 빌며 울부짖으며 자비를 구합니다. “제발, 엄마는 잘못이 없으니 나를 죽여주세요.”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엄마는 눈물을 흘리면서 죽은 아들 ‘상구’에게, ‘강도’도 불쌍한 놈이라고 독백을 합니다.

 

이런 와중에 노파(이 노파도 사채 때문에 아들을 읽은 노파인데, ‘강도’에게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가 엄마 뒤에서 접근하여 밀어뜨리려고 하는 찰나에 엄마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던져 죽습니다.

 

(김기덕 감독은 이 모든 악에 대한 복수와 죄책을 엄마에게 짐 지웁니다.)

 

‘강도’는 ‘엄마’를 소나무 곁에 묻으면서, ‘상구’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자신의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악과 잘못을 스스로 복수에 넘김으로써 회개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자신이 장애인으로 만든 채무자의 아내 차 밑에 몰래 매달렸고,(이 여자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 ‘강도’에게 “차에 매달아 널 질질 끌고 다니면서 죽일거야”라고 외쳤던 여자입니다. 여기서 ‘강도’가 차 밑에 스스로 매달 때 사용한 도구가 자물쇠 뭉치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맞다면 더 치밀한 각본이 될 것입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이 여자는 고속도로에서 뻥튀기를 팔기 위해 새벽 일찍 트럭을 몰고 가게 되고, 차 밑으로는 선명한 핏자국이 그려지면서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이 영화는 극단적인 연출을 하지만 사실 충분히 가능한 설정입니다. 잘 짜여진 각본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사실 이 영화가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는 바람에, 황금사자상을 받으면 다른 상은 받을 수 없는 규정 때문에 각본상을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는 개인적으로 느낀점입니다.)

 

자비를 베푸소서!

 

이 영화에서 자비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먼저, 채무자들과 그 가족들입니다. 이들은 현대 한국 자본주의 폐해의 자화상이고, 개발 시대의 그늘입니다.

 

두 번째, ‘강도’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강도’, 가족의 돌봄 없이 30년을 혼자 살면서, 사회적 안정망 하나 없이 살면서 피도 눈물도 없는 강도가 된 것입니다. 이 ‘강도’도 자본의 피해자이자 사회의 피해자입니다.

 

세 번째, ‘엄마’입니다. 사채 때문에 자살한 장애인 아들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삶을 올인합니다. 복수를 위해 올인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의 부조리한 삶. 당연히 ‘엄마’도 자비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자비를 베풀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채무자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강도’가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까?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강도’도 ‘수호 금융’의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강도’도 사회에서 버림받은 피해자입니다.

 

‘강도’에게는 ‘엄마’가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까? ‘엄마’도 죽은 아들을 대신하여, ‘강도’를 대신하여, ‘노파’를 대신하여, 채무자들과 가족들을 대신하여 복수를 하지만 자비를 베풀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이들의 외침은 누구를 향한 외침입니까? 채무자들과 가족들이 ‘강도’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하고, ‘강도’가 ‘엄마’를 납치하였다고 착각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외치지만, 실상은 신에 대한 외침일 것입니다.

 

그 신이 누구인지 그들은 모르지만, 이 외침을 들으시는 분이 있습니다. 예전에 이집트 바로왕 밑에서 고통 중에 있던 히브리 민족의 외침을 들은 신처럼.

 

그 신은 자비가 풍성하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 히브리 민족의 외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행동하심으로 구원이 이루어졌듯이, 오늘날에도, 지금 이 시간에도 고통 중에 외치는 그들의 외침을 들으시고 행동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이한 방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