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회복]에 대한 감상문

1. 줄거리
다큐멘터리(기록영화) 형식으로 진행되기에 가상적인 스토리를 따로 있을 리 없다. 현지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보고서처럼 영상으로 전달하고 있다. 주제는 뚜렷하다.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감독은 이것을 ‘이스라엘의 회복’이라고 보는 것이다.  

3월 20일, 부림절 날 오후 2시 반에 텔아비브에서 약 45km 떨어진 어느 이층집에 초콜릿과 사탕이 가득 담긴 착해 보이는 바구니가 몰래 배달된다. 그 집은 흔히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라고 불리는 예수 믿는 유대인집이다. 낮잠 자고 있던 그 집 아들이 (이름이 ‘아미’) 이 바구니를 뜯어보다가 숨겨진 강력한 폭탄이 터져 큰 중상을 입어 거반 죽게 된다.

누가 그랬을까?
팔레스틴 이슬람교도의 테러일까? 아니다. 과격파 정통 유대인들의 짓이다. 흔히 이들을 ‘종교인’이라고 지칭된다. 전 국민의 약 10%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평소에 전단지를 작성하면서 뿌리고 다녔는데 그 전단지에는 소위 메시아닉 쥬의 지도자들의 사진이 정렬해있다. 그들을 현상수배범처럼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종교인’들이 외치는 구호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켜라!”이다.  

좁은 교회 입구에 2명의 종교인들이 버티고 서서 교회에 들어가는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를 믿을 인물이 못된다고 열변을 토하고 설득하고 있다. 목사가 그 입구까지 나와서 그들과 설전을 벌린다.

종교인들의 요지는 이러하다. 죽은 자가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2000년 죽은 자가 지금 자신의 죄를 사해준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 분이면 족한데 무슨 또 하나님이 필요하느냐 는 것이다. 

목사는 그들에게 반박한다. 종교인들이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목사 사택에 돌을 던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온 우주의 주님이 되신다고 했다. 종교인들은 그 목사에게 단언한다.  “유대인교와 기독교는 신학적으로 통할 수 있는 점은 없다”

카메라가 이번에는 브엘세바 교회로 이동한다. 약 300명이나 되는 종교인들이 몰려와서 시위하고 기독교 교회의 예배처소 안까지 점령해서 의자를 뒤엎고 예배를 방해한다. 경찰이 와서야 잠잠하다. 5년간이나 매 주일마다 시위를 했었다. 종교인들(과격한 정통 유대인들은) 주장한다. “히틀러는 한 사람으로 족하다!”

아라드 라는 지방의 핍박은 심각할 지경이다. 어떤 선교사는 체스 클럽을 만들어 무료로 신약성경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두 차례가 종교인들이 불을 질렀다. 그리고 이 선교사를 모함하여 선교사가 가택 연금을 당하도록 만들었다. 어떤 메시아닉 쥬들은 직업을 잃고, 아파트에서 추방되기까지 했다.

종교인들, 즉 과격한 정통 유대인들이 흥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2차 대전 때, 약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유럽 전역에서 체포되어 학살당했다. 이것이 홀로코스트이다. 여기에 유럽의 각국 기독교들이 동조한 것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유대인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면 이는 예수의 이름으로 자기 동족을 학살했던 그 원수들을 편드는 셈이 되기 때문에 그들은 분노하는 것이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홀로코스트(집단 학살)의 피해자의 나라에 들어와서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숫자가 몇 명 되지도 않으니 외로운 사람에게는 사랑을 주고, 관심 가져주고, 친하게 지내다가 때가 되면 침례를 행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는 유대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 과격한 정통 유대인들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유대인 자체가 이미 유대교가 믿는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목사가 반박하기를, “예수님은 유대인이 아니냐?”라고 한다. 더 나아가서 “그 예수님을 죽이더니 이제는 너희들이 그 예수님의 증인조차 죽일 참이냐?”고 따진다.
 
그러나 종교인들은 저기 주장만 늘어놓는다. “저 유럽에 가면 진실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그토록 많은데 왜 너희들은 유럽에 가지 않고 왜 피해 입은 자들의 살고 있는 여기 이스라엘에 와서 전도하느냐. 우리가 버린 쓰레기(예수님)를 너희가 하나님으로 만들었다”고 대든다. 

이번에는 ‘거리 전도단’의 활동을 보여준다. 거리에서 율동하고 찬양하면서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전다. 그들은 현수막 같은 것을 만들고 전도했는데 거기에 담긴 내용은 이러하다. 예수(히브리말로 예수아)는 ‘지워 버리고 싶은 이름’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은 ‘구원자’라는 뜻이다 는 것이다. 이들 거리 전도단은 종교인들(과격한 정통 유대인)들의 공격을 피해서 어디서 거리 전도를 할 것인지는 일단 차량에 나뉘어 타고서는 휴대폰으로 연락해준다. 꼭 전투에 임하는 태세들이다.

그 뒤 카메라는 양쪽의 의견을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애쓰면서 정통 유대인들의 예배처소를 찾아가서 예배 모습을 보여주고 지도자의 의견을 듣는다. 회당 안에는 지성소가 갖추어져 있었다. 거기에는 토라(율법)를 놓아두었는데 유대 회당 예배의 특징은 최소한 10명이 기도 노동으로 창조주에게 순결한 기도를 올리는 것이 주된 행사였다.

유대교측 학자는 말한다. “유대인이란 유대교를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에 의한 공격은 서기 4세기경부터 권력적으로 자행되었습니다. 그들은 무력으로 유대인들을 강제 개종 시켰으면 개종하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는 가차 없는 처형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일체의 유대인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말살하려 했습니다. 특히 십자가 운동 때에는, 유럽인들이 이 예루살렘까지 쳐들어와서는 마치 여호수아 장군이 여리고성을 이스라엘이 에워싸서 돌았던 것처럼 그들도 이 예루살렘을 돌면서 그들을 개종하려 했습니다. 이런 핍박의 역사 속에서는 우리 유대인들은 아직도 검은 옷을 입습니다. 애도의 표시입니다. 그리고 소위 ‘통곡의 벽’이라는 서쪽 성전 벽에서 기도합니다. 그곳은 옛적 성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일한 성전 벽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하지만 메시아라고 주장한 자들이 예수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기적을 말하지만 예수만이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언약은 오직 하나 만으로 족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새로운 언약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유대인 정체성을 벗어나서 다른 종교를 만든 자에 불과합니다. 왜 우리가 이 나라에서 기독교 전도를 위험시하느냐 하며는 유대인이 유대인으로 가져야 될 그 삶에서 벗어나도록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선교사가 이 나라에 있다는 것 자체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다른 나라에 가서 선교하는 것은 반대 안 하지만 이 이스라엘까지 와서 그리스도를 선교하는 것은 안 됩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다스리는 이상적인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윗의 혈통으로 왕으로 오실 겁니다. 예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평소 생활의 일면을 보여준다. ‘미쉬나’라는 모세율법 해설서에 따라 식사 전에 손을 씻는 특별한 세면대를 보여주고 손 씻는 장면도 함께 보여준다. ‘코셔’(Kosher)라는 특별히 율법에 따라 조리된 음식이라는 마크를 찍힌 음식만을 먹는 모습도 보여준다.

카메라는 다시 과격 테러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소위 ‘야들라힘’이라는 단체를 주목한다. 이 단체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다시 유대교 신자로 되돌려는 놓으려는 활동을 하는 단체다. 김종철 감독은 이 단체와 전화 연락을 시도했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그 뒤 카메라는 구약 때 다윗의 법궤가 잠시 들린 적이 있는 ‘기럇여아림’ 곳에서 열리는 이스라엘 내의 총 ‘메시아닉 쥬’의 집회를 소개한다. 강단에서 목사들이 먼저 부둥켜안고 회개의 기도를 한다. “우리는 서로를 향한 시기심과 이기주의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을 그르친 것을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뜻을 이루게 하옵소서”

영화는 마무리 지점에 들어서면서 신약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그 징후에 대하여 현지 목사들의 입을 통해 증언케 한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마른 뼈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마른 뼈들이 오늘날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이 마른 뼈들이 생기를 얻으면 다시 이스라엘은 회복이 된다는 것이다. 생기란 바로 ‘회개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말씀도 언급한다. 로마서 11:25-26에 나오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구절도 언급한다. 30년 전만 해도 불과 300명에 불과한 ‘메시아닉 쥬’들이 이제는 14,000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유럽 역사를 통해 징계를 받은 것은 이방인들을 회개하기 위한 하나님의 거대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징계의 기간이 서서히 끝나면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대이변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끝 날이 되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마가복음 13:28-31의 말씀도 등장한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무화과나무란 이스라엘을 말하고, ‘연하여진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마음이 순해진다는 말이고 ‘잎사귀나 나온다’는 것은 ‘메시아닉 쥬’들의 숫자가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세대’란 모든 말씀이 이곳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중심으로 결말을 보게 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끝으로 현지 유대인 목사는 한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우리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해주세요.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전 세계인들도 더욱더 이 징조를 보고 그리스도에게 돌아올 수가 있습니다.”  

끝 자막이 올라가면서 ‘아미집 폭탄 테러 사건’의 용의자가 이 영화 찍고 난 뒤 2주 후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2. 평

전도가 무엇인가?
이미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되어버린 성도가, 소위 ‘살아있다’고 자부하는 세상의 육적인 사람들에 대하여 십자가 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즉 십자가 도 안에서만 유일한 ‘산 자’가 됨을 증거하는 것이다. 만약 십자가 복음의 능력 안에 있지 아니하면 살아도 실은 죽은 자이다.(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따라서 전도자는, 세상 사람과 같은 신분이나 같은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이 살아있는 사람끼리 한마음 되어 같이 예수님 믿으면서 계속 더 살아보자고 초청하는 것이 전도도 아니요 선교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네들 끼리의 정체적 확립과 유지를 위한 담합영토의 확장 시도에 불과하다.(유대교들이 정체성 유지를 위해 수 천년 역사를 투쟁으로 일관하듯이 ) 여기에는 필히 정복성향을 작렬한다. 참된 전도란 도리어 이 세상에서 갑자기 푹 꺼져버리는 즐거움이 있게 된다. 즉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기를 포기 한 것이다.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런 자의 삶을 통해 ‘십자가의 도’가 능력으로 발산되어서 상대방을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죽게 한다. 이것만이 구원이다. 다른 구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전도가 되어서는 전도도 아니요 선교도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전도만이 전도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

그런데 이 영화의 문제점은, 이런 육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선교 실적을 영향력의 세기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즉 열세에 놓인 힘이 이제 기지개를 펴게 되어서 이스라엘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말발이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감독은 이것을 두고 예언의 성취로 보고 있다. 이것은 성경 해석의 오류에서 빚어진 결과다. 모든 성경의 말씀은 필히 십자가 복음의 “다 이루심”을 거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육적이고 실적 위주의 해석은 죄악된 것으로, 오류 해석으로 떨어져나가게 된다. 수치계산에 의해서 판단되는 말씀은 있을 수 없다. 아직도 공간적·시간적 지평에서 말씀이 해석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근원적 죄악에서 솟아나온 육적인 안목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진정한 종말의 징후를 찾으려면 한국 교회를 비롯해서 세계의 모든 교계 안에서 찾아야 한다. 십자가 복음을 교회의 세력 확장으로 해석하고, 선교를 눈에 보이는 실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주체의 외부 확장’이라는 욕망이 거르지 않고 발산된 결과다. 이것은 곧 교회마저 악마가 장악하고 있다는 증거다. 예수님만이 사랑하고 그 외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영적 성도의 십자가 사랑이 교계 권력의 조직적인 질서에 맞부딪치면서 떠밀리고 핍박받는 그 생생한 현장이 바로 치열하게 전도가 이루어지는 현장인데 바로 이 전도는 ‘인간이 벌리는 전도’와 ‘하나님께서 친히 벌리시는 전도’의 마주침이다. 유대인들만 오늘날 이 시대에 눈이 열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악마도 교회의 이름으로 열심히 선교하고 전도하면서 세력 확장에 나서고 있기에 이 ‘마주침’은 세상 끝날까지 멈추지 않는다. 

전도를 위한 기도라는 것도 필히 십자가 복음을 거쳐서 나와야 한다. 바른 기도 내용은 항상 자신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십자가 복음에 의해서 지적받는 경과를 거쳐서 나오게 되어 있다. 즉 “어디 있든지 저를 더 이상 이 세상의 산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게 해주옵소서”라는 내용만 나올 뿐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현지 유대인 목사들도 한국교회를 보고 기도해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는 그곳에 이미 주님에 함께 계심을 깨닫고 십자가 자체가 구원의 능력임을 증거케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오늘날 지구상 모든 지점이 세상 끝 지점이다. 예루살렘이 따로 없다. 현 이스라엘은 그저 혼혈인들의 집단일 뿐이다. 왜냐하면 종말이 되면 성경 해석은 모든 육적인 해석을 거들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인해 십자가 안에 들어앉아 사는 자들만이 이미 ‘온 이스라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