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6:53~56 그의 옷 가에라도 2019. 3. 3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 째로 메고 나아오니 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지난주에 풍랑 이는 바다 위를 예수님께서 걸어오셔서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한 주간 안심하고 사셨습니까? 말씀을 들을 때는 주님이 함께 하시니 안심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다시 일상 속에서는 불안하고 두려움이 생겼을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고 하는데도 왜 안심이 잘 안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성령의 보증을 받아도 몸으로 사는 동안 탄식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수요일 말씀드린 대로 성도는 피차 권면하고 격려하기를 매일 하라고 합니다(3:13). 피차 권면하는 것은 자기는 이렇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보다 자기의 약함을 자랑함으로 함께 주를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3절입니다.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댔다고 합니다. 밤새 풍랑을 만나 고생하다가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풍랑이 잠잠해 졌습니다. 그러면 원래의 목적지인 뱃세대로 가야 하는데 왜 게네사렛에 정박을 하였는지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6:45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벳새다로 가게 하셨는데 풍랑으로 인하여 다른 곳으로 밀려갔는지 벳세다가 아닌 게네사렛에 갑니다.

 

54~55절입니다. 게네사렛에서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곧 예수님이신 줄 알고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옵니다. 56절은 새 번역으로 봅니다. 예수께서, 마을이든 도시이든 농촌이든, 어디에 들어가시든지, 사람들이 병자들을 장터거리에 데려다 놓고, 예수께 그 옷 술 만에라도 손을 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 예수님의 옷 가에라도 만지를 원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옷 술이라고 합니다. 옷 술은 유대인들의 겉옷 가에 다는 겁니다.

 

민수기 15:37~41절을 봅니다. “3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41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겉옷 단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여 매라고 한 것은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을 기억함으로 방종하지 않고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명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에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키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23:1~7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지키며 율법을 가르친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옷단 귀에 술을 달라고 한 말씀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기억하여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방종하거나 음행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인데 오히려 그 옷 술을 크게 하여 자기는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 것입니다. 옷 술만 크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마에 붙이는 경문 띠도 넓게 합니다. 이것이 방종이며 음행인데도 이들은 모세의 자리 곧 율법을 가르친다는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기 위한 부칙까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도 막습니다(13).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겉모습을 꾸미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였기에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속은 더러운데 겉만 꾸미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옷에 술을 달라고 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기억하여 방종하지 않고 마음과 눈으로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인데 오히려 율법의 조문으로 자기들을 치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회칠한 무덤이기에 음행이며 방종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이 아니라 음행만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겉옷의 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외식하는 자처럼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뿐 아니라 나사렛 출신입니다. 출생은 베들레헴이지만 나사렛에서 자라나셨기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합니다(1:46). 예수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잡으려고 온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합니다(3:21,22). 요한복음 9:22절에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습니다. 그런데 누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려고 하겠습니까?

 

마가복음 5:24~34절입니다.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미 앞에서 누구의 믿음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보았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부정하다는 유출 병을 열두 해를 앓았습니다. 의사들마다 자기가 고쳐준다고 하면서 돈을 요구하였으니 가진 재산도 다 허비하였습니다. 그러니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고 병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이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잘 지킨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하여 경문을 넓게 하고 옷 술을 길게 하고 다녔지만 정작 거룩함은 없고 율법의 짐만 가득지게 합니다. 이런 시대에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낫겠다는 마음이 든 것은 더 이상 자기의 부정함을 해결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5:40절을 다시 봅니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겉옷에 술을 달게 한 것은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지키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옷에 술을 크게 달아서 자기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외식하는 자들만 가득하였지 정말 마음으로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옷 술을 달고 안 달고의 문제가 아니라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누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온 마음과 온 몸으로 지켜 행하시는 거룩한 분이십니까?

 

이사야 53:1~6절입니다. “1 우리가 1)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2)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런 모습으로 오시는 분을 메시아로 맞이하시겠습니까? 아무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고 병을 고쳐주실 때에는 사람들이 몰려 왔지만 정작 고난 받는 십자가 앞에서는 다들 도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여호와께 징벌을 받아서 그렇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예수님의 고난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고 믿게 됩니다. 이러한 자들은 예수님의 옷 가에라도 만지면 낫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봅니다. “봉독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벳세다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풍랑으로 인하여 밤새도록 고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셔서 배에 오르심으로 풍랑이 잔잔해 졌습니다. 그런데 뱃세다로 가지 않으시고 게네사렛에 갔습니다. 벳세다가 아닌 게네사렛에 가신 것은 풍랑으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을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우연은 없습니다.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유령이라고 소리친 제자들과 달리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기를 요청합니다. 이런 믿음이 어디서 옵니까?

 

로마서 4:17절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아브라함은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내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따른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아브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방식이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열두 해 혈루증 앓은 여인이나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기를 구하는 자들의 믿음은 없는 데서 있는 것으로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여기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이방인의 땅 갈릴리 변방의 게네사렛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 가에라도 만지려고 한 것은 사람의 조건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배가 벳세다로 가지 않고 풍랑으로 인하여 게네사렛으로 가게 된 것도 주님께서 의도하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사람의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만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야겠다는 마음이 들기까지 어느 정도로 낮추어지는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우리도 어느 정도로 낮아져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밝히 보이겠습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로 복음을 가리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신이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가리고 있습니다(고후4:4).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고 하신 그 창조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비추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드러납니까? 우리를 높이시는 것이 아니라 낮추십니다. 열두 해 혈루증 앓은 여인처럼 낮추십니다. 벳세다에 가야할 배가 게네사렛으로 갑니다. 물론 나중에는 벳세다에도 갑니다만 게네사렛으로 간 것도 예수님의 의도하심이며 그곳에서 예수님의 옷 가를 만지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옷 가를 만진 자는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병 고침을 받아도 다시 죽게 됩니다. 누가복음 17:1~11절을 보면 10명의 나병 환자가 병 고침을 받아도 영혼의 구원을 얻는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감사한 사마리아인 한 사람입니다.

 

오늘날은 어떻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질 수 있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복음이 읽어지고 들려지고 믿어지는 것이 만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저주 받아 거리끼는 것이며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임을 믿는 자들은 얼마나 마음이 낮추어져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의 마음을 낮추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이며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오늘 찬양대 찬송한 내용은 마가복음 5장의 열두 해 혈루증 앓는 여인이 고침 받은 내용의 가사입니다. 이 찬송은 통일찬송가에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얻게 되는지 후렴을 보시기 바랍니다.

 

1. 큰 무리 주를 에워싼 중에 한 여인 따르며 주 권능 믿고 옷 가를 만져 곧 병이 나았네.

2. 그 여인 떨며 무릎을 꿇고 주 앞에 하는 말 주님의 권능 이적이 되어 나 깨끗합니다.

3. 주 돌아보며 하시는 말씀 너 안심 하여라 네 믿음 너를 낫게 했으니 곧 평안 얻어라.

[후렴] 너도 그 옷 가를 만져 병 고침 받아라 그 권능 지금 너에게 새 생명 되시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