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1:9-11 주의 날에 2020. 6. 21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예배드리는 날을 무슨 날이라고 합니까? 주일(主日)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를 한문으로 변환하면 이런 설명이 나옵니다. ‘명사. (기독교) 일요일 (예수가 부활한 날이 일요일이라는 데서), 주일날세상 사람들도 주일을 기독교의 용어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주일성수 하라는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19 사태로 인하여 몇 달 동안 주일성수 안 해도 별일이 없는 겁니다. 이런 상태에서 주일성수를 강조해도 모이기 힘들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주의 날이 무엇입니까? 구약에서는 주의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합니다. 신약에서는 주의 날이라고 하는 날이 예수님의 날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날짜로 일요일을 주의 날로 고정을 하게 되면 주님은 그 날짜에 매이는 분이 됩니다. 물론 우리가 일요일을 주일로 모인다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로 안식 후 첫날에 모였다고 봅니다. 사복음서에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28:1, 16:9, 24:1, 20:1). 사도행전에는 그 주간의 첫날(20:7)로 고린도전서에서는 매주 첫날(고전16:2)로 말하기에 일요일에 모임을 가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날이 구약의 안식일적 개념의 주일성수는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날짜를 거룩하게 지킨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로마서 14:5~8절입니다.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주의 것이 되었다는 말은 먹든지 마시든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겁니다. 그러므로 일주일 중의 하루 정도가 아닙니다.

 

이어지는 9~11절입니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1)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무엇을 먹느냐 마느냐, 날을 지키느냐 마느냐 그런 것으로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의 것이 되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임을 알고 그 앞에 무릎 꿇은 자들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사도요한이 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너희 형제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마리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내 형제라고 하시면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하십니다(20:17).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나중에 성령이 임하고야 이 말씀을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맏아들로 희생하신 십자가의 공로로 제자들을 형제로 맞아주십니다.

 

이제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향하여 형제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한 형제 된 자들이 무엇에 동참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가신 그 길로 갑니다. 사도들이 간 그 길로 갑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길입니다. 그러면 그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들이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교를 택하고 신을 믿을 때에 환난을 벗어나려고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길은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게 됩니다. 누가 이런 길을 택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때가 되어 복음을 듣게 하시고 믿게 하심으로 예수님께 동참됩니다.

 

사도행전 14:22절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면서 제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바울일행이 복음을 전하러 가는 곳마다 환난을 당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증거 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말을 전하면 핍박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소식입니다. 이 말을 믿으려면 메시아를 죽인 자가 되기에 죽도록 싫어합니다. 이방인들은 로마의 황제가 주가 되어 있기에 예수님을 주로 믿는다는 것은 로마황제를 반역하기에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어디든지 환난을 받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한다면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십자가뿐이냐고 항의를 합니다. 성경에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도 있고 위로하고 격려하라는 말씀도 있고 약한 자를 돌보라는 말씀도 많은데 왜 십자가만 이야기하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복음을 전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한다고 합니다(고전1:17).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며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합니다(고전1: 23). 복음을 믿는 다는 자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합니다(고전2: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6:14).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증거 하는 모습입니다.

 

경기도 모임에 장소를 제공하는 목사님께서 편찮으셔서 몇 달째 설교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오시는 한 분은 암 수술을 받았는데 몸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말을 들을 때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무력하다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병을 고치는 은사가 있다면 안수함으로 싹 낫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모님께서 목사님께 모질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당신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 아니냐고 하였답니다. 그래서 제가 용기를 내서 한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도 죽고, 부자로 살아도 죽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그릇 안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담기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본문 9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형제요 예수 안에서 환난과 그 나라와 인내에 여러분과 더불어 참여한 사람인 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한 탓으로, 밧모라는 섬에 갇혀 있었습니다.” 바울이 왜 복음 전하다가 온갖 핍박을 다 받고, 요한은 밧모라는 섬에 갇혀 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증언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데 사람들을 위로 격려 칭찬하는 말들만 골라서 하면 좋아할 겁니다. 세상에서 잘 된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모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니 핍박을 받습니다. 요한만이 아니라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하니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기뻐하는 자가 나온다면 이것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봉독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이 되어 요한의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습니다. 나팔소리는 오늘 오후 민수기 10장이 마침 나팔에 대한 내용이라서 그곳에서 상세하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이 주의 날에 그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17절입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주의 날에 주님의 영광을 뵙게 되자 그의 발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른 손을 얹고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서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라고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9절의 주의 날을 직역하면 주의 날 가운데서입니다. ‘주께 속한 날이라고 해도 됩니다.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옵니다. 모든 날이 다 주의 날이지만 이 날에 계시를 받았기에 주의 날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날의 개념의 구약적인 의미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구약의 여호와의 날을 찾아보면 사도요한이 주의 날에 엎드려져 죽은 자와 같이 됨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사야 2:10~22절입니다. “10 너희는 바위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11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12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 13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14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 오른 작은 언덕과 15 모든 높은 망대와 모든 견고한 성벽과 16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3)조각물에 임하리니 17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18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19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20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경배하려고 만들었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21 암혈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이 살아서 마음에 담아지는 자들이 여호와의 날 곧 주의 날을 맞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주의 날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삶은 높아지기 위한 삶입니다. 이것이 탐심이며 탐심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날은 모든 높아진 것들이 무너지는 날입니다. 여호와를 대적하여 높아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무너지는 날입니다. 이런 자들이 피할 곳이 바위틈입니다. 모세도 바위틈에 숨기시고 여호와께서 지나가십니다. 사도요한이 주의 날에 죽은 자와 같은 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님이 이사야 선지자와 다른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임하실 때에 여호와의 영광으로 죽은 자와 같이 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날을 예언합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날은 거의 다 심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여호와의 날로 말씀합니다(13:9). 거짓 선지자들의 심판도 여호와의 날로 말씀합니다(13:5). 애굽의 멸망을 여호와의 날로 말씀합니다(30:3). 아모스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어둠과 재앙의 날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번제나 소제나 살진 희생의 화목제를 드리고 멋들어진 찬송을 하면서도 정의와 공의를 버린 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정의와 공의가 없는 예배와 찬양을 하면서 기다린 여호와의 날은 구원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됩니다(5:18~24). 그러나 그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요엘서 2:30~32절입니다.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여호와의 날이 피와 구름과 연기 기둥이라고 합니다. 지난주 오후에 말씀드렸습니다. 이 날이 이르기 전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성부와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믿는 것이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 10절과 요한계시록 1:17절을 다시 봅니다.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으로 주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뵙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의 품에 안기기까지 한 사도 요한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본 자들의 한결같은 고백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을 때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그 영광 앞에 죽은 자 같이 그 발아래 엎드리는 그 날이 주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이나 신약이나 주님의 날을 경험한 자는 다 자신이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 주님의 발아래 엎드린 적이 있습니까? 구약의 선지자나 신약의 사도들이 경험한 그런 주의 날과 같지는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인식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일하십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우리에게 비추어주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뜻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게 되면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4:12~14). 성도라면 이러한 근본적인 방향전환의 회개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주의 날이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주일성수를 하여도 주님과 상관이 없는 자가 될 뿐만 아니라 재림의 날이 심판의 날이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11절입니다.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의 날은 분명하게 재림의 날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날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주의 날을 거의 심판의 날로 말하지만 구원의 날이 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구원이 되는 자들은 요엘서의 말씀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임을 말씀합니다(2:21).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 곧 주의 날을 경험한 자들은 주님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자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으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웁니다. 또한 주의 날, 곧 재림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자들 때문에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도 하고 있습니다(살후2:2).

 

베드로후서 3:1~18절입니다. “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1)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2)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주의 날에 대하여 성경 전체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말씀이 성령의 역사로 실제로 믿어진다면 그 사람은 주의 날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사도요한은 계시를 받는 자이지만 예수님의 영광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이 되는 날이 주의 날입니다. 우리가 사도요한과 같은 경험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이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이 감동하시면 십자가 자신 그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심을 알고 그 발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이렇게 주의 날을 경험한 자들은 우리 주님 다시는 오시는 그날 까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게 됩니다. 그 영광의 날이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아멘!