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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동영상설교]

에베소서 2:14~18 그는 우리의 화평 2012. 11. 4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샬롬’인데 헬라어로 번역하면 ‘에이레네’입니다. ‘에이레네’는 단지 개인의 내적인 마음의 평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주석을 보니 이렇게 말합니다. ‘에이레네’라는 말은 불화나 적대 관계가 해소됨으로 이루어지는 화합과 교제와 일치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화평은 14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막힌 담이 헐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이루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담이 유대인과 이방인사이에 얼마나 견고한 담인지 성경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적대적인 담이 왜 생겼는지 그리고 이 담이 어떻게 허물어지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말하기 전에 우리의 현실에서 막힌 담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보다 평화를 추구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적대감이 가득합니다. 남북의 긴장과 대치는 하루도 평화로운 때가 없습니다. 육지와 바다에 경계선을 그어놓고 서로 총부리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남북의 적대감만이 아니라 동서의 적대감이 있습니다. 빈부의 적대감과 노사 간의 적대감이 있습니다. 대 기업과 중소기업, 대형 교회와 개척교회의 적대감들이 있습니다. 가정안에서도 적대감이 있으며 개인끼리도 적대감들이 있습니다.

 

왜 이럴까요? 환경이 문제일까요? 사람들의 성격이 문제일까요? 근원적인 문제는 죄로 인한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죄의 결국이 사망이지만 그 사망의 영향아래 있는 것이 온갖 시기와 질투와 경쟁들이 나타납니다. 이런 죄들은 자기중심적인 자기주장을 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가지만 나와 함께 상대하는 사람도 여전이 자기중심적인 자기주장이 있습니다. 여기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이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여러 가지 세계적인 기구를 만들고 노력하지만 그러나 이 지구상에 어느 하루인들 조용한 날이 없습니다. 국제뉴스와 국내뉴스를 보면 단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성경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의 평화가 되십니까? 어떻게 평화를 이루어 내십니까? 방금까지 세상의 예들을 말씀드린 것은 이 세상이 화평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화평이 없는 이유는 죄로 인한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죄는 인간관계와 국가 관계에서 정한 법률을 어기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결코 성경에서 말씀하는 인간의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평화에 대하여 연구를 하고 세계적인 연합기구를 만들어도 평화를 이루어낼 수가 없습니다.

 

죄가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에 죄가 없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고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갑자기 어떻게 변하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3:12~13절입니다.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이 하나님과 하와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준 여자 때문에 먹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적대감이 생겼고 사람과의 사이에도 적대감이 생겼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모든 관계 속에서 내가 전적으로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경우를 자기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우리를 이대로 내 버려두시면 영원히 서로 원수가 되어 적대감으로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원수의 관계를 끝내실 약속을 하십니다. 창세기 3:14절 이하에 보시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가 될 것이며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수를 이기십니다. 그 말씀이 지난주에 본 13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피가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16절에서는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한다고 합니다. 에베소서의 원수된 것이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지만 하나님과 원수된 것도 십자가로 해결하십니다.

 

로마서 5:10절입니다.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기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이런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 먹고 난 이후의 모습을 우리 안에서도 보기에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원수들이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그의 부활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 엄청난 화목이 그의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로 일어났기에 이제 이웃과도 화평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화평입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시고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습니다. 여기서 원수 되었다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원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 유대인과 이방인이 원수가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은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죄 아래 가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오해하여 자기들의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을 지킬 능력도 없어서 주지 않았고 우리는 특별한 선민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어서 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잘못된 선민의식이 이방인을 개처럼 원수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유대인들의 오해였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 이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으실 때에 은혜로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인간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언약으로 된다는 것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통하여 열방이 복을 받게 하십니다. 여기서 유대인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열방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면 430년 후에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왜 사람의 행위가 아닌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지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받은 것을 자기들의 특권으로 자랑으로 여겼기에 이방인을 원수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도 유대교로 개종할 수 있는 길은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도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할 수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와 같은 사람도 예루살렘 성전에 왔다가 돌아가는 중에 빌립을 만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이 예루살렘에 오면 직접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성전은 여러 구획이 정하여져 있습니다. 제사장들의 뜰이 있고 유대인 남자들의 뜰이 있고 유대인 여자들의 뜰이 있습니다. 그 영역을 담으로 막아 두어 함부로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은 가장 낮은 곳에서 성전의 건물을 볼 수는 있지만 성전 가까이 올 수는 없는 지역을 정하여 담을 쌓아놓았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방인이 그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오면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문이 벽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런 비문이 1871년과 1935년에 두 개 발견이 되었는데 헬라어로 이렇게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외국인도 성전 주위의 장벽 및 경내에 들어올 수 없다. 누구든 그렇게 하다가 잡혀 그 결과 사형을 당하면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잘못이다” 이 담에 대하여 바울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1:27~29절입니다.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바로 앞의 말씀을 보면 바울이 야고보를 방문합니다. 야고보와 장로들이 바울에게 이방인과 함께 결례를 행하도록 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과 성전에 열심이기 때문에 소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그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그 말을 따라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방인과 함께 시내에 있는 것을 본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줄로 알고서는 모든 무리들을 충동하여 바울을 붙잡습니다. 30~40절을 봅니다. “봉독”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왔다는 일로 바울과 그 일행을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이때 천부장이 달려오고 바울이 천부장에게 말하여 말할 기회를 얻습니다. 바울이 히브리말로 자신의 유대인 배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야기를 하면서 이방인에게 전도하게 된 이야기를 하자 오히려 바울을 더 죽이려고 소동을 벌입니다. 이뿐 아니라 바울을 죽이기 위한 결사대도 조직을 합니다. 이 일로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를 하여 로마에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에베소에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아직 예루살렘에 이방인과 유대인의 담은 견고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이 담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은 AD 70년에 무너지지만 바울을 그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담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너졌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기 싫은 유대인들이 데모를 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담들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습니다.

 

다시 14절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화평이라고 합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이 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말합니다. 얼마나 원수가 되어 있었는지 방금 본 말씀에서 확인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적대적인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헐어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화목하게 하셨고 이제 사람사이에도 원수된 것은 화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수 된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어떻게 하나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까?

 

15절입니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고 합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들을 죄 아래 가두어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하시기 위한 것임을 유대인들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모든 율법을 다 완성하심으로 폐하여버리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율법의 조문으로 거룩함과 거룩하지 않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 있느냐 피 밖에 있느냐로 구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16~18절입니다.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것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원수 된 것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먼데 있는 자들 즉 이방인과 가까이 있는 자들 즉 유대인들에게 동일하게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만나서 제일 먼저 평안을 주셨습니다. 세상이 줄 수도 알 수도 없는 평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평안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으며 이웃과 함께 평화를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만들어진 한 새 사람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과 원수였기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음을 인정하십니까? 이런 원수들이 오직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성령을 통하여 믿게 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화평이 이루어진 자는 원수처럼 지내던 유대인과 이방인마저 십자가로 화평하게 되어 한 새사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원수가 없습니까? 집안 식구가 원수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자기를 합리화 하지 말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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