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증후군...글쎄다. 이 세상 모든 일들은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하루하루는 사건과 관계들의 연속인데 사건과 관계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며 사는냐에 따라 삶은 커다란 간격을 두고 달라지게 되지 않을까.

 

 나는 소위 맏며느리다. 그리하여 아직도 명절은 부담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명절은 부담이 적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고 늘 모여들던 가족 중 한 가족이 참석치 못한다 했고 또 한가지 더 큰 이유는 이제는 좀 성숙했다는 착각(?)이 시어머니의 무리한 요구도 넉넉히 받아 낼 수 있으리라는 여유로운 계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마디로 “하하하 웃긴다” 였다. 나의 그 여유로운 계산은 무참히 박살이 났다. 명절 마지막 날에는 육신적 피로감이 몰려들었고 지칠줄 모르는  어머니의 끊임없는 요구는 미움의 가시가 되어 내 살을 파고들었다. 성숙해졌을 것이라는 기대는 "내가 저 정도였어?" 라는 자책으로 확인해야 했다. 한마디로 유치찬란함이었다.

 

 그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들과  똑 같이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살면서 포장하고 위장하는 기술이 뛰어날 뿐인 것이다. 결국 딸들에게 고백했다. 나 이러저러해서 힘들고 할머니가 미워. 그러자 막내가 엄마 속상하겠다며 내 편을 드는데 이상하게 그 말은 꼬이고 꼬이더니 내 귀에 급기야 “그것이 바로 너가 주인노릇 하고 있다는 증거” 라고 들리는 것이었다. 

 

절묘한 순간의 깨우침이었다. 하필 딸들 앞에서 이 부끄러운 확인을 하게 되다니. 큰딸은 회사생활이 어렵지 않냐는 나의 질문에 갑이 아닌 을의 입장이 힘들지만 자신을 죽이는 연습이라 생각한다며 하나님께서 죽여가시겠다는데 어쩌겠냐 라는 말을 했는데 엄마인 나는 죽는 것이 싫어서 버둥거리고 있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노출 되었던 것이다. 딸들보다 약간의 지식을 더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언제나 그들보다 나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우월의식은 두려워해야 할 것 같다 딸들 앞에서 몹시 부끄러워졌다.

 

크게 쪽 팔렸다.

 

 어느 누구든 내가 주인노릇을 하게 되면 세속의 가치관으로 뚝 떨어 질 수밖에 없음을 확인 한 셈이다. 말씀이신 그분께서 내 손을 절대 놓지 않으신다는 약속이 없다면 절망인 존재임을 확인하고 확인한 명절을 보냈다. 

 

그러니 매일 그분과의 교제가 없다면 내가 주인의 자리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탐하며, 사람들을 끌어 당겨 내 마음대로 조정하려는 허탄한 본능에 춤을 추며 살아가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결국 불평하고 미워했던 그  근원지는 바로 내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불신앙이었다. 타락한 인간의 결정적 문제는 아담처럼 타인에게 죄를 투사하며 사는 것이 아니던가. 너 때문에. 어머니 때문에. 라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행하시며

그분께서는 그럴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으시며

그런 분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든든한 믿음의 소유자는

 

두려울 것도, 화 낼 일도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과장하거나 허세부릴 일도 없을 것이며 불리하면 거짓말 하고 유리하면 밀어붙이는 일도 없을 것이다.  명절을 지나며 나는, 그런 나의 모습 앞에 경악했지만 결국 그분께서 그 죄악 된 곳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보여주시고 말씀만이 능력임을 알려 주셨음에 무한 감사하다. 모든 것을 상대화 시키고 말씀만 절대화 시켜 나가실 그분의 일하심에 또 무릎을 꿇는다.

 

 그러니 나는 하루하루의 생활들이 예배임을 기억하고 새로운 부활의 가치관으로 사건과 관계들을 해석해 가도록 말씀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아니 그분께서 그렇게 이끌어 가실 것이다. 그러니 부끄럽지만 또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