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를 사는 우리 신앙인들이 나도몰래 세상 사조에 물들고 있음을 경계할 필요가 있음을 여기고

글을 퍼 올려봅니다.

 

simulacres- 아니마

현대를 흔히 이미지의 시대, 나아가 이미지가 실체를 압도하고 가상이 실재(實在)보다 더 실재 같은 “하이퍼리얼리티(極寫實, hyper-reality)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조를 반영한 영화 <매트릭스>는 컴퓨터가 프로그래밍한 가상현실을 진짜 현실로 믿고 살고있는 현대인에 대한 은유랍니다,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서 이미지는<좋은 이미지>와 <나쁜 이미지>로 구분하며. 이데아를 닮은 것은 좋은 이미지, 이데아와 닮지 않은 것은 나쁜 이미지라 합니다. 좋은 이미지는 도상(圖像 icon)혹은 복제(copy)라 하고, 나쁜 이미지는 환영(幻影 phantasm)혹은 시뮬라크르(simulacre)라 하며, 원본 없는 복제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실재에 근거하지 않으면서 마치 뒤에 실재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얼마 전 컴퓨터게임에 중독된 부부가 어린자식을 굶겨 죽인 안타까운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오직 자기충족적인 이 하이퍼리얼리티 속 현실은 시뮬라크르(simulacres)에 의해 대체 되어버리고, 이들 부부의 현실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미지에 자리를 넘겨주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즉, 컴퓨터 속의 딸 “아니마”는 건강히 양육되었고, 집안에 홀로 내 팽겨쳐진 3개월 된 친딸은 아사(餓死)했습니다,

히브리서11:1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이 말씀에서의 “것“은 이미지가 아닙니다.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영역인 초월적 현재(영원)속의 실재입니다, 자칫 시간상, 현재적 실재가 아닌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는 icon 아니면 simulacre일 수 있으나, 이미지에는 실재를 죽이는 역기능이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욘-사마라는 이미지는”배용준“을, 의녀(醫女)장금이“는“이영애“이라는 실재를 삼켜 실제는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복제가 원본을 대신하고, 이미지가 실재를 지워버리는 포스트모던 시대인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이점을 주의해야 한답니다,즉,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나 은혜나 사랑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의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꾸어 나가는 믿음의 길에서 오로지 이러한 종교적 확신만이 충만하다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시뮬라크르의 폭력성이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 사울이 그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들이 그렇습니다,십자군 전쟁이 그렇고,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먼저<자기충족적>이 아닌, “오직<주님충족적>이 되어야 한답니다,이러한 자기충족적 신앙사조는 근세 유럽에서 인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음엔 평등주의란 이름으로, 요즘은 종교적관용이란 이름으로 위장된 시뮬라크르에 의해 합리화되고 그 바람에 문밖에 쫒겨난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지만 여전히 너를 사랑한단다”고 하십니다,

이 고집스런 사랑처럼, 누구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참 사랑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좀 닮아야 할 시뮬라크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여 (막 12:30)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라는 욥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는 은혜가 있기를 늘 기도합니다.

<파스칼>은 '자신의 비참을 모르고 신을 안다는 것은 오만을 낳고,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묻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서울 양천구 목동(에이-맨)님의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