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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동영상설교]

에베소서 2:11~13 그리스도의 피로 2012. 10. 28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지난주에 ‘그때와 이제’라는 제목으로 본문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통역으로 인하여 개략적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집사님이 통역하신 분에게 질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말할 때에 ‘가미사마’라고 하는 말이 걸렸다고 하더랍니다. ‘가미사마’란 일본의 천황을 말할 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본어에서 신이라고 하는 단어가 ‘가미’라는 말 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하는 중에 일본인 두 사람이 일본에 전도가 안 되는 것이 ‘가미사마’로 불리는 신들이 많아서 그런가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로 일본에는 600만의 신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전부 ‘가미사마’인 것이지요! 나도 ‘가미사마’ 믿는데 너도 ‘가미사마’ 믿는구나! 이렇게 나오기에 전도가 안 되는 모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가미사마’는 다 가짜이고 참된 ‘가미사마’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가미사마임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믿는다는 하나님도 일본인들이 말하는 수백만의 ‘가미사마’와 무엇이 다릅니까?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비는 하나님이라면 그것이 다 엉터리 하나님입니다. 내가 나의 필요를 위하여 불러낸 신들은 다 가짜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신에 대한 생각들이 그때에 속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후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모두가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에 사로잡혀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을 섬긴다고 하여도 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신의 이름이 바뀐다고 하여도 그 내용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그때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때에 속한 자는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이런 상태를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가까워집니까?

 

13절입니다. 전에는 멀리 있던 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서만 그때에서 이제로 넘어올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주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는 말에 거부반응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그의 죽으심을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모두가 실패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메시아로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에 그의 피로 구원하였다는 것을 도대체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어느 누가 보아도 십자가의 죽음은 저주요 실패로 보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바르게 고백을 합니다. 그 고백도 하나님께서 알려주셔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예수님께 그런 죽음의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였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평소에 사람들의 생각이 바로 사단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이란 말은 대적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자의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실패로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실패로 보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입니다. 모든 이단들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실패로 보거나 반쪽의 완성으로만 봅니다.

 

다시 13절을 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 말씀은 이방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만 이방인만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만 하나님께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음을 보여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었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자신들의 죄를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향하여 율법을 어기는 자라고 배척하고 죽인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인간이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성전을 주셨습니다. 성전을 통하여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죽임 당하는 정결한 짐승들의 희생을 통하여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대신 희생을 보아야 하는데 그들은 성전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일 만에 일으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고소하기를 성전을 허는 자라고 고소하였습니다. 율법과 성전을 받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 만드시는 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림자인 성전 건물을 붙든다고 참된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였습니다.

 

미가서 3:1~12절을 봅니다. “봉독” 구약 전체의 모습을 이 한 장에 다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우두머리와 통치자들이 정의를 알고 행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며 하나님께서 돌보라고 맡긴 백성들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으로 대한민국의 현실도 보시기 바랍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종교 지도자들이 어떻게 하는지? 국가를 위한다고 하고 백성을 위한다고 하고, 신도들을 위한다고 하고, 신을 위한다고 하는 자들이 과연 무엇을 섬기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지도자들의 죄와 백성들의 죄를 고발해야 할 선지자가 입에 먹을 것을 채워주면 평강을 외치지만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않으면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합니다. 즉 축복과 저주가 자신의 이익에 달린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시대에 미가 선지자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주의 종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의 허물과 죄가 무엇인지 보여주어야 합니다. 11절을 봅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들을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니 재앙이 오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이 땅의 현실과 얼마나 닮았습니까! 엉터리 종교생활을 하면서 재앙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 전체를 통하여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의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율법, 성전, 제사, 제사장, 선지자, 왕, 지도자 그 어떤 것으로도 ‘그때’에서 ‘이제’로 넘어올 수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구약의 실상을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요약하여 다 보여주셨습니다. 율법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성전과 제사가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의 역할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으로 몸으로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십자가로 다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완성,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다 이루실 것을 이미 구약에서 새 언약으로 예언하였습니다. 이 새 언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언약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눈에 십자가는 저주와 실패로 보이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8~24절입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 거리끼고 미련한 것입니다. 모두 저주와 실패로 보기 때문입니다. 오직 구원 얻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2천 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을 믿는 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완성을 성령을 통하여 선물로 받은 자에게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만이 그때에서 이제의 자리로 넘어오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들은 그 어떤 자신의 행위나 육체를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자기를 자랑한다는 것은 아직 그때에 속한 모습입니다. 이제에 들어온 자라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게 됩니다. 나는 이런 자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렇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가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되었습니다. 전에는 죄와 사망이 왕 노릇 하는 가운데서 이 세상의 신이 끌면 끄는 대로 갈 수 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에서 성령의 이끄심을 받고 사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되었습니다. 전에는 멀리 있던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습니다.

 

구약에서 지성소로 가는 것은 일 년에 단 한번 대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어린양의 피를 들고 가야 합니다. 그 뿌려지는 피가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순간에 성소와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 휘장은 아주 두껍게 직조되어 있어서 도끼로 찍어야만 찢어질 정도로 견고한 휘장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 15:37~38절입니다.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지성소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히브리서 10:19~22절입니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 성소로 나아가가 위하여 예수님의 육체를 십자가에 찢으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육체가 휘장이었습니다. 그 휘장이 찢어짐으로 새로운 살 길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그의 피 뿌림을 받았기에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성소는 지상의 성소가 아니라 하늘의 성소입니다.

 

히브리서 9:11~15절을 봅니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의 피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일에 인간은 언제나 부정당하게 됩니다. 인간의 피와 땀이 부정됩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을 말하는 것을 꺼려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그때에 머무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제에 들어온 자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만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았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자들은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히브리서 10:23~39절을 봅니다. “봉독” 그리스도의 피로 그때에서 이제로 옮겨진 자들은 서로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합니다. 주님의 약속은 신실하기에 이 소망을 굳게 잡으라고 격려합니다. 주님의 오심이 가까이 올수록 서로 권면합니다. 성도의 모임에서 이런 격려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진리의 지식으로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완성입니다. 그런데 그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직 그 피 안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