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의 길
[240호 메시아 예수의 복음]마가복음 10장 32~45절
[240호] 2010년 09월 29일 (수) 18:09:18 신현우 shin@wgst.ac.kr

수난과 부활 예언 (32~34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복음을 위하여 다른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려면, 우선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않으면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린다 해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임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믿음의 순종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 인해 임한다. 십자가를 향하여 묵묵히 걸어가시고 죽임을 당하신 예수의 순종이 없었다면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임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가복음 본문은 이것을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십자가를 향하여 가신 이유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약속의 성취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32절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라고 한다. 능욕‧ 침 뱉음(사 50:6)‧채찍질(사 50:6; 53:5)‧죽임(사 53:8~9, 12)은 모두 이사야서에 나오는 종의 고난을 생각나게 한다.1 예수께서 이러한 고난을 당하시는 이유는 예수께서 이사야서가 예언하는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체성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린 음성을 통해 계시되었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말씀은 이사야 42장 1절을 연상시키면서 예수께서 고난받는 종임을 알려 준다(1:11 주해 참조). 이 종의 고난과 죽음은 이사야 53장에서 자세히 묘사된다. 예수의 고난은 이 예언과 관련되므로, 우리는 이사야 53장을 통해 예수의 고난의 목적도 알 수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예수의 고난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우리를 위해 대신 당하신 고난이다. 예수의 고난은 형벌을 받아야 할 우리를 대신하여 당하신 고난이다(사 53:8).

예수의 예언은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신다(34절).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이제야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게 되었을까? 이사야서가 예언한 고난받는 종으로 믿는 사람이 간혹 생겨날 수 있었겠지만,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임을 믿는 사람이 과연 발생했을까?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선언하는 신명기 21장 23절 말씀 때문에 예수를 메시아로 믿기는커녕 여호와의 종이라고 믿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나무(십자가)에 매달려 고난을 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임을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예수께서 자신의 예언대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정죄한 사건이라면,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의롭다고 선언하신 사건이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메시아이시며,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일 수 있다. 왜 의로운 메시아께서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셨는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왔다. 십자가 고난은 우리 죄를 대신한 고난이므로, 하나님 나라는 죄 사함과 관련된다. 이 나라는 예수의 고난을 통해서 왔다. 이제 이 나라에 들어가려면 가족이나 토지 등 모든 것을 상대화해야 한다. 이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권력의 길을 추구하는 제자들 (35~40절)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향하여 가신다. 그렇다면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마땅히 함께 십자가 고난을 향하여 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따르며 종종 다른 것을 기대하고 추구한다. 제자들도 그러하였다. 야고보와 요한은 권력을 기대하며 예수를 따랐다. 그들은 “주의 영광의 때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한다. 여기서, ‘당신의 영광의 때’란 야고보와 요한의 생각 속에서는 예수를 통해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때를 가리킨다고 보인다.2 그들은 예수를 군사적 메시아로 간주했고, 예수를 통해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이라고 간주했다. 그리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러 가시는 예수를 따르면서 그들은 권력을 기대하였다. 그들은 잘못된 제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이처럼 왜곡된 제자도는 오늘날에도 발생하고 있다. 예수를 믿으면 번영한다는 번영의 복음이 한국 교회를 사로잡고 있다. 기복신앙이 제자도를 완전히 왜곡하고 있다. 제자도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 함께 죽으러 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해 예수를 믿는 자들도 있다.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셨으니 우리는 고난당할 필요가 없고 오직 평화와 행복을 누린다는 생각이 전염병처럼 한국 교회를 휩쓸고 있다. 그러나 복음의 내용인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를 통하여 왔다. 따라서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다. 예수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거부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 부활은 십자가 이후에 있다. 세상에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고난을 피할 수 없다. 번영의 복음은 거짓 복음이며 잘못된 제자도다.

권력의 자리를 요구하는 두 제자에게 예수께서 답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38절). 두 제자는 예수의 좌우편의 권좌를 구하고 있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향하여 가고 계시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때야말로 예수의 영광의 때이므로, 예수의 좌우편을 차지하는 것이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뜻한다. 두 제자들은 권좌를 간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예수의 좌우편에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구하는 셈이다. 이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 예수께서는 예수께서 마시는 잔과 세례를 언급하신다. 이것은 고난을 가리키는 용어다. “세례”는 물과 관련되는데, 물은 구약에서 재난을 은유하고(시 42:7; 사 43:2), 당시 헬라어에서 ‘세례받다’(밥띠조마이, bapti,zomai)는 재난당하는 것을 가리킨다(눅 12:50 참조).3 ‘잔’은 때로 고난이나 심판을 가리킨다(사 51:17, 22; 렘 25:15; 49:12; 시 16:5; 75:8; 116편; 합 2:16; Mart. Isa 5:13; Mart. Pol. 14:2; 4QpNah 4:6 등 참조).4 더구나 ‘잔’은 14장 24, 36절에서 고난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앞으로 당할 고난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께서 당하실 십자가 고난을 가리킨다.
 
함께 고난당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두 제자는 예수와 함께 고난당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39절).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그 후에 얻을 권좌를 향하여 가는 길에서 고난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각오한 대로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하신다(39절). 야고보는 이 예언대로 순교의 잔을 마신다(행 12: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요한도 고난을 당하였다.5 그런데, 그들이 요구한 좌우편의 자리는 약속하지 않으신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한다. 표면적으로는 예수 다음의 최고 권력의 자리에 앉는 것은 예수께서 정하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좌우편’이 십자가 좌우편을 뜻하므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자들을 하나님께서 정하실 것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제자들은 첫 번째 뜻으로 이해했겠지만, 예수께서는 두 가지를 동시에 뜻하셨을 것이다. 결국 두 제자가 아니라 두 명의 강도(반로마제국 무장 봉기 세력)가 예수의 좌우편을 차지한다.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이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제자들 대신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택하여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게 하시기도 하신다. 이것은 때로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들이 예수를 따르다가 십자가 앞에서 도망치고 달아난 자리에 예수와 함께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때로 예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들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예수의 좌우편에 앉는 특권을 주신다. 그렇지만,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끝까지 따라가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역도로 몰려 예수의 좌우편에서 역도들이 당하는 십자가형을 당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함께 못 박히지 못하였을지라도 그 후에라도 주님의 고난의 잔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제자의 길이다.

 

섬김의 길을 가시는 예수 (41~45절)

다른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의 권력 추구를 보고 분노한다(41절). 이것은 그들도 권력을 추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이미 누가 더 큰지 논쟁한 사람들이므로 야고보와 요한처럼 더 큰 권력을 차지하고 싶었을 것이다(9:34 참조).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권력을 추구하지 않도록 가르치신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될 것이며(‘에스따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될 것이다(‘에스따이’)”(42~44절). 본문의 원어를 직역하면 ‘되어야 하리라’가 아니라 ‘될 것이다’가 옳다. 건드리(R. H. Gundry)는 미래형 ‘에스따이’(e;stai)가 명령을 뜻하지 않고 미래에 관한 예측을 뜻한다고 본다.6 마가복음 10장 43~44절에 등장하는 ‘원하다’ 동사는 마가복음 10장 35~36절에 나오는 ‘원하다’ 동사를 반복한다.7 마가복음 10장 35~36절에 의하면 더 크게 되기 원하는 자, 으뜸이 되기 원하는 자는 바로 예수의 좌우편 권좌를 차지하기를 소망한 야고보와 요한이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어떻게 하면 권좌를 차지할 수 있는지 가르치시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추구하지 말아야 함을 가르치신다(막 10:40). 그러므로 마가복음 10장 43~44절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그리고 이들 못지않게 권좌에 앉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권력을 탐하지 말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마가복음 10장 44절은 크게 되고자 하는 자가 “너희의(즉 제자들, 또는 새 이스라엘의) 종”이 되고 더 욕심을 부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두의(즉 새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점층법적인 평행법 구조를 가진다.

크게 되고자 하는 자  → 너희의 종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  → 모두의 노예

더 높은 자가 되고자 할수록 더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될 것이며, 더 욕심을 부릴수록 더 비참한 결과에 도달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 이 평행법 구조에 담겨 있다.
 
마가복음 10장 43절의 강조점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라는 경고다. 이러한 욕심을 가진 자는 다른 제자들의 종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며 심지어 이방인에게도 노예처럼 짓밟힐 것이다. 이것이 교회에서(“너희 중에”) 권력을 추구하는 교권주의자들의 비참한 종말에 관하여 마가복음 10장 43절이 경고하는 바다. 교회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자들은 마가복음의 심판의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욕심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권력을 추구하는 제자들에게 으뜸이 되는 방법론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추구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계신다. 예수의 좌우편으로 가까이 갈수록 참으로 더 큰 자가 되는데, 가까이 가는 방법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길 뿐이다. 45절은 이것을 분명히 한다. “왜냐하면, 인자도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해 대속물로 주려고 왔기 때문이다.” 45절은 ‘왜냐하면’(‘가르’)이라는 접속사로 앞 절과 연결되어 그 앞의 말씀의 근거를 제공한다. ‘인자’는 다니엘 7장 13절에 등장하는 ‘인자 같은 이’와 관련된다.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인자 같은 이”는 하나님(“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다(단 7:14). 그런데 이러한 최고의 권력자인 인자 예수께서8 고난받고 죽는 종으로서 섬기러 세상에 왔다. 이러한 예수께 가까이 가려면 고난받는 종의 길을 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예수께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고 이를 위하여 십자가를 향하여 가고 계시기에 예수께 가까이 다가가는 길은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는 예수를 따라가는 길밖에 없다. 이것은 참으로 크게 되는 길이요, 진정한 권력을 차지하는 길이다. 그런데, 예수의 섬김의 길 대신 권력의 길을 추구하는 자는 예수로부터 멀어지므로 점점 더 낮은 자리로 가게 된다.
 
목사가 되어 영혼을 살리는 사역에 전념하기보다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은 참으로 큰 자가 아니다. 장로가 되어 목회 사역에 헌신하기보다는 정치 싸움을 즐기는 자들도 참으로 큰 자는 아니다. 참으로 큰 자는 예수의 복음을 깨닫고 그 복음 앞에 산산조각 난 가슴으로 십자가로 부르시는 예수의 부르심을 따라가는 자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참으로 큰 자는 십자가에 가까이 가는 사람이다. 우리를 향한 부르심은 목사로 부르심도 아니며, 선교사로 부르심도 아니다. 특별한 사역지나 나라로의 부르심도 아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부르심이 있든지 그 부르심은 모두 십자가로의 부르심이다. 침상에서 맞이하는 죽음이 아닌 십자가 위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의 부르심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것이 가장 위대한 부르심이다. 이 부르심이 없이는 목사의 길을 가든지 신학자의 길을 가든지 그 어떤 길을 가든지 참으로 위대한 길은 아니다. 권력을 추구하는 길을 가면서 자신의 명예에 연연한다면 그것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는 길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오라고 부르신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부르신다. 그 보혈의 피로 받는 죄 사함을 위해 부르신다. 죄 사함을 받고 함께 고난의 잔을 마시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이 성찬으로의 부르심을 받는 자는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이며,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자이다. 예수께서는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 고난의 잔을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